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에 눈 돌리기보다 시민 생활 정치에 전력투구할 터”
상태바
“중앙에 눈 돌리기보다 시민 생활 정치에 전력투구할 터”
  • 취재기자 이하림
  • 승인 2016.04.28 2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산발 선거혁명’의 주역, 부산진갑 김영춘 당선자 인터뷰
▲김영춘 부산진구갑 당선자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하림).

야당 의원 5명 배출한 '부산발 선거혁명'을 이끈 주역

지난 4월 13일 총선 후, 전국민의 시선이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정치 지각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보수 정당만을 고집해 온 부산은 대구와 함께 지역주의가 가장 강하게 지배했던 도시였다. 야당의 황무지로 불리던 이곳에서 드디어 야당 의원이 5명이나 배출됐다.

그 지각변동의 진앙은 새누리당이 내리 3선을 이어왔던 부산진구갑의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당선인. 서울에서의 국회의원직을 던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5년 만에 이룬 결과다. 그 자신이 당선됐을 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위원장으로서 부산 선거를 진두지휘한 끝에 더불어민주당의 '부산대첩'을 이끌어 낸 승장이기도 하다. <시빅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 당선인은 이를 “부산시민의 선거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는 “유권자들이 내 자신을 도구로 삼아 선거 혁명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르다”고 이번 총선 당선 소감을 전했다.

지역주의 타파 위한 귀향…인간 김영춘에 마음 연 주민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 당선인은 서울 광진구에서 17년을 정치 활동을 했고, 광진갑 국회의원 2번을 지냈다. 그만큼 광진구 주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터다. 재선에 대한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5년 전 부산으로 정치 무대를 옮겨 왔다. 그런 안정적인 곳을 두고 지역주의가 특히 강한 부산으로 내려와 사서 고생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선이 순탄한 곳에서 출마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자신이 수비만 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존재인가,’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자문을 해 보니 이 정치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정치를 어떻게든 바꿔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가 당시 느낀 한국 정치의 가장 근본적 모순은 지역주의. 지역주의가 국회에서도 대결과 증오의 정치를 조장하고 있었다. 그런 지역주의 정치를 청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부산으로 오게 한 이유다. 그는 “지역주의가 있든 없든 성장하고 발전하는 도시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부산은 지역주의가 횡행한 지난 20년 동안 계속 쪼그라들고 추락해 왔다. 그런 부산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라도 돌아가서 지역주의 정치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 부산을 구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지역주의와의 정면 대결이 김 당선인이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도전하게 한 강력한 동기가 된 것.

그러나, 그가 내려온 2012년 당시 부산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친구들마저 “암만 그래도 우리는 새누리당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차가운 고향 주민들의 시선에 기가 죽지는 않았다. 각오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시선이야말로 자신이 극복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하고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도전했다. 그리고 그 농사는 5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냉랭했던 고향민심을 돌릴 수 있었던 건 '인간 김영춘'의 진정성 때문이라고 그는 자평한다. 지난 5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지역구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민원에 귀를 기울인 결과 주민들로부터 인간 김영춘에 대한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 그는 유권자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 사람이라면 정당과 상관 없이 도와주고 키워주고 싶다,’ 이런 유권자들의 마음이 저를 당선시켜준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 평생 1번만 고집하다가 이번 총선에서 처음으로 야당을 찍은 어르신들도 있다고 해요. 그런 분들의 마음은 정당에 관계 없이 지역 출신의 인물을 한 번 키워줘 보자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김영춘 부산진구갑 당선자가 사무실에서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하림).

부산과 한 약속을 위해 원내대표는 다음으로

김영춘당선자의 향후 정치 행보는 어떻게 이어질까.

부산에서 절치부심 끝에 당선된 만큼 그는 당분간은 부산의 서민들이 피부로 겪고 있는 생활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주력할 생각이다. 반값 전기세, 쓰레기종량제 봉투 가격 인하, 유료도로 통행료 폐지 등이 그것. 이는 선거 이전부터 수 년 동안 김 당선인이 해결해 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오던 현안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시민들의 여론을 조사하고, 시민의 입장에 서서 해결을 요구해 오던 사안이다. 이제 국회의원으로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실천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김 당선인은 “부산의 쓰레기 봉투 가격이 서울과 대구의 두 배가 넘는 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민들이 태반이다. 이게 시민들을 기만하는 행정이 아니고 무엇일까. 앞으로 이런 사소한 것부터 고쳐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3선의 경력에다 야세가 강한 부산에서 생환한 그는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원내대표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 바 있다. 본인의 생각은 어떨까.

부산 시민들이 필요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선 당분간 원내대표직에 도전할 의사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8년 만에 돌아가는 국회에서 그동안 자신이 지역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일부터 해결하고 싶다는 것. 그 기초를 닦는 작업만 해도 앞으로 1년은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원내대표를 맡는다면 중앙정치에 집중해야 해 부산 시민에게 했던 약속의 이행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당선인은 “1년 동안은 중앙정치에 애써 눈감고 부산에 했던 약속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할 것이다. 꼭 중앙정치의 공식 직책을 맡지는 않더라도 제가 물밑에서 할 일들이 많다”고 밝혔다.

"총선 승리가 대선을 보장하진 않아…국민 눈높이 맞추기가 야당의 숙제"

이번 총선에서의 야당의 약진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번 총선의 승리를 내년 대선의 승리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특정 정당에 구속된 존재가 아니라 지역 구도로부터 자유로워진 독립된 유권자로서의 경험을 한 것이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의미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을 찍었던 유권자들이 대선에서도 야당을 지지할 수 있는 중요한 심리적 동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확대되고 튼튼해진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경계했다. 이번 총선 결과가 야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라기 보다는 새누리당에 대한 경고와 채찍질이라는 의미가 컸기 때문. 그는 “야당이 잘못하면 유권자들은 언제라도 다시 새누리당으로 돌아갈 것이라 본다. 앞으로 남은 1년6개월 동안 야당이 얼마만큼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를 해낼 수 있는가에 따라서 대선의 승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영춘 부산진구갑 당선자가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하림).

모범생 김영춘을 정치의 길로 이끈 독재시대

이번엔 정치인 김영춘의 인생 역정을 들어 보았다.

정치인 김영춘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1985년 민정당사 농성사건의 배후 조종혐의로 구속됐다가 풀려난 전력이 있다. 1985년 치러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과 김영삼 ·김대중이 이끌던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주축이 된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 사이의 한판 대결이었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치러진 당시 선거에서 학생운동권은 야당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신민당이 대승했다. 

야당을 이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석방된 학생 20명을 '땡큐'오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김영삼 씨의 캠프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현실 정치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게 당시의 그의 입장. 그러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에 불이 붙는 걸 보고 현실 정치에 참여해 정치 개혁을 이루는 게 꼭 필요하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뀌었지요. 저 일을 도와야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겠다 싶어 그때서야 김영삼 캠프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게 제 정치의 시작이었지요."

1987년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3당 합당 이후인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여의도에 진출했다.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고 17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며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사무총장과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다.

사실 김영춘의 꿈은 시인이었다. 부산이 고향인 그는 어릴 때 조용하고 내성적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국문과에 들어가 시인이 되고 모교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혹독했던 독재 시대가 그를 정치인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대학사회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로 진압했던 포악한 전두환 정권과 전면전 상태였다. 사복 경찰이 강의실 안까지 들어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강의실에서 어떤 학생이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끌려갔다. 그런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내가 시인이 되고 문학교수가 되기 위해서 숨죽이고 살아야 되나 싶었다. 나라는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독재 정권과 싸워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그는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정치인이 되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 지킬 수 있는 사회 만들 것”

정치인 김영춘의 정치관은 지금 자신이 우리나라 정치에 가장 최상으로 이바지하는 일이 뭔가를 찾아 그 길에 매진하는 것. 그는 "뭔가가 되기 위한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뭔가가 되기 위한 정치를 하게 되면 초심이 흐려져 오염되고 타락하기 쉽기 때문이란 것.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문제, 또 부산의 문제를 개선하고 그래서 우리 지역과 나라가 조금 더 편안하고 발전하는 곳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할 일이에요. 장기적인 목표는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가족들을 부양하고 공부시키고, 또 소박한 노후 대책을 만들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하겠지요. 노력만 한다면 누구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제 목표입니다.”

<김영춘 약력>

-1962년 부산 출생

-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1993~1994년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2004년 제17대,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2010년 민주당 최고위원

-2015년~현재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부산시당 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