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 시빅뉴스와 경성대학교를 떠나며..."어느 교수의 정년퇴임사: 교수인생 32년, 나의 삼유삼무(三有三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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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시빅뉴스와 경성대학교를 떠나며..."어느 교수의 정년퇴임사: 교수인생 32년, 나의 삼유삼무(三有三無)"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21.08.08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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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5일, 저는 시빅뉴스가 당국에 등록된 인터넷신문이 되면서부터 2021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2019년 1년을 제외하고, 시빅뉴스 발행인 겸 대표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2021년 8월 31일자로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직으로 떠나게 되면서, 동시에 시빅뉴스의 대표직, 시빅뉴스 칼럼리스트의 임무도 모두 내려 놓게 됐습니다. 그동안 시빅뉴스에 '황령산 칼럼', '정태철 칼럼' 등에 게재됐던 글을 선별해서 일종의 정년기념 산문집으로 '큰 산 작은 나무'를 출간했습니다. 아래 마지막 저의 칼럼은 산문집 '큰 산 작은 나무'의 서문이면서, 시빅뉴스 대표로서의 '이임사'이자, 경성대 교수로서의 '정년 퇴임사'이기도 합니다.  

 

연구실에서 필자가 학생들과 대화하는 장면(사진: 시빅뉴스 DB).
경성대 문화관 305호 연구실에서 필자가 학생들과 대화하는 장면(사진: 정태철 제공).

큰 산 작은 나무

나는 1990년 3월 1일자로 경성대 신문방송학과(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가 됐다. 그리고 2021년 8월 31일자로 정년퇴직한다. 31년 6개월, 또는 63개 학기 교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단연 학과의 부속 언론사인 인터넷신문 ‘시빅뉴스’를 만들고 키운 것이었다. 이 책('큰 산 작은 나무')은 그 시빅뉴스에 내가 기고한 칼럼 모음집이다.

이 책의 제목 ‘큰 산 작은 나무’의 큰 산은 움직이고 싶었던 ‘세상’이고, 작은 나무는 변화시키고 싶었던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나 큰 산 세상과 작은 나무 사람, 특히 제자들은 내 계획과 내 뜻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큰 산 작은 나무’는 내 교수 생활의 한계와 후회를 의미한다.

그럼 교수 생활 31년 6개월의 결산서가 한계와 후회뿐이었을까? 나는 사람 인생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는 반반이라고 믿는다. 내 교수 생활도 대강은 보람과 후회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교수 생활을 몇 가지 키워드로 회고해 보려고 한다. 회고의 키워드는 남과 달리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삼유삼무(三有三無)다.

일유(一有)

미국의 작가 로버트 번(Robert Byrne)은 “인생의 목적은 목적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의 남쪽 끄트머리 부산의 경성대 교수로 부임할 때부터 나는 하나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의과대학은 부속대학병원을 가지고 있어서 실제 병원에서 교수와 학생이 환자를 같이 진료하면서 의사를 양성한다. 놀랍게도, 미국의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은 의대의 부속병원과 흡사한 기자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가 소유한 실제 상업적 일간지와 전국 공중파 그 지역 네트워크 방송국에서 기자 출신 교수들이 학생들을 기자로 교육하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교육 시스템을 고스란히 부산까지 가져와서 경성대 신방과의 교육과정을 바꾸고, 시설을 마련하고, 마지막에는 정식 인터넷 신문사를 차렸다. 그게 ‘시빅뉴스’였다. 내 교수 생활 중 유독 나에게만 있었던 첫 번째 키워드는 의대 같은 신방과 교육 모델을 만들자는 목적 있는 교수 생활이었다.

2013년 사빅뉴스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은 현재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의 실습실이었다. 학생들은 그후부터 학과 실습실을 '시빅'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현재 시빅뉴스가 교내 다른 건물로 옮겨 갔음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학과 실습실을 '시빅'으로 부르고 있다. 사진은 2013년 당시 시빅뉴스 로고 벽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필자(사진: 시빅뉴스DB).
2013년 시빅뉴스가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은 현재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의 실습실이었다. 학생들은 그후부터 학과 실습실을 '시빅'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현재 시빅뉴스가 교내 다른 건물로 옮겨 갔음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학과 실습실을 '시빅'으로 부르고 있다. 사진은 2013년 당시 시빅뉴스 로고 벽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필자(사진: 정태철 제공).

2007년 창간된 시빅뉴스는 2017년부터 네이버 뉴스 검색 제휴사의 위상을 누리고 있고, 하루 1만 페이지뷰를 유지하는 중견 인터넷 신문사로 성장했다. 학생들은 과목 이름 자체가 ‘시빅뉴스 현장실습’인 필수과목을 두 학기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다. 그래서 경성대 신방과 학생들은 기사를 쓸 수 있거나 영상물을 제작할 수 있어야 졸업이 가능하다. 소위 언론인의 두 가지 직무능력 중 하나를 졸업 요건으로 의무화한 ‘1인 1직무능력 졸업요건제’를 경성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는 실행하고 있다. 이는 전국 최초이며 아직도 유일하다.

필자가 시빅뉴스 편집실에서 학생들과 편집회의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학과 홍보 책자에 실렸다(사진: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제공).
필자가 시빅뉴스 편집실에서 학생들과 편집회의를 하고 있는 장면. 이 사진은 학과 홍보 책자에 실렸다(사진: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제공).

이유(二有)

학생들에게 기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소설이나 시를 작문하도록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상상의 날개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소설을 쓰시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교수 생활 10년 후인 2000년 경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기사작성법을 매학기마다 가르쳤다. 학생들이 개발새발 써낸 기사를 빨간 볼펜으로 마구 긋고. 지우고, 고쳐 써주기를 정년 마지막 학기까지 20년을 해댔으며, 볼펜이 한 달에 한두 개씩 없어졌다. 어느새인지 학생들이 붙여준 내 별명이 ‘빨간펜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빨간펜은 남과 달리 나만 가졌던 두 번째 키워드가 됐다. 학생들은 빨간펜 선생님을 미워했을 것이다. 다만, 졸업한 제자들은 가끔 나한테 고통스럽게 배운 문장력 덕을 봤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학생이 제출한 기사에 필자가 빨간 볼펜으로 참석 지도한 사례(사진: 시빅뉴스DB).
학생이 제출한 기사에 필자가 빨간 볼펜으로 첨삭 지도한 흔적을 보여주는 사진(사진: 정태철 제공).

삼유(三有)

교수 생활 중 교육과 봉사에 관계된 일이 많았다. 그 사이에 연구를 손에서 놓은 때도 있었다. 이렇게 연구하지 않으면 학자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도 일었다. ‘이미지와 환상’이란 번역서를 출간해서 한국언론학회의 그해 번역상을 받았고, 저서도 이 책까지 합쳐 다섯 권을 출간했으니 전혀 엉터리 연구자는 아니었지만, 사회과학자로서 논문과 책을 접할 시간을 많이 놓쳤다. 그래서 마음이 늘 아팠다.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쌓여갈수록 답답하고 초조해지기도 했다.

필자의 독서노트(사진: 정태철 제공).
필자의 독서노트. 노란 포스트잇이 요약된 책과 책 사이를 구분한다(사진: 정태철 제공).

정년 5년 정도를 앞두고 나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책을 읽었다. 부족했던 교수 생활 독서량을 보충하려면 읽은 책의 단 한 줄이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가슴속에서 일었다. 그래서 나는 책 내용을 한 페이지도 그냥 넘기지 않으려고 노트에 빼곡히 요약했다. 요약 분량은 원래 책 볼륨의 5-10% 정도. 그렇게 악착같이 만든 독서 노트가 20권이 됐다. 독서노트를 가진 사람이 나만은 아니겠지만, 내가 가진 세 번째 키워드, 독서노트는 정년 후에도 계속 권수를 늘릴 것이다.

일무(一無)

경성대 교수로 임용 결정이 나자마자,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신방과 대학 동기 중 한 명이 광고 회사에 취직해서 몇 달이 지나고 내게 한 말이었다. 그는 “전공 교과서 중 내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단 한 페이지”라고 했다. 그럼 신방과 졸업생들은 그 많은 대학의 전공과목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것이며 왜 배웠다는 것인가?

나는 교수가 되자마자 대한민국 신문방송학과의 이론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이란 ‘큰 산’을 움직이고 혁신하고 싶었다. 그리고 1990년 3월 첫 학기 첫 수업부터 일체의 교과서를 거부했다. 그 결과, 30년 동안 가르친 과목 개수만 해도 20개가 넘지만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기자와 PD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지식들을 찾고 모아서 나만의 강의록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과서는 내가 안 가진 첫 번째 키워드였다. (다만, 30년 동안 업데이트된 강의록을 버리기가 아까워, 이 중 두 과목 강의록을 교과서로 만들어 마지막 두 학기에 사용했다. 형태만 교과서였지 내용은 결국 강의록이었다.)

이무(二無)

나는 1975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다방에 출입하면서 유독 커피를 주문하지 않았다. 일행들이 다 커피를 시켜도 나는 요쿠르트나 우유를 시켰다. 미국 유학 시절에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커피가 일상화된 미국에서 그럼 무얼 마셨냐고 묻곤 했다. 나는 그냥 물을 먹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1980년대 미국 대학 강의실 복도에는 발로 누르면 시원한 물이 나오는 음수대가 흔했고, 나는 그걸 지나칠 때마다 한 모금씩 마셨다.

나는 지금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교수 연구실마다 커피머신이 흔한 요즘도 내 연구실에는 아무 커피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나는 괴짜도 아니고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내가 외면한 커피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남 따라 하는 관습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전국 최초로 신문방송학과 실무 위주 교육도 시작했고, 교과서도 없앴고, 신방과 부속 언론사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학과장이었을 때, 우리 학과는 학교 차원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는 별도로 학과 독자적으로 신입생 학부모를 학과로 초청해서 학과와 교수들을 소개하고 저녁 식사를 학부모들과 같이했다. 어느 신입생 어머니가 했던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교수님, 와보니 안심이 됩니다.” 그 어머니는 교수며 시설이며 도무지 믿음이라곤 하나도 안 가는 지방 2류대에 다니게 된 자식을 두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나는 우리 학생들이 적어도 학과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학기가 끝나면, 학부모들에게 A4 두세 장짜리 소식지를 직접 작성해서 집으로 우송한 적도 있었다. 내용은 한 학기 동안 학과 소식, 취업률, 장학금 수혜 현황 등이었다. 학과 소식지가 가면, 그 다음 날 부모님으로부터 “이렇게 장학금 받은 학생들이 네 학과에 많은데 너는 뭐했냐?”고 혼났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중의 더 큰 만족을 위해 지금의 작은 만족을 참자는 소위 마시멜로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캠페인 이름은 “Don’t Eat the Marshmallow!”였으며, 학생들은 자기들 끼리 캠페인 로고를 만들어 새긴 학과 티셔츠를 제작해서 입고 다니기도 했다.

삼무(三無)

나의 교수 생활에서 없었던 세 번째 키워드는 골프다. 나는 골프를 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칠 생각이 없다. 내가 미국에 유학하던 1980년대에 문과생들은 거의 골프 치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비와 시간 여유가 있던 이공계열 유학생들은 골프 치는 사람이 꽤 있었다.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 연구년을 미국에서 보냈는데, 나는 책 쓰고 연구하느라 골프 칠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한 10년 전 우리나라 최고 골프장이라는 제주도 나인브릿지 골프장에서 열린 세미나에 1박 2일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세미나 다음날 대부분의 교수들은 골프웨어를 입고 클럽하우스로 향했지만, 나는 서둘러 공항으로 도망갔다. 골프는 나에게 다른 세계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다.

1990년 3월 교수가 됐을 때 350만 원짜리 중고차를 사서 10년을 타다가 버렸고, 그뒤 300만 원짜리 중고차로 다시 10년을 버텼다. 20년간 차 구입비로 650만 원을 쓰고, 나이 55세에 내 생애 처음으로 1500cc짜리 신차를 구입했다. 번쩍번쩍하는 내 생애 첫 신차를 사서 주차장에 세워 놓고 저녁 식사 후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말끔한 내 생애 첫 신차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적셨다. 그차는 10년째 아직도 나의 애마다. 정년했으니 내 생애 두 번째 신차를 사볼까 모처럼 호사스런 궁리를 해 본다.

가끔 인스타그램을 보면, 30대나 40대 직장인이 된 제자들이 부부동반 골프 모임 사진을 올리곤 한다. 대한민국의 풍요를 즐기는 제자들이 부럽다. 그러나 촌스럽게도 내 마음엔 여전히 골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유와 희망

이렇게 세 개가 있고 세 개가 없이, 31년 6개월을 교수로 지냈다. 교육 말고도 학과나 학교 일을 참 많이 했다. 학교 신문사 주간, 대외협력처장, 대학원장, 사회과학대학장, 교육부 국책 사업단장, 기관평가인증 준비위원장, 학교 60년사 편찬위원장 등 대학교수로서 총장 빼놓고 중요 보직은 다 해봤다. 모신 총장만 3명이다. 황희 정승이 여러 임금을 섬겼고, 고건 총리가 대통령을 여럿 모셨다는데, 그 이유는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가 맡은 일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만 보고 일한 것은 사실이다.

필자와 학생 제자들이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가 있는 문화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은 학과 홍보 책자에 실렸다(사진: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제공).
필자와 학생 제자들이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가 있는 문화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은 학과 홍보 책자에 실렸다(사진: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 제공).

정년하면서 그동안 제자들이 보내준 종이 편지를 먼지 털어 가며 한 장 한 장 읽었다. “근면과 검소”, “정확한 수업” “교수님 방에 비스듬히 기운 손수 만든 책장”, “듣기가 쉽지 않지만 배운 게 많았던 수업”, “하도 어려워서 피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후배들에게 들으라고 권했던 수업”, “빨간펜의 공포”, “엄격함”,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교수님”, "조니 클루니 닮았어요", "방송은 JTBC, 신방과는 JTC" 등등이 눈에 띈다.

연구실 앞 작은 연못에 오리 몇 마리가 살고 있었다. 부산에 기록적인 강추위가 몰아친 어느 추운 날 밤, 밤늦게 연구실에서 나오다 오리 걱정이 들어 어두운 연못가를 살폈다. 꽁꽁 언 연못 구석에서 바람 가릴 집도 없이 서로를 끌어 안고 웅크리고 있던 오리 모습에서, 나는 매년 졸업식을 끝내고 교문을 나가던 제자들의 안쓰러운 뒤태가 겹쳐 보였다. 그럴수록 3월 신학기마다 제자들을 더 혹독하게 준비시켜 사회로 내보내야 한다는 결기가 샘솟았고, 그래서 해마다 빨간펜을 더 강하게 휘둘렀는지 모른다.

어떤 제자는 잘 컸고, 어떤 제자는 소식조차 끊겼다. 근황이 걱정되는 제자들일수록 보고픔이 간절하다. '손자병법'에 "진불구명 퇴불피죄(進不求名 退不避罪)"라 했다. 내 이름을 얻으려고 교육이란 전쟁터에 나가진 않았으나, 전쟁에 졌다면, 그 모든 것은 내 불찰이다. 인생이 힘든 제자들의 고통은 다 내 아픔이다. 모든 제자들의 노력이 삶의 결실로 정직하게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내 교수 생활은 조용히 희생을 감수한 나의 반려 아내와 자식들의 지지, 형제자매의 격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굽어보시는 부모님의 음덕 없이는 불가능했다. 나의 고향 대전의 청소년 시절 모임 '한다발' 친구와 선후배의 '참다운 정'도 잊지 못한다. 이제 임무를 다하고 귀향한다. 역시 고향과 가족의 품은 언제나 포근하다.

32년 부산 생활에서 같이 호흡한 학과와 학교의 동료 교수들, 한국언론학회와 경희언론학회  선후배 교수들, 학교 팀장들과 직원들, 조교들, 근로 학생들, 부산 지역 언론계 지인들, 재부 충남고와 미주리 대학 동문들, 학교 미화원 아줌마들, 단골 복사집 사장님, 단골 식당 사장님들까지도 고맙고 미안하다. 어려운 시기에 나만 학교와 부산을 떠나니 말이다.

큰 산과 작은 나무를 못 움직인 한계와 후회로 가득한 교수 생활 32년이 멎었다. 정년은 했지만, 내 앞의 큰 산과 작은 나무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여유롭게 책 읽고, 느긋하게 사람 만나면서, 큰 산 움직일 궁리, 작은 나무 설득할 여지를 찾아보련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교수직 떠나는 나에게 큰 산 작은 나무는 이제부터는 여생의 희망이다.

*그동안 시빅뉴스와 '정태철 칼럼'을 애독해주시고, 후원해주시고, 그리고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시빅뉴스가 미래 언론인 양성의 간성(干城)으로 굳건히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저는 이제 그만 펜을 내려 놓고 시빅뉴스를 떠납니다.    2021년 8월 9일      정태철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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