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극복하고 50대에 컴퓨터 강사로 인생 재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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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 극복하고 50대에 컴퓨터 강사로 인생 재출발
  • 취재기자 김수빈
  • 승인 2020.11.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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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숙 씨, 회사 경리 퇴직 후 결혼, 장시간 전업주부 생활
보험설계사·복지관 도우미 하며 각종 자격증 꾸준히 취득
노인복지관 컴퓨터 강사로 6년째 행복한 직장생활 이어가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때려치웠어야 했는데.”

가수 ‘볼빨간사춘기’의 노래 <워커홀릭>의 가사 중 한 부분이다. 이 곡은 지나치게 일에 몰두해 지친 여력이 가득한 워커홀릭들에게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 청춘답게, 아쉽지 않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곡에 표현된 것처럼 워커홀릭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자신이 워커홀릭인 것이 희생이 아니라 즐거움,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현재 울산의 한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사로 활동 중인 정미숙(53) 씨는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일을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일을 할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요”라고 대답했다.

정미숙 씨는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 23세부터 지금까지 일을 놓지 않으려고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녀는 당시 여자가 꼭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을 때인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에 진학해서 꼭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부모님과 여동생 1명, 남동생 2명을 둔 장녀 정미숙 씨는 고향인 대구에서 생계를 위해서라도 당연히 취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린 시절부터 교사라는 직업을 꿈꿨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며 늘 평균 이상의 성적을 유지해왔던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그녀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구의 한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진학했다. 정미숙 씨는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닌 건 좋은 일이지만,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해 당시엔 많이 아쉬웠어요”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 정미숙 씨는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대학 시절 내내 지각, 결석 한 번 없이 수업에 충실히 참여했으며 자격증 취득을 위한 노력도 꾸준히 했다. 하지만 정미숙 씨가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하던 대학교 3학년 때, 그녀는 좌절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보다 역사과목 교사 수요가 굉장히 적었기 때문이었다. 가계를 돕기 위해 빨리 취업하길 원했던 그녀는 교사의 길이 어려워지자 다른 방도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했던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89년 경 대학생 정미숙 씨는 컴퓨터 관련 직업이 미래 직업군으로 전망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1992년, 정미숙 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교사는 아니지만 컴퓨터 학원 강사로서 첫 직장생활을 고향인 대구에서 시작했다. 취업 준비를 하며 자격증 취득을 위해 다녔던 컴퓨터 학원 선생님의 추천 덕이었다. 첫 직장은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수강하던 컴퓨터 학원이었는데, 정미숙 씨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본인도 컴퓨터 공부를 계속해서 정보처리기사 등 컴퓨터 관련 고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덕분에 그녀는 1년 후 대구의 한 광고회사에서 회계 및 재고 출납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전산직으로 이직에 성공했다.

정미숙 씨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직장생활 경험담을 얘기해 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수빈).
정미숙 씨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직장생활 경험담을 얘기해 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수빈).

정미숙 씨가 워커홀릭이 된 것은 광고회사를 다닐 때부터였다. 정미숙 씨는 광고회사에서 전산처리 업무를 담당했지만, 경리업무를 보던 직원의 갑작스런 퇴직으로 영업과 경리일까지 겸하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미숙 씨의 일 비중이 경리에 치우쳐졌는데, 그녀가 경리 일을 보고나서부터 다행히도 회사가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규모였던 광고회사가 관련 분야에서 대구의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덕분에 관련 분야 업체들 사이에서는 정미숙 씨의 얼굴은 몰라도 어느 회사의 ‘일 잘하는 정 대리’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됐고, 거래업체 사장님들로부터 스카웃 제의도 여러 번 있었다. 정미숙 씨는 “원래 경리일이 내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다 보니 힘들기도 했고,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어요. 실수도 많았는데, 그 실수에서 배울 수 있었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능력이 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덕분에 좋은 결과가 따르니 일이 재밌어지고 행복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미숙 씨가 30세가 되던 해, 그녀는 즐겁게 일했던 광고회사 직장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면서 울산으로 이주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미숙 씨는 일을 그만두게 되어 큰 아쉬움을 느꼈지만 아이가 어릴 땐 엄마가 옆에 있어 주는 게 좋다고 믿었고, 잠시 육아와 집안일에만 전념했다.

두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정미숙 씨는 전업주부 일 역시 즐겁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짬짬이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 일에 도전하며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미숙 씨가 전업주부로 살면서 도전한 일은 보험설계사, 인구주택총조사원, 도서관 사서, 복지관 도우미 등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했지만, 경력단절이 그녀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고, 어딜 가나 경력을 요구했기 때문에 오래 일하지 못했다. 정미숙 씨는 주부에게 쉽게 취업 문을 열어주는 곳을 찾아 겨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일들은 단기로 할 수 있는 일들이었어요. 그마저도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일을 찾았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정미숙 씨는 복지관이나 여성회관, 사이버 강좌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공부에 도전했다. 한식·양식 조리, 다문화 상담과 미술 심리 수업, 정보기술자격시험(ITQ) 수업, 사회복지사 자격, 노인 심리 상담 등이 그녀의 도전대상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게 재밌기도 했고, 여러 분야를 섭렵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지요”라고 말했다.

정미숙 씨가 컴퓨터 강사 일을 준비하며 공부하고 수집했던 자료들이다. 빼곡이 책장에 꽂혀 있는 자료들이 그녀의 엄청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정미숙 씨 제공).
정미숙 씨가 컴퓨터 강사 일을 준비하며 공부하고 수집했던 자료들이다. 빼곡이 책장에 꽂혀 있는 자료들이 그녀의 지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정미숙 씨 제공).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일까. 정미숙 씨는 2015년 1월 여성회관 컴퓨터 강사로부터 급하게 강사를 구한다는 연락을 받고 드디어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얻었다. 바로 현재도 활발히 활동 중인 노인복지관의 컴퓨터 강사 자리다. 마침 둘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가족들이 모두 밤늦게 귀가하니 그녀는 이제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오랜 경력단절 탓에 그녀는 유급 봉사로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느꼈다. 정미숙 씨는 “첫 직장이었던 컴퓨터 강사 일을 다시 하게 되어 신기하고 기뻤어요. 누군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눈다는 게 참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노인복지관에서 정미숙 강사의 지도 하에 노인 수강생들이 컴퓨터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수빈).
노인복지관에서 정미숙 강사의 지도 하에 노인 수강생들이 컴퓨터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수빈).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강사로 일을 한 지 6년째인 현재, 정미숙 씨는 다양하게 배워뒀던 일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노인복지관은 종합복지관과 달리 연세 많은 분들이 모이는 곳이라 수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노인 심리와 사회복지에 대해 옛날에 조금씩 공부한 덕에 현재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원만하게 소통하며 즐겁게 수업하고 있다. 정미숙 씨의 수업을 수강 중인 김만봉(74) 할아버지는 “노인복지관의 컴퓨터 강사 중 정미숙 선생님이 랭킹 1위입니다. 워낙 꼼꼼하고 친절해서 우리가 수업을 잘 못 따라가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다시 가르쳐 줍니다. 다음 학기도 정미숙 선생님 수업을 신청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정미숙 씨가 지금까지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미숙 씨가 다양한 일을 배우고 도전했던 전업주부로서의 시간이 곧 취업 준비 기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던 그녀의 모습을 봐왔던 가족들은 그녀의 취업을 그 누구보다 축하해줬다. 정미숙 씨의 남편은 그녀에게 열심히 해보라며 일부로 시간을 내어 노인복지관까지 그녀의 로드매니저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정미숙 씨는 아들이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돼 너무 다행이고, 앞으로 몸 건강히, 즐기면서 일하세요”라고 말해줬을 때 너무 기뻤다며 웃으며 말했다.

정미숙 씨는 이제 일을 많이 하려고 욕심내지 않을 계획이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그녀는 올 초에 요양보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앞으로 아이돌보미 교육도 고려 중이다. 그녀는 “사람의 앞날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라며 웃어 보였다. 정미숙 씨에게 일이란 그녀를 즐겁게 해주는 평생의 동반자다. 그녀는 행복한 워커홀릭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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