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11월 '6ㆍ25 전쟁영웅'에 올리버 스미스 대장, '독립운동가'에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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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11월 '6ㆍ25 전쟁영웅'에 올리버 스미스 대장, '독립운동가'에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 선정
  • 취재기자 박명훈
  • 승인 2021.11.0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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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스미스 대장은 장진호 철수작전 성공적으로 지휘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은 을사늑약에 통분 자결

가을이 깊어가는 11월을 맞이하며 국가보훈처에서 지난달 28일 ‘2021년 11월의 6ㆍ25 전쟁영웅’과 ‘독립운동가’를 선정했다.

국가보훈처는 6ㆍ25 전쟁영웅으로는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한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미 해병 대장을, 독립운동가로는 죽음으로 민족정신을 지킨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선생’ 네 명을 선정했다.

올리버 스미스 대장과 장진호 전투

올리버 스미스 대장은 미 해병대 제1사단장으로 6ㆍ25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특히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성공적으로 흥남까지 이동하는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던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대장의 모습(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장진호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던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대장(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미 해병대 제1사단이 함경남도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해 2주 동안 전개한 철수작전이었다.

스미스 장군은 1만여 명의 병력과 수많은 피란민, 1000여 대의 차량을 비롯한 각종 전투 장비를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수송기로 철수하라는 상부의 제안에 스미스 사단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치욕은 없었다”며 거절했다.

스미스 사단장의 굳은 결심에 따라 12월 6일부터 영하 30도의 혹한과 중국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뚫고 악전고투를 거듭하며 결국 흥남항까지 110km 거리의 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이후 미국 정부는 장진호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50년 12월 십자수 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수여했다. 스미스 대장은 1955년 9월 1일 대장으로 예편했으며 1977년 12월 26일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에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으로 민족정신을 지킨 네 명의 독립운동가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건석 등 네 명의 독립운동가는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강압적으로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자, 이에 통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홍만식 선생은 갑신정변의 주역인 ‘홍영식’의 친형으로 갑신정변 이후 20여 년간 여주의 산골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라며 의관을 차려입고 부친의 묘소에 사별 인사를 드리고 독약을 삼켜 순국했다.

홍만식 선생의 가족 사진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만식 선생의 모습이다(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홍만식 선생의 가족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만식 선생의 모습이다(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이상철 선생의 경우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통함에 밤늦게까지 통곡하다 민영환 선생 등의 자결 소식이 들려오자 뒤를 이어 약을 먹고 30세의 나이로 자결 순국했다.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 ‘징상대(徵上隊, 서울에 올라와 있는 지방 군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던 김봉학 선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군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동지들과 모의했으나 일이 누설되었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자결 순국했다.

김봉학 선생의 순국 내용을 담은 일본 경찰 보고서(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김봉학 선생의 순국 내용을 담은 일본 경찰 보고서(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김봉학 선생의 자결 순국 소식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선생이 순국하여 국민들에게 충의를 알리고 군대에 모범을 남겼다”고 전해진 바 있다.

이건석 선생은 1880년부터 1905년까지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한 소청(疏廳)을 여러 차례 열어 반개화(反開化)ㆍ반일(反日)의 국권수호운동을 벌이다 일본군사령부에 체포된 후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건석 선생은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포기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는 일제의 회유성 제안에도 불구하고 6개월이나 죄목 없이 감금당해 유생들의 탄원에도 끝내 출옥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피틀 토하고 순국했다.

이건석 선생이 살아생전 쓴 글의 친필(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이건석 선생이 살아생전 쓴 글의 친필(사진: 국가보훈처 제공).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홍만식 선생, 이상철 선생과 김봉학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리고 이건석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이처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결기를 보여준 선생들의 자결 순국은 우리 민족의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투쟁의 불씨가 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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