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
부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친구>는 ‘친구’를 이렇게 정의한다. 물론 이것은 시나리오를 쓴 곽경택 감독이 무슨 새로운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사전적 뜻풀이를 그대로 영화에 가져온 것이다. 어쨌거나 친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상당히 긴 교제 시간과,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친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친구가 되는데 반드시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 아래서는 짧은 시간에도 강렬한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나, 같은 질병을 앓으면서 동병상련을 느끼다가 진정한 우정을 나누게 되는 ‘환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당연히 적지 않은 친구가 있다. 만나기만 하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고향 친구들, 갖가지 도움을 아끼지 않는 고교·대학 친구들, 30년 3개월 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든 신문사 선후배들은 나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 년 전 나는 그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강원도의 어느 조그만한 산사에서 알게된 벗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2012년 1월 나는 간암 수술을 받았다. B형 간염에서 간경화로 병을 키웠으면서도 무모하고 어리석게도 과로와 폭음을 일삼은 것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 달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진 뒤 출근해서 일을 계속했으나 어쩐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8월 말 휴직계를 제출한 뒤 요양할 곳을 수소문하다가 인터넷 카페에서 강원도 횡성의 어느 절을 알게 됐다. 처음 한 두 명이 절에 와서 산 속의 맑은 공기 마시면서 요양하다가 점차 입소문이 퍼져 ‘암환자 전문 요양원’처럼 발전한 것이었다.
가방을 메고 절을 찾은 첫날밤 신고식이 있었다. ‘전입 고참’들은 나의 병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뒤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정상인이구만!” 말기암인 자신들에 비한다면 나는 ‘건강한 정상인’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도 호전되고 있는데, 손 처사(‘처사’는 사찰에서 성인 남자, 또는 남자 평신도를 일컫는 호칭)는 금방 말끔해질거야”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환우 대표격인 최 처사는 건장한 체구에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암 중에서도 가장 치료하기 어렵다는 췌장암을 앓고 있음에도 늘 호탕한 웃음을 잃지 않았고, 환우들의 고충을 앞장서서 해결해 주곤 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절에서 마을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족히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그는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같은 겨울밤에도 단 하루도 운동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멧돼지 같은 짐승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러시느냐”고 걱정하면 그는 “짐승들도 암 걸린 놈은 절대 안 건드려”라며 껄껄 웃곤 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박 처사는 워낙 손재주가 좋아 환우들의 전자제품은 물론, 절의 취사도구나 전기까지 도맡아 고쳐서 ‘맥가이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언젠가는 환우들끼리 원주의 민물매운탕 집에 갔는데 마침 식당 수도가 고장나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있는 것을 보고 단숨에 고쳐주었다. 그날 우리는 매운탕을 공짜로 얻어 먹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블루베리 농원을 운영하던 이 처사는 ‘블루베리 사장님’으로 통했는데, 항암치료 등으로 떠났다가 절에 돌아올 때면 반드시 블루베리를 갖고 와서 “암에 좋은 것”이라며 환우들에게 나눠 주곤 했다.
30대 후반의 ‘돌싱’ 최 보살(‘보살’은 성인 여자 또는 여자 평신도를 일컫는 호칭)은 싹싹한 성격으로 처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성격은 여장부였다. 나보고는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언젠가 “저는요, 결혼도 해봤고, 연애도 찐하게 해봤고, 지금 죽어도 별로 아쉽지 않아요”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장례식에 쓸 영정까지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와 숨이 막혔다.
50대, 40대 아줌마인 정 보살과 양 보살은 늘 나에게 “빨리 완쾌해서 부인 속 좀 그만 썩이세요”라고 농담을 건네곤 했다. 그러면 나는 “남 걱정 말고 보살님들이나 남편 속 그만 썩이시라”고 받아쳤다.
우리는 ‘암’이라는 같은 질병을 갖고 있는 데서 비롯된 동병상련의 마음과, 그 병을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공통의 목표에서 생겨나는 연대의식으로 인해 금방 절친이 됐다. 30대에서 60대까지 나이 차이도 적지 않았고, 절에 오기 전까지 하는 일도 전혀 달랐음에도 우리는 암을 매개로 단단하게 뭉쳤다. 암과 관련된 정보를 얻게 되면 금방 공유했고, 문자 그대로 콩 한 조각도 나눠먹으려 했다. 누구 한 사람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강릉이나 속초로 우루루 달려가서 해풍을 가슴 속에 넣어오곤 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은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서로 다투거나 싸우다가 사이가 나빠져서가 아니었다.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모습이 사라질 때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날 밤에는 “손 처사 벌써 자는겨”라는 최 처사의 환청을 듣기도 했다. 그는 저녁 식사 후 구수한 충청도 억양을 앞세워 내 방에 들어와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곤 했기 때문이다.
절을 떠난 지 2년이 지났다. 친구들도 이젠 세상에 없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으로 시작되는 가곡 <동무 생각>이 흘러나오는 순간, 불현듯 친구들이 생각났다. 같이 몸 속에 암세포를 갖고 있었던 ‘환우’이자 함께 암에 맞서 싸웠던 ‘전우’인 그들의 모습이 한 사람 한 사람 떠오르면서 울컥했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 그것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은 분명 먼저 간 그들이 내게 베풀어주었던 따뜻한 우정과 선의 때문일 것이다. 못견디게 보고 싶다, 벗들아. 5월의 봄빛이 아름답고도 슬프구나.
*편집자주: 필자 손동우는 경향신문 사회·정치·국제부 기자, 주독일특파원, 사회부장, 사회에디터, 논설위원을 거쳤으며, 현재는 EBS 이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