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봐줘'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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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 봐줘' 저널리즘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6.07.10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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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빅뉴스 대표 정태철

1830년대 미국에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업으로 성장한 신문들이 생겼는데, 이게 ‘페니 프레스(penny press, 1센트로 살 수 있는 신문이란 뜻)’였다. 이들의 선정적 보도는 ‘옐로우 저널리즘’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짓말도 대 놓고 했다. 1835년 ‘선(Sun)’이라는 신문은 자기들이 아프리카 희망봉에 천체망원경을 설치해서 관찰해 보니 달에는 날개달린 사람들이 훨훨 날아다니며 놀고 있었다는 기사를 삽화와 함께 실었다. 물론 이 보도는 날조로 드러났지만, 그들은 희대의 이 사기극에 대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언론이 이처럼 기고만장하고, 기자들이 건방지게 행동하자, 미국 언론계는 점잖은 사람들이 갈 데가 못 된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그게 19세기 말이었다. 그 즈음인 1895년, 아돌프 오크스(Adolph Ochs)가 진실만이 선정적 언론의 대안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뉴욕 타임즈를 창간했다.

뉴욕 타임즈의 가세로 20세기 미국 언론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듯했으나, 1960년대 월남전이 한창인 시절, 미국의 젊은 기자들이 정부 발표 자료를 받아쓰기만 하는 선배 기자들의 취재 관행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 성난 일선 기자들은 당국이 주는 월남전 보도자료를 팽개치고 직접 베트남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종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했다. 탐사보도의 전형, 미국 CBS의 <60 Minutes>가 진가를 발휘한 게 바로 이때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와 미국 현직 대통령 닉슨 하야는 워싱턴 포스트 지가 올린 언론의 개가였다.

그러나 미국의 미디어 사회학자 마이클 슛슨(Michael Schudson)은 “정부의 뉴스 관리(news management) 증가와 이에 따른 사실의 쇠퇴(decline of facts)”라는 미국 언론의 근본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슛슨이 사용한 ‘뉴스 관리’란 용어는 정부가 홍보 담당자, 즉 스핀 닥터(spin doctor)를 고용해서 정부 관리나 정책에 관한 모든 뉴스가 언론에 우호적으로 보도되도록 도모하는 행위를 말한다.

어느새인지 모르게 미국 정부는 기업도 아니면서 기업처럼 홍보부서도 가지고 있고 홍보 담당자도 두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50년 미국 워싱턴 시에는 1,500명의 기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뉴스를 관리하는 정부 측 공보 담당 공무원 숫자는 3,000명이었다. 대통령 기자회견은 미국에서 1933년경에 시작되었는데, 대통령 기자회견이야말로 홍보 담당자들의 계획에 의해 시기와 내용이 철저히 조율됐다. 기자들은 그저 대통령의 말을 전하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낸 매카시는 기자들을 더한층 가지고 놀았다. 그는 툭하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정치인 중 누구누구가 공산주의자라고 발표하고 뒤로 빠졌다. 그게 다였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한동안 그는 뉴스 중심에 서게 됐다. 무책임한 매카시의 언론 이용 전략은 ‘매카시즘’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정치인들의 뉴스 관리를 “뉴스에 굶주린 기자들에게 궁금증을 증폭시켜 최면을 거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1985년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 유학시절에 한국 유학생 선배들이 나에게 꼭 듣기를 권하는 과목이 하나 있었다. 폴 피셔(Paul Fisher) 교수가 가르치는 ‘정보통제(Controls of Information)’란 과목이었다. 여기서 ‘정보 통제’의 의미는, 한국 유학생들이 알고 있던 독재시대 서슬퍼런 권력의 ‘언론 탄압,’ 즉 언론인 체포, 구금, 고문, 기사 검열 및 압수, 그리고 언론사 폐간의 의미를 넘어선다. 정보통제는 선진국인 미국에서 행해지는 사주, 간부, 광고주, 시민단체, 시청자, 독자들의 방해 등 모든 형태의 언론 간섭 행위를 가리키는 포괄적 개념이었다.

사복경찰이 언론사 내부를 자기 집처럼 활보하던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센’ 언론탄압을 익히 들은 당시 한국 유학생들에게 수용자들이 언론사 앞에서 기사에 대해 항의하는 데모도 언론통제라고 가르치는 이 과목은 매우 낯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선진 국가에서 행해지는 언론통제는 이미 미국에 만연하고 있었고, 벌써부터 광범위하게 연구되고 체계화되고 있었다. 미국 언론학자 데이비드 화이트(David White)가 1950년에 ‘게이트키퍼(gatekeeper) 이론’을 내 놓았다. 하루 중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에서 누가 어떤 기준(이것을 뉴스 가치라 부른다)으로 뉴스를 선택하느냐가 이 이론의 핵심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선기자도 자기 이데올로기에 따라 특정 뉴스를 그냥 지나친다면 그게 곧 언론통제가 된다.

선진국형 언론통제의 또 다른 연구로 1955년 미국의 사회학자 워렌 브리드(Warren Breed)의 ‘뉴스룸의 사회적 통제’ 이론이 있다. 각 언론사 뉴스룸마다 부장, 국장, 사주로 구성되는 명령체계, 분위기, 조직문화가 있으며, 그게 기자들에게 직접적인 통제요인이 되는데, 브리드는 그것을 ‘사회적 통제(social control)’로 불렀다.

부어스틴은 정치인들이 언론에 보도될 의도를 가지고 특정 이벤트를 기획하는 것을 말하는 언론 플레이를 연구했다. 그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사건이나 교통사고는 진짜 사건이지만, 정치인들이 고의로 벌이는 기자회견이나 행사 등은 모두 사전에 정교하게 기획된 미디어 이벤트로서 자연발생적이지 않은 사건이란 의미에서 가짜 사건, 혹은 의사(疑似) 사건(pseudo event)이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미디어에서 보는 정치란 무대 위에서 보이지 않는 손과 줄로 조종되는 ‘줄인형극’ 같은 것이 되고 만다.

한국 정치에 PR이 등장한 것은 민주화 시기와 일치한다.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는 정부가 언론을 맘대로 요리했고, 유신 이후에는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정부가 언론과 ‘밀당’할 필요조차 없었다. 정부 홍보 담당자는 윗선의 오더를 언론에 전달만하면 만사형통이었다. 전두환 시대에는 홍보조정실이란 정부 부서가 한 언론사 편집국장에게 내린 지시가 적힌 메모지가 유출되어 관련자들이 구속되는 소위 ‘보도지침 폭로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문제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면서부터였다. 정당들은 홍보수석, 홍보실장, 대변인, 홍보비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홍보PR 전문가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광고기획사나 대기업 홍보 전문가들이 정당과 청와대에 스카웃됐다. 어느날부터 정치인들의 넥타이가 화려해졌다. 의상 코디가 넥타이를 상황별로 골라주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아이덴터티를 빨간색으로 정한 조동원 씨는 원래 카피라이터 출신이고,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대한민국 홍보구호를 표절이라고 문제제기한 더민주당의 손혜원 의원은 산업디자인 교수 출신이며, 국민의당 홍보비 리베이트 스캔들 관련자 김수민 의원도 홍보대행사 대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언론을 전략적으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20세기 초 이태리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는 민주적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는 국민들을 자발적으로 따라오게 해서 민심을 얻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국민 마음을 사서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궁극적으로는 표를 얻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거나 최소한 언론과 친해야 한다. 그리고 언론에 나가는 그들의 모든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얼굴에 화장도 하고, 달콤한 구호도 만들며, 귀에 쏙 들어오는 로고송도 부른다.

정치인들은 언론사 사주와 친해야 하고 편집국 간부와 인맥이 닿아야 한다. 정치홍보에 여야가 따로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조중동과 전쟁을 치렀다. 김대중 정부는 신문사 세무조사를 실시해서 몇몇 사주를 구속시키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개 신문이 신문시장의 30%, 3개 신문이 신문 시장의 60%를 장악할 수 없다는 법을 만들었다가 위헌 판결을 받았다. 법을 만들어 언론을 통제하려는 발상도 뉴스관리 차원의 정보통제다.

지난 주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에게 세월호 사건 관련 보도를 정부에 유리하게 봐달라고 전화한 통화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의원은 한 번만 봐달라고 보도 국장에게 사정하고 있고, 보도국장은 왜 그러시냐고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있었다. 야당은 청와대가 공영방송을 겁박했다고 난리를 쳤다. 여당은 이 의원이 맡은 바 홍보 업무에 충실한 것이라고 받아쳤다. 야당이나 진보 진영에서는 이를 정치적 호재로 써먹으려고 하고 SNS에서는 항의 서명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언론 입장에서 이 사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토 좁은 나라에서 정치인, 기업인 등 뉴스 메이커들이나 그들의 홍보 관리자들과 기자들은 사돈의 팔촌 안에 있다. 학연, 지연, 혈연, 이 세 가지를 걸면, 대한민국 사람은 다 선배고 후배다. 그 많은 기업의 홍보실 직원들은 사건이 날 때마다 전화기 붙들고 신문사 방송국 간부나 기자들에게 한 번 만 봐달라고 애원하는 게 일이다. 요즘은 개인 스마트폰이 있어서 홍보가 더 편리해졌다. 온정주의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효과가 꽤 좋으니까 홍보가 아직도 이 나라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고결한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대학들이 홍보 담당자를 전직 기자 출신으로 고용하고 있다. 대 언론 홍보 업무에도 전관예우가 있나보다. 실제로 약발이 꽤 먹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인맥이 다 통하는 좁디좁은 대한민국은 그래서 뉴스관리 천국이고 홍보의 황금어장이다. 기업인, 정치인, 고위 공무원, 대통령, 연예인, 대학,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은 모두 홍보 담당자를 두고 있다. 그들의 업무는 기자들에게 전화하고, 밥 먹고, 로비하는 일이다. 로비 목적은 기사를 빼거나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다. ‘김영란법’이 기자들과 홍보 담당자들에게 신경 쓰이는 일은 이 법이 언론계 대부분의 취재행위와 홍보 종사자들의 대부분 홍보행위를 동시에 거북하고 찜찜하게 만들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언론인과 모든 업종의 홍보 종사자들이 서로 만나지도 않고, 같이 밥도 먹지 않고,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미디어에는 맥 빠진 기사만 자리 잡을 것이다. 미디어는 날마다 메꿔야 할 지면이 있고 채워야할 시간이 있다. 그래서 홍보 담당자와 언론인들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또는 갑과 을의 위치가 불분명한 공생관계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뉴스관리나 사회적 통제가 언론자유 침해냐고 우리 기자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이 주제를 연구한 적이 있다. 연구 결과, 언론의 사회적 통제에 대해 세 가지 기자 유형이 발견됐다. 첫째, 우리 언론인들 중에는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으로 홍보 행위를 보는 유형이 있다. 나는 이런 기자들을 ‘정치적 언론인’이라고 명명했다. 이들은 홍보든, 언론플레이든,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입장을 가졌다. 이들은 언론이 홍보 수단이 되든 말든 나와 맞는 진영이 이 나라 헤게모니만 잡으면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서 홍보 부탁을 들어 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제일 편한 건 언론을 아예 장악하는 것이다. 정권마다 언론이 헤게모니 쟁탈장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기자들의 인식 때문이다.

두 번째 기자 유형은 ‘조직맨 언론인’들이다. 이들은 광고주나 정치인들이 요구하는 것을 대체로 들어 주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회사 형편을 살리자는 기자들이다. 재정이 쪼들리는 언론사 기자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유형 기자들 때문에 광고를 대주는 기업과 관급 광고를 제공하는 공공기관 로비에 언론사가 잘 넘어간다.

세 번째 기자 유형은 언론은 원칙과 정도(正道)를 지켜야 한다는 ‘전문직업인적 언론인’이다. 이상적인 언론인 상이다. 이들은 모든 홍보의 로비를 뉴스 가치에 따라 들어 줄 것과 거부할 것을 가려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대개 형편이 나은 중앙 메이저 언론사 기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언론인들은 기업이나 정치계의 홍보맨들과 날마다 뉴스를 놓고 흥정하는 ‘한 번만 좀 봐줘’ 저널리즘 환경 속에서 산다. 벤츠 검사나 오피스텔 검사 못지않게 돈 냄새 좋아하는 기자는 돈 로비에 넘어갈 것이다. 권력 지향적 기자에게는 국회의원, 대변인 자리 유혹이 먹힐 것이다. 이래저래 언론은 이익의 십자로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국 워싱턴 시에는 ‘뉴지엄(Newseum)’이라 불리는 뉴스 박물관이 있다. 그 건물 안에 들어가면 처음 보이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뉴스는 역사의 초고(草稿, manuscript)다.” 이 문구는 기자에게 역사를 처음 기록하는 사람이란 숙연한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기자가 되어 “남을 괴롭히는 사람을 열심히 괴롭히는 정의의 사자”가 되고 보니 주변에 친구는 다 사라지고 남은 건 아무 쓸 데도 없는 ‘양심’ 한 조각뿐이라는 어느 은퇴 언론인의 넋두리가 생각난다. 인공지능 로봇이 따라 하지 못하는 깊게 파고드는 기획 기사와 탐사 뉴스를 쓰는 기자의 기개(氣槪)만이 ‘개나 소나’ 기자를 자처하는 얄팍한 SNS 시대 언론인의 최후 지조(志操)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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