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 미안합니다, ‘테스 형’ 부른 가황(歌皇) 나훈아 님께 70세대가 드리는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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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 미안합니다, ‘테스 형’ 부른 가황(歌皇) 나훈아 님께 70세대가 드리는 반성문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20.11.01 20: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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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학번인 70세대는 미국 팝송과 포크송만 트는 음악다방만 다녔다
트로트는 뽕짝이고, 꺾기는 저속 창법이라고 무시하고 외면했다
70세대의 반성문..."나이들어 생각하니, 나훈아 님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창조자였다"

올해 내내 트로트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임영웅, 영탁, 정동원, 이찬원, 김호중, 장민호, 김희재 등 신진 트로트 가수들을 향한 국민 사랑이 식을 줄을 모른다. 그 열풍을 추석 이후 나훈아가 이어가고 있다. 나훈아의 추석 공연 이후, 그가 작사, 작곡한 <테스 형>이 한 때 음원 차트 1위를 달리기도 했다. 음원 차트를 이용할 줄 아는 젊은 세대도 나훈아 열기에 가세했다는 증거다.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란 가사가 정치적 풍자곡인 ‘참요(讖謠)’ 같은 느낌을 주는 <테스 형>은 최근 사투리 버전이 노친네들 단톡방을 통해서 유행하고 있다. 경상도 버전은 “테스 행님아, 세상이 와 이카노, 와 이리코롬 빡시노”라고 노래하고, 충청도 버전은 “테스 성, 시상이 성가셔, 워째 이리 대간혀”라고 외치며, 전라도 버전은 “테스 성, 시상이 왜 근당가, 왜 이라고 뻗치당가”라고 소리치고 있다. 유튜브에는 영어 버전, 강원도 버전도 있다. 조만간에 제주도 버전, 북한 버전도 나올 기세다.

나훈아가 출연해서 장안의 화제를 몰고온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 장면(사진: KBS TV 화면 캡처).
나훈아가 출연해서 장안의 화제를 몰고온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 장면(사진: KBS TV 화면 캡처).

그런데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원로 트로트 가수 이미자 씨는 이런 말을 했다. “팝송에 밀려, 가요는 촌스럽고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동백 아가씨>가 100만 장이 팔렸어도 뽕짝 가수로 낙인찍힌 제가 느꼈던 소외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뽕짝'은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이란 트로트 리듬 소리를 조롱한 말이라고 한다. 이미자 씨 등 트로트 가수들이 과거에 그런 ‘뽕짝 가수’로 낙인찍혔다는 얘기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 내막을 찾아 1960년대로 내려가 보자.

나는 초등학교 때인 1960년대부터 대학 다니는 형님과 누님들 덕분에 미국 팝송을 들으면서 자랐다. 집에 있던 전축에서는 늘 톰 존스의 <Delilah>, 비키의 <Casa Blanca>, 글렌 캠프벨의 <Time>, 비틀즈의 <Let It Be>가 울려 퍼졌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기타를 배워서 직접 기타 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Burning Love>, CCR의 <Who’ll Stop the Rain?>, 박스 탑스의 <The Letter>, 닐 다이아몬드의 <Solitary Man>, <Sweet Caroline>,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의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을 줄창 불렀다. 이때 같이 불렀던 한국 노래가 있다면, 트윈 폴리오의 <웨딩케익>, 송창식의 <창 밖에는 비 오고요>, 오니언스의 <작은 새>와 <편지>,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김세환의 <목장길 따라>, 이장희의 <그건 너> 등이었다.

내가 듣고 불렀던 노래엔 그 어디에도 이미자, 나훈아, 남진 노래는 없었다. 그들이 부른 <섬마을 선생님>, <고향역>, <울긴 왜 울어>는 방송에 나오니 무슨 노래인지 알고는 있었으나 내 입으로 부른 기억이 없다. 소위 뽕짝은 내 음악 취향이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대중음악에는 즐기는 계층이 별개인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남진, 나훈아의 트로트 계열과, 다른 하나는 영미 팝송과 세시봉의 포크 계열 음악이었다. (패티킴, 신중현, 히식스, 장현, 정훈희, 정미조 등의 중간 지대 가수들도 있었고, 이들 음악은 양쪽이 공유했다.)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도 일종의 노는 물이 다른 두 부류가 있었다. 소풍 가서 장기자랑 때 이은하의 <최진사댁 셋째딸>을 부르는 토종 부류가 있었고, 다니엘 분의 <Beautiful Sunday>를 부르는 서양풍 부류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서양파였고, 한술 더 떠 그 부류의 리더 격이었다.

고등학교 때 접한 대중잡지에 소개된 가요 순위엔 남진, 나훈아로 이어지는 트로트 순위가 있었고, 윤형주, 송창식, 서유석, 양희은, 박인희로 이어지는 포크송 순위가 각각 따로 있었다.

1975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이 가는 대학가 다방은 일명 ‘음악다방’이라 불렸고, 장발의 DJ가 신청곡을 받아서 팝송과 포크송을 틀어 주었으며, 한복 입은 마담이 서빙하던 다방은 소위 ‘노털 다방’으로 불렸다. 음악다방은 조선시대의 양반이란 신분제도를 대체한 ‘신종 고급 문화’를 상징했다. 남진 나훈아의 트로트 음악은 그래서 자동적으로 저급 문화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다방에서는 하루종일 단 한 곡의 트로트 곡도 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대중음악의 선호 차이는 일종의 대학생 청년과 비대학생 청년, 즉 직장인(혹은 비열한 표현으로 ‘공돌이’와 ‘공순이’라 칭했다)이란 계급적 문화 차이를 반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토종 트로트 파였던 친구들은 대학 입학 후 음악 취향을 급선회했다. 일종의 대학생 계급에 끼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대학생의 미국 팝송 선호 문화가 서구 가치 침투와 우리 전통 파괴를 초래한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 침략의 폐해임을 깨닫지 못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아마도 망토(manteau)를 걸치고 종로를 거닐던 일제강점기 ‘이수일’처럼 대학생 신분을 '벼슬'로 간주한 게 아닐까. 그리고 대학생 벼슬의 징표가 가슴에 단 자기 대학 뱃지, 미군방송 AFKN, 타임 잡지, 그리고 팝송과 통기타 선호 문화였으며, 동시에 트로트 소외 문화 아니었을까. 하긴 1970년대 대학생은 한 해 태어난 동년배 100만 명 중 대학에 진학한 20% 중 한 명이었으니, 대학생 자체가 선택받은 계급이었다. 대학진학률은 1980년대에 30%대, 1990년대에 60%대, 2008년에는 83.3%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같은 나이대의 10명 중 8명이 대학생인 세계 최고 고학력 국가가 됐으니, 지금은 더 이상 대학생이 벼슬도 아니다. 또 선호 음악으로 젊은이들 안에서 다시 계급을 구분할 이유도 없어졌다.

MBC 라디오에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음악 프로가 있었다. 주로 팝송과 포크송 청취자 신청곡을 사연과 함께 들려주면서 진행자와 초대 손님이 대담하는 프로였다. 이종환, 박원웅, 조영남, 고영수, 이수만 등 쟁쟁한 인사들이 ‘별밤지기’를 했는데, 내가 들은 방송 속 조크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진행자가 한 구로공단 ‘공순이’(방송에서 이런 인격모독적 표현을 실제 사용했다)가 대학생 흉내를 내고 싶어 팝송을 신청했는데, 편지에 신청곡을 ‘톰’이 부른 ‘존스’라고 적었다고 하면서 깔깔거리고 웃었다. 대학생들은 계급적 우월의식에 취해 그렇게 비대학생 청년들을 무시했다.

80년대 학번 80세대(팔공 세대)는 서슬이 퍼런 전두환 시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지하에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꽤 생겨났다. 청년 집단이 대학생 대 비대학생으로 계급을 나누던 풍습은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과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의 점진적 영향으로 80년대 무렵에는 거의 깨진 듯하다. 그러나 70년대 학번인 70세대(칠공 세대)는 당시에 다방도, 대중음악도 선민 계급의 티를 냈다. 그래서 1970년대 대학생들은 트로트를 뽕짝이라 불렀고 수준 낮은 음악이라고 비하했다. 이미자 씨가 지적한 뽕짝 낙인은 바로 70세대 대학생들의 철없는 신종 계급 의식에 따른 일방적 트로트 소외 문화였다.

1975년 포크송 가수들의 대마초 파동 이후, 홀로 남은 송창식은 통기타를 집어 던지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한 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불렀고, 조용필은 <창 밖의 여자>를 불렀다. 인기 가요 순위도 어느새 두 개에서 하나로 슬며시 합쳐졌다.

패션, 노래, 영화 등 대중문화에는 아방가르드적 창조자가 있다. 서태지가 힙합 류의 한국 원조이며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최인호 작가, 이장호 감독, 비틀즈, 퀸, 김수철, 신중현도 다 당시의 문화 거인들이며 문화 창조자였다. 배꼽티, 미니스커트, 하의실종 패션도 다 이들을 창조한 디자이너가 있다. 대중들은 그 창조자들이 만든 문화를 유행이란 명분으로 추종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 세계에는 문화 창조자와 문화 추종자의 두 부류가 있게 된다.

나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BTS가 문화 창조자일까 추종자일까를 물었다. 빌보드 핫 100 1위라는 업적이 있으므로 그들을 문화 창조자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젊은 학생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럼 <다이너마이트> 작곡자, 안무가, 의상 코디, 그리고 이를 총괄한 방시혁 대표의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BTS란 세계적 대중문화의 성과물을 기획하고 창조한 이는 방시혁 대표일 것이다. BTS 멤버들은 이 기획을 잘 소화한, 창조자의 대리 연기자로 보인다. 이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곡과 춤은 그들 자신의 창조물은 아니다. 아이돌 그룹의 문제는 엄청난 연습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칼군무 형식의 음악을 20대, 30대를 지나서도 같은 멤버들과 같은 형식으로 공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불과 10년 전 아이돌 대부분은 칼군무 추는 음악을 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은퇴할 나이도 아닌데 행방이 묘연한 사람들도 많다.

73세 나훈아 씨는 아직도 작곡하고, 작사하고, ‘대한민국 어게인’ 같은 대형 공연을 기획하고, 출연한다. 그는 “세상이 왜 이래”라고 외쳐 국민의 공감을 얻고 있다. 며칠 전 별세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초청해도 자기 노래를 들으려면 공연장에 표 사고 오라며 예인(藝人)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일화로 그의 권위는 더 높아졌다.

나훈아 님,

당신은 한국인의 진정한 한과 정서를 노랫말과 곡으로 전달하는 멋진 문화 창조자입니다. 70세대는 당신의 전성기 때 당신을 뽕짝 가수로, 저속한 꺾기 창법을 부르는 가수로 무시했던 원죄가 있습니다. 잣나무 가지 높아 그곳에 서리가 내렸는지를 미천한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사과드립니다. 어느새 당신의 <사랑>, <영영>이 나의 애창곡이 되어 있고, <테스 형>의 가사에 인생의 무게를 느끼니 조만간 이 곡도 나의 애창곡 리스트에 오를 듯합니다. 당신은 나훈아 식 트로트 문화의 창조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더불어 대학생이 대단한 벼슬인 줄 알고 산업역군을 무시한 철없는 언행도 이참에 그분들께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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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기자~ 2020-11-09 00:37:11
이분 칼럼 특: 하고싶은말 대잔치+요즘 검색유입 많은 관련없는 제목..ㅎㅎ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