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동 비석마을과 영도다리에서 6.25 피란민의 애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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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동 비석마을과 영도다리에서 6.25 피란민의 애환을 만나다
  • 취재기자 오현희
  • 승인 2021.11.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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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 갈 곳 없이 부산거리 헤메던 6.25 피란민들
살려면 어쩔 수 없었던 선택, 비석 위에 집을 짓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의 장소인 영도다리로 모여들고
피란민들 가족 안부 궁금해 점바치 골목 기웃거려

북한군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피란민은 집을 잃은 채 계속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부산까지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피란길은 혼란스러웠다. 가족의 손을 놓치면 그대로 이산가족이 됐다. 그래서 피란민들은 “만약 헤어지게 되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천리타향 부산에 내려왔으나 몸 누일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집을 짓고 살아갔다.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피란수도였던 부산에서 비석문화마을과 영도다리, 점바치 골목을 통해 당시 상황을 만나볼 수 있다.

갈 곳 없는 피란민들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둥지틀어 비석문화마을 형성

일제강점기 때 무수한 공동묘지로 인해 하얗게 보이는 아미동 산이다(사진:kculturechannel 유튜브 영상 캡처).
일제강점기 때 무수한 공동묘지로 인해 하얗게 보이는 아미동 산의 모습(사진:kculturechannel 유튜브 영상 캡처).

과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의 공동묘지였다. 일본인은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부산항을 개항하고 부산 용두산 일대에 초량왜관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해 살았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살다 죽는 사람이 많아지자 용두산 북쪽에 있는 복병산에 일본인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개항으로 인해 일본인은 더욱 늘어나고 부족한 생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북빈 매축 공사가 시행되었다. 복병산에 있던 공동묘지도 1906년 아미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당시 아미동에 공동묘지가 얼마나 많았던지 무덤과 비석으로 산까지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망자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비석마을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망자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비석마을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비석문화마을은 이름에 걸맞게 주위를 잘 둘러보면 곳곳에서 비석을 찾아볼 수 있다. 계단으로 이용되는 비석과 담벼락에 집 축대로 사용된 비석까지 여러 장소에서 그때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비석문화마을에는 주말에 구청에서 역사 교육을 받은 해설사가 활동한다. 주말에 오전, 오후 2시간 2인 1조 나눠 비석문화마을 방문객에게 무료로 해설을 한다. 방문객들은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마을 탐방 및 해설을 통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많이 알 수 있다.

피란민이 토사 흘러내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담벼락에 부서진 비석과 작은 조개껍질 등이 재료로 사용됐음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피란민이 토사 흘러내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담벼락에 부서진 비석과 작은 조개껍질 등이 재료로 사용됐음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오현희).

과거 피란민은 나무판자 등으로 집을 지을 수밖에 없어 집이 튼튼하지 않았다. 토사가 흘러내려 오면 집은 힘 없이 무너져내렸다. 그래서 피란민은 토사 흘러내림을 방지하기 위해 비석을 부수고 모래랑 조개껍질 등을 이용해 담벼락을 쌓았다. 살아남기 위해 피란민들이 삶의 지혜를 펼치는 모습은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다양한 비석들이 비석문화마을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다양한 형태의 비석들이 비석문화마을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오현희)

담벼락에는 동그란 문양부터 글자가 적혀 있는 비석 등이 보인다. 해설사 김 모(50) 씨는 “동그란 문양은 일본 가문의 표시이고 밑에 검은 비석은 창씨개명한 조선인의 비석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씨는 “가운데에 있는 비석은 가로로 누워져 있는 걸 보아 안에 많은 양의 비석이 겹겹이 쌓여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인 묘지를 집의 축대로 그대로 활용한 집이다. 바람 등으로부터 원형을 잘 유지하기 위해 투명한 벽으로 막아두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일본인 묘지를 집의 축대로 그대로 활용한 집이다. 바람 등으로부터 원형을 잘 유지하기 위해 투명한 벽으로 막아두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한국전쟁 피란 당시 묘지 위에 지어져 지금까지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는 집 한 채가 남아 있다. 하지만 현재 바람 등으로 인해 나무판자가 떨어지고 원형 유지가 힘들어져 묘지 위의 집을 투명한 벽으로 막고 관리하고 있다. 과거에는 비가 많이 와 종이에 콜타르를 발라 지붕에 올려 비가 새는 것을 방지했다. 콜타르(coal tar)는 석탄(coal)을 고온건류할 때 부산물로 생기는 검은 유상 액체(tar)로 방수에는 효과적이지만, 기름 성분이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하다. 따라서 과거에 마을은 불이 자주 났다고 한다. 묘지 위에 집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옛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건 다행스럽다.

피란생활박물관은 지난 6월에 개관하여 주방, 봉제공간, 구멍가게 등 여러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직접 안에 들어가서 보지는 못한다. 해설자 김 씨는 “작은 물품들도 있어 사람이 많이 다니면 관리가 어려워 밖에서 창문을 통해 관람할 수 있게 했다”고 전했다.

피란생활박물관 전시 동선을 따라 관람하면 볼 수 있는 비석 사진관으로, 피란시절 당시의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피란생활박물관 전시 동선을 따라 관람하면 볼 수 있는 비석 사진관으로, 피란시절 당시의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고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비석문화마을 바로 옆에는 감천문화마을이 있다. 감천문화마을 또한 피란민 촌이었지만, 지금은 부산의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하지만 비석문화마을은 감천문화마을 옆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실제 해설자 김 씨는 관광객이 많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는 역사적 장소인 비석문화마을에도 큰 관심이 필요하다.

잊을 수 없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노력, 영도다리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현인의‘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가사로 당시 피란민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이다. 영도다리는 피란민들의 랜드마크였다.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킬 날을 위해 영도다리 주위로 피란민 촌을 만들어 살았다.

유라리 광장 중앙에 피란민의 모습을 빗댄 동상이 세워져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유라리 광장 중앙에 피란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영도다리 밑에는 유라리 광장이 있다. 유라리 광장은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국도 7호선의 시작과 종점인 이곳을 기념하는 광장이다. 유럽의 ‘유’와 아시아의 ‘아(라)’ 그리고 사람, 마을, 모여 즐겨 노는 소리를 뜻하는 ‘리(이)’의 조합으로 유럽과 아시아인이 함께 어울려 찾고 즐기는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도다리가 만남의 장소라는 의미가 있는 만큼 유라리 광장의 이름이 매우 어울린다. 그리고 유라리 광장에는 전쟁 당시 피란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짐 보따리를 든 소녀와 큰 짐을 머리에 이고 있어 힘들어 보이지만, 딸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 꼭 잡은 동상의 모습은 그때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만남의 장소인 영도다리에서 피란민을 위로해 준 점바치 골목

동상이 세워진 곳에서 왼쪽으로 쭉 다리 밑을 지나가면 점바치 골목기록관을 만날 수 있다. 점바치란 점쟁이의 부산 사투리이다. 한국전쟁 때 영도다리에서 피난길에 헤어진 가족이 잘 살아있는지 등 피란민이 점쟁이에게 가서 물으며 슬픔을 달랬다. 이에 점쟁이들은 피란민을 위로해주기 위해 영도다리 밑에 점집을 두었고 이 점집들이 모이고 모여 점쟁이 골목 즉, 점바치 골목이 됐다.

영도다리에서 유라리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위치한 점집으로 2013년에 철거되기 전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영도다리에서 유라리 광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위치한 점집으로 2013년 철거되기 전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다(사진:취재기자 오현희).

하지만 이곳저곳이 개발되면서 점바치골목에 마지막 남은 점집은 2013년 도개가 중단된 영도다리가 다시 도개를 시작하면서 역사의 한순간으로 사라지게 됐다.

비석문화마을과 영도다리, 점바치골목은 절박하고 애절한 피란민들의 삶을 만나볼 수 있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그 간절한 감정을 비석문화마을부터 영도다리와 점바치골목까지 천천히 둘러본다면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개발화로 인해 사라졌고 또 사라질 수 있는 역사의 흔적이 있는 많은 장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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