[송문석 칼럼] 한국 대학 총장과 일본 외교관의 어떤 동행...묵향 속에 피어나는 수묵교향(水墨交響)의 꿈
상태바
[송문석 칼럼] 한국 대학 총장과 일본 외교관의 어떤 동행...묵향 속에 피어나는 수묵교향(水墨交響)의 꿈
  • 편집국장 송문석
  • 승인 2021.12.06 13: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마루야마 코우헤이 재부산 일본총영사 서예전
한일관계 긴장 속에 ‘동행-같이 걷는 한일, 서예에 길을 묻다’ 열려
서예전 찾은 시민들 양국 간 민간차원에서라도 교류 넓어지길 기대
양국 청년 등 미래세대는 상대국에 대한 반감 적고 호의도 높아
편견없는 미래세대 대상으로 다양한 교류 기회 넓혀 공감대 확산해야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글씨들은 아름다웠다. 서예 작품도 그지없이 훌륭했으나 글에 담긴 의미는 더욱 깊었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과 마루야마 코우헤이(丸山浩平) 재부산 일본총영사가 공동으로 마련한 서예전 ‘같이 걷는 한일, 서예에 길을 묻다-동행’ 이야기다. 전시회는 지난달 성황리에 마쳤으나 서예전의 의미가 던진 여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과 마루야마 코우헤이 재부산 일본총영사가 지난 11월 동명대 전시실에서 연 '동행' 서예전(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전호환 동명대 총장과 마루야마 코우헤이 재부산 일본총영사가 지난 11월 일주일간 동명대 동명갤러리에서 연 '동행' 서예전(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좋은 시기보다 나쁜 때가 더 많았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침략국이자 우리 민족을 약탈하고 핍박했으며 문화를 말살한 가해자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소금을 뿌리거나 헤집어 다시 덧나면서 양국 사이를 흐르는 현해탄의 파고가 높아졌다. 양국 사이의 긴장은 양 국민의 감정까지 격앙시켰다.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될 만큼 지금은 한일관계가 날카롭고 살얼음판이다. 이러한 때에 한국의 학자와 일본 외교관이 손을 맞잡고 묵향으로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은 신선한 충격이고 용기있는 행동으로 보였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오른쪽)과 마루야마 코우헤이 재부산 일본총영사(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동행' 서예전이 열린 동명대 동명갤러리에서 함께 선 전호환 동명대 총장(오른쪽)과 마루야마 코우헤이 재부산 일본총영사(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두 사람이 ‘동행’ 서예전을 열게 된 것은 전 총장이 지난해 부산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때 마루야마 총영사가 학교로 예방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고 한다. 당시 총장실에 걸려 있던 전 총장의 글씨를 보고 마루야마 총영사는 자신의 서체로 같은 글을 써서 선물했다. 전 총장은 서예라는 공통분모로 두 사람이 ‘동행’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함께 열어 긴장된 한일관계를 풀어보자고 마루야마 총영사에게 제의해 성사가 된 것이다.

서예전에는 마루야마 총영사 29점, 전호환 총장 26점 등 모두 55점이 전시됐다. 전시 주제인 ‘동행’의 의미를 강조한 글귀가 많다. 특히 한일관계를 표현하는 ‘일의대수(一衣帶水 옷의 허리띠와 같은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접한 관계)’는 전 총장과 마루야마 총영사 모두 출품해 보는 재미를 준다. 전 총장의 글씨가 부드럽고 힘 있는 행서체에 가깝다면, 마루야마 총영사는 회화적인 서체로 원시적인 느낌을 준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의 서예 작품 등화가친과 일의대수(아래)(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전호환 동명대 총장의 서예작품 一衣帶水(일의대수, 사진 아래)와 燈火可親(등화가친, 위)(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마루야마 재부산 일본총영사의 서예작품 일의대수(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마루야마 재부산 일본총영사의 서예작품 一衣帶水(일의대수)(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전 총장은 同行走遠(동행주원,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作橋開道(작교개도, 다리를 만들면 길이 열린다), 遠親不如近隣 遠水不救近火(원친불여근린 원수불구근화, 먼 곳에 있는 일가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같지 못하고, 먼 곳에 있는 물은 가까운 곳의 불을 끄지 못한다) 등 한일 관계의 회복을 바라는 글귀로 ‘동행’의 의미를 강조했다. 또 일본 전국시대 인물인 오다 노부나가가 좋아했다는 時間不待人 思立日吉日(시간부대인 사립일길일,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먹고 실행하려는 날이 좋은 날이다)도 적어 일본에 한발 다가가려 했다.

마루야마 총영사도 화답했다. 言響相和(언향상화, 말이 울려 퍼지고, 서로 어우러지다), 誠信交隣(성신교린,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실로 상대를 대한다), 獨柯不成樹 獨木不成林(독가불성수 독목불성림, 하나의 가지로는 나무가 되지 못하고, 하나의 나무로는 숲이 되지 못한다)며 한일관계의 회복을 바랐다. 또 마루야마 총영사는 유희삼매(遊戱三昧) 계산무진(溪山無盡) 등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을 자신의 서체와 서풍으로 써 추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시했다.

‘동행’ 서예전에서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인 것처럼 격의 없으면서도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 전 총장은 “마루야마 총영사의 글씨는 도의 경지에 올라있는 것 같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으며, 마루야마 총영사는 “총장님은 평소 에너지가 넘치는 분인데 글씨에서는 전통 문인의 느낌이 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전시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부산시내 고등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 문화를 분석한 ‘국화와 칼’을 비롯한 일본 관련 도서를 선정해 독후감 대회를 열어 한국의 청소년들이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일본관에서 벗어나 깊이 있고 폭넓은 사고를 하도록 한다는데 마음을 모았다.

사실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과는 별개로 청년들의 상대방 국가 문화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고 호의적이다. 양국 정부와 기성세대의 날카롭고 저주섞인 언사와 공격을 젊은이들은 먼나라의 이야기라도 되는 듯 가볍게 무시하며 편견없이 바라보고 수용한다.

코로나19로 여행길이 막히자 일본 Z세대 사이에 일명 도한놀이(渡韓ごっこ, 한국놀이)가 유행하고 있다고 경향신문은 전한다(2021, 11, 20). 호텔에서 한국 음식과 콘텐츠를 즐기며 한국 여행을 하듯 놀이를 즐기며 숙박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음식 뷔페, 한국 소주와 안주가 즐비한 포차, 한국식 온돌, 거문고와 해금 공연, 태권도 시연,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 노래에 맞춘 K팝 댄스 무대 등에 일본 Z세대는 열광한다. 도쿄 코리아타운 신오오쿠보는 일본 내 일부 우익들의 혐한시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10대 소녀들에게 ‘도쿄에서 꼭 가보고 싶은 장소’에 꼽힐 정도로 인파가 넘친다.

2020년 일본 내각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에 친밀감을 느낀다’고 답한 비율은 34.9%로 나타나 전체적으로 다소 저조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고 경향신문은 전한다. 남성은 27%, 여성은 42.5%로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다. 세대별로 보면 60대와 70대는 2%, 40대와 50대는 3%, 30대는 4%대지만 20대 이하는 무려 54.5%가 한국에 호감을 보였다. 일본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한국 문화가 곧 ‘힙한’ 것이라는 공식이 통한다고 경향신문은 전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처럼 일본 청년들 역시 유튜브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한국의 K팝, K드라마, K웹툰을 즐기고 수용한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디어, 즉 TV와 신문이 한국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도 젊은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지는 못한다. 미래에도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계와 한국을 바라보고 이해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국의 미래세대도 기성세대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시사저널이 지난 7월 만19세 이상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본 인식 관련 국민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3.1%P)에 따르면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답변이 20대에서 32.1%로 가장 높게 나왔다. 30대는 16.4%, 40대 11.1%, 50대 20.6%, 60세 이상 21.3%가 한일 양국관계 개선과 적극 협력을 지지했다.

미래세대인 한일 양국 젊은이들이 상대방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고 호의도가 높아지고 있는 때에 한국의 대학총장과 일본의 외교관이 대학 구내에서 ‘동행’ 서예전을 연 것은 의미가 크다. 한국과 일본 정부 간의 정치 외교 경제적 갈등과 마찰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그렇다고 양국 간 민간교류와 협력까지 마냥 차단하고 막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편견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청년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이 양국 간에 꽁꽁 언 얼음에 균열을 일으키고 깨뜨릴지 모른다. 전호환 총장과 마루야마 총영사의 '동행'에 박수를 보낸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