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 아동학대, 펜트하우스 시즌2, 그리고 비혼주의자의 ‘살기(殺氣)’보다는 ‘사랑이란 봄꽃’과 ‘희망이란 새싹’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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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아동학대, 펜트하우스 시즌2, 그리고 비혼주의자의 ‘살기(殺氣)’보다는 ‘사랑이란 봄꽃’과 ‘희망이란 새싹’을 위하여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21.03.2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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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 중 뉴스는 ‘아동학대’가 아니라 ‘아동살해’다. 작년 10월, 양부모 학대로 생후 16개월에 숨진 ‘정인이 사건’을 필두로, 올해 1월, 경기도 고양에서는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신생아를 엄마가 아래층으로 던져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 1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천에서는 8세 딸 아이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던 40대 엄마가 경찰에 체포됐다. 올해 2월에는 열 살짜리 조카딸을 욕조물에 머리를 집어넣어 물고문하고 폭행해서 죽게 한 30대 이모 부부가 잡혔으며, 이 사건 며칠 뒤, 전북 익산에서는 태어난 지 2주 된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20대 부부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리고 2월 10일 경, 경북 구미에서는 굶어 죽은 3세 여아를 몇 달 만에 외할머니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으나, DNA 검사 결과는 48세 외할머니가 친모이며, 친모로 알려진 딸이 죽은 아이와 형제 관계임을 밝혀냈다. 소위 ‘보람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도대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전모가 아직도 미스테리다.

언론들은 자식을 살해한 이들을 일제히 엄마이기를 포기한 악마라고 불렀다. 2월 설날 연휴인 11일에서 14일까지 사이에 총 187건의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됐고, 이는 지난해 신고 건수 94건의 2배라는 보도도 있었다. 아동학대와 아동살해는 우연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신종 사회적 전염병인 것 같다.

인도 철학자 라즈시니는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라고 정의했고, 시인 정채봉은 ”하늘 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고 읊었다. 모성애로 가득 찬 엄마 품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런 엄마 품을 찾는 자녀를 엄마가 죽인 사회적 전염병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최근 어느 일요일, 부산에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나는 지리가 익숙지 않은 곳에 사는 지인에게 전달할 책이 있어서 네비게이션에 의지해서 차를 몰고 갔다. 적신호에서 좌회전 차선에 서 있었는데, 직진 신호로 바뀌자 뒤에서 빵빵거리고 난리가 났다. 비 때문에 차선이 잘 안 보여서였는지, 아마도 내 차가 직진 차선에 서 있었나 보다. 나는 재빨리 왼쪽 좌회전 차선으로 차를 옮기고 한숨을 돌리는 찰나, 직전하던 차 한 대가 멎더니, 새카맣게 틴팅(선팅)한 차량 윈도우가 내려갔고,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나에게 삿대질과 쌍욕을 몇 초 해대다 가는 것이었다. 틴팅이 옅은 내 차에서 빤히 보였을 아버지뻘 되는 내 나이를 무시한 건지, 마스크 탓에 몰라본 건지, 인륜이고 뭐고 세상 안중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한 그녀에게 받은 모욕감에 치가 떨렸다.

“아아~~”하고 나도 몰래 장탄식이 나왔다. 요새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타인에게 살의(殺意)를 품고 살까. 그렇게 생각하니,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에 쏟아지고 있는 학폭 미투 릴레이, 비대면 수업 때문에 급증한다는 사이버 학폭, 남녀 혐오 싸움, 정치의 진영 다툼, 그리고 청부살인과 불륜이 판치는 SBS의 ‘펜트하우스 시즌2’나 tvN의 ‘마우스’와 같은 막장 드라마 등 기성세대가 만든 온갖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와 가정환경이 자녀 세대로 대물림되고 있는 듯하다.

사회에 만연한 증오의 분위기가 젊은이들을 비혼주의자로 몰고 있다. 사랑이란 봄꽃에서 희망이란 새싹을 찾아보자(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사회에 만연한 증오의 분위기가 젊은이들을 비혼주의자로 몰고 있다. 사랑이란 봄꽃에서 희망이란 새싹을 찾아보자(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여기서 잠시 폭력적 사회 현상과 사람들의 분노 조절 장애적 살의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최근 1-2년 사이에 학생 상담 30년 동안 내가 처음 겪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상담 중 학생들에게 프라이버시 침해나 심적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남녀 관계의 문제 등이 없는지 묻곤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저는 비혼주의자라서 남녀 문제는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처음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당황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아니라 그후에 서너 명이 더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비혼이 MZ세대의 새로운 트렌드임을 직감했다. 처음에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할 수도 있는 것이니 어렸을 때부터 비혼주의를 선언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나름 조언했지만, 요새는 비혼주의를 밝히는 학생을 만나면, “그래?”하면서 “그럼 다른 얘기하자”고 내가 먼저 화제를 돌린다.

그러나 여전히 속으로는 요즘 MZ세대가 교수 앞에서 당당하게 비혼주의를 선언하는 게 적응이 잘 안된다. 어느 학생이 ‘펜트하우스 시즌2’를 비판하는 독자투고를 시빅뉴스에 보내오면서 “펜트하우스 시즌2 보면 결혼하기 겁 난다”고 썼다. 아동살해, 폭력 사회, 살기 품은 사회, 막장 드라마가 하나로 연결되어 젊은이들을 비혼주의자로 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 삶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취업 전쟁, 월급 모아서는 살 수 없이 뛴 집값 등이 젊은이들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최근에는 영끌 주식 투자를 넘어서 비트코인 투자, 빌딩과 그림 지분 투자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나 P2P 금융을 이용한 투자가 활발하다고 한다. 마치 절망감에서 마지막 베팅하는 도박꾼의 절박함이 젊은이들의 이런 투자 성향에서 엿보인다고 어느 금융 전문가가 지적하고 있다.

영끌 투자족 사이에서는 최대한 많은 돈을 빨리 모아서 조기 은퇴하자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영끌 투자로 10억 정도 벌 수 있다면 30대라도 은퇴하고 ‘자연인’처럼 혼자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고 한단다. 소확행, 욜로, 딩크족도 이름은 달라도 모두 하나처럼 엮여 있다. 전투적 공격성, 비혼주의자, 저출산, 아동학대, 막장 드라마, 파이어족, 소확행, 욜로, 딩크족이 다 각자도생, 이기주의의 끝판왕이다. 남과 함께 살 의사도 없고, 남과 공감하며 살 의지도 없다. 남에 대한 배려는 당연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살벌한 사회 분위기는 사회 초년생과 대학생을 이어서 청소년에게도 전승되고 있다. 2만 명 이상 초중고등학생이 참여한 교육부의 ‘2020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에 의하면, 초등학생의 20.1%, 중학생의 33.3%, 고등학생의 23.3%가 미래 희망 직업이 없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코로나도 중요한 요인이었겠지만, 그보다는 흉악한 사회 분위기가 강력한 스트레스가 되어 청소년들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갉아 먹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코트에 단추가 떨어져서 튼튼하게 달려고 작심하고 동네 근처 작은 리폼집을 찾았다. 한 10분 남짓 내 단추 다는 사이에 적잖은 손님들이 들락달락했다. 그런데 주인 여자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참으로 상냥하고 정성스럽게 대하고 있었다. 옷 리폼을 문의하면 친절하게 의견을 듣고 전문가적인 제안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 작은 옷 수선집에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을 못 잡아 먹어서 분기탱천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비열한 거리’도 있지만, 인정이 오가는 작은 리폼집도 있었다. 이 세상에는 우울증에 대한 연구가 행복과 기쁨에 대한 연구보다 100배는 더 많다고 한다. 심리학자 마틴 샐리그먼은 이를 부정편향이라고 부르면서 남의 단점만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남의 강점을 칭찬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칭찬이 남에게 동기부여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한 학생과의 상담 중에 장점을 칭찬해주었더니, 그 학생이 며칠 후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교수님 방학 때 상담해주실 때 저에게 ‘넌 노력하니까 네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일 다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실 때 진짜 감동 받았습니다.” 또 한 학생은 써서 낸 기사를 꼼꼼히 정정해서 사진 찍어 카톡으로 되돌려 주었더니 학기말에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늦은 저녁 시간까지 저희를 위해서 기사 하나하나 읽어보시고 채점하시는 것, 너무 대단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했습니다. 솔직히 요즘 코로나로 수업 질이 많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저는 교수님 수업만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옆에 있는 듯, 지도해주시고 가르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교수님은 방황하는 제게 확신과 힘을 주셨습니다.”

비대면으로 삭막한 캠퍼스에 날마다 순번을 정해서 학교에 나와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대학 동아리 회원들이 전국 여러 대학에 퍼져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들은 회비를 걷어서 캠퍼스 내 길고양이들 중성화 수술도 해주고 병 치료도 도와준다고 한다. 한 심리학자는 “길고양이에서 자신의 험난한 취업난에 도움을 찾는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좋다. 우리 젊은이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dog-eat-dog’ 사회에서 길고양이에게 사랑으로 보듬으면서 남을 발견하고, 남을 배려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방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다.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게 마련이다. 세상 살다 보면 남을 증오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다. 사랑하는 게 훨씬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도 할 수 있는 거다. 제발 어린 나이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비혼을 선언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사랑이란 봄꽃’에서 ‘희망이란 새싹’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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