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 ‘파킨슨 법칙’이 생각난 질병관리본부의 ‘무늬만 청 승격’ 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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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파킨슨 법칙’이 생각난 질병관리본부의 ‘무늬만 청 승격’ 꼼수
  • 논설주간 송문석
  • 승인 2020.06.0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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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수와 업무량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영연구가인 노스코트 파킨슨(1909~1993)이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에 ‘파킨슨 법칙’이란 이론을 발표하면서 관료조직의 맹점을 신랄하게 비틀었다.

갑돌이라는 공무원이 있다고 하자. 갑돌 씨는 일이 너무 많아 과로로 곧 쓰러질 것 같다고 항상 죽을상을 짓는다. 많은 공무원들이 갑돌 씨 처럼 업무량이 산더미 같아 힘들다고 죽는 소리를 한다. 갑돌 씨의 일이 진짜로 그렇게 많은지 어떤지는 알 수도 없고, 여기서 중요하지도 않다. 갑돌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핵심이다.

'올바른 손씻기 해우소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사진: 더 팩트 제공).
'올바른 손씻기 해우소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는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사진: 더 팩트 제공).

그렇다면 갑돌 씨는 어떤 선택을 할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순직하는 그날까지 분골쇄신할까?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갈까? 동료 순돌(경쟁자) 씨에게 도움을 청할까? 부하를 밑에 두고 일을 넘길까?

파킨슨의 법칙에 따르면, 갑돌 씨는 죽으라고 일을 하지도 않고, 자신을 누르고 상사가 될지도 모르는 경쟁자와 협력관계를 유지하지도 않는다. 결론은 만만한 사람을 부하로 두고 부린다. 부하도 절대 한 명만 두지 않는다. 한 명만 두면 자신과 일을 반반씩 나눠 가지게 돼 실적이 비교되고, 경쟁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호랑이 새끼 키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두 명(또는 그 이상)의 부하를 두고 일을 분담시킴으로써 자신은 두 가지 일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는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승진의 길도 뚫린다. 갑돌 씨의 부하 두 명도 시간이 지나면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고 죽을상을 지으면서 각자 또 두 명씩 부하들을 둘 것이다. 갑돌 씨 혼자 하던 일을 이렇게 최소 일곱 명이 나눠서 하게 된다. 이게 파킨슨 제1법칙인 ‘부하 배증의 법칙’이다.

파킨슨 제2법칙은 ‘업무 배증의 법칙’이다. 공무원의 수가 증가하면 그에 따른 파생적인 업무가 생겨나 본질적인 업무의 양은 변화가 없는데도 업무가 배로 늘어나게 된다는 법칙이다. ‘노느니 장독 깬다’고 공무원 수를 늘려 놓으면 없던 일도 만들어 업무를 하게 된다. 갑돌 씨가 할 일을 부하에게 시키고 그 부하는 다시 그 아래 부하에 시킨다. 문서 하나를 놓고 초안작성을 밑에서 해 올리면 수정하고 재작성, 다시 한 단계 위로 올라가 다시 수정하고 재작성 등의 과정도 반복한다. 이제 사무실 안에서 누구도 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바쁘게 돌아간다. “과거에 한 두 사람만 있을 때 이 많은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했었나” 스스로 감탄까지 하면서 공무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낀다.

관공서 취재 때 본 일이다. 하얀 복사지를 두껍게 끼운 클립보드가 공무원들 책상마다 놓여 있었다. 한 번 쓴 복사용지란다. 이면지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공무원이 이면지에 연필로 끄적거리며 기안을 하더니 컴퓨터에서 문서양식을 불러와 초안을 작성했다. 프린터에서 인쇄를 한 뒤 오타를 발견하고는 컴퓨터에서 고쳤다. 좀 전에 출력한 복사지는 이면지 신세가 돼 클립보드에 끼워졌다. 그러고 나서도 이면지는 이런저런 수정을 하면서 두 장이 더 발생했다. 역시 클립보드에 끼워졌다. 마침내 기안이 완성돼 계장에게 문서가 올라가자 다시 붉은 줄이 그어지고 지적사항이 적혀 되돌아왔다. 수정하라는 지시다. 또 이면지가 생겨났다. 자원절약 차원에서 이면지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지를 생산하기 위해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공무원들은 이면지를 생산해가면서 업무를 늘리고 나눠가며 파킨슨 법칙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역시 모두가 바빴다. 노는 사람은 없었다.

질병관리본부(질본)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는 내용의 정부 조직법 개정안 논란을 보면서 ‘파킨슨 법칙’을 떠 올린 건 나만의 생각일까? 코로나 사태 와중에서 질본의 헌신성과 전문성은 국민들로부터 큰 성원을 받았다. 차제에 방역 당국의 콘트롤 타워인 질본을 독립성과 전문성이 강화된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기로 한 것은 모두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정부가 입법예고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청와대 협의를 거쳐 공개된 내용은 뜻밖이었다. 이름만 질병관리청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무늬만 청 승격’이란 말이 절로 나올 만했다. 현재 질병관리본부를 청으로 승격시켜 독립시켜준다면서 질본 아래에 있는 국립보건연구원과 산하 감염병연구원 등은 보건복지부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질병관리본부 인력은 907명에서 746명으로, 예산은 8171억 원에서 6689억 원으로 기존보다 줄어든다. ‘차 떼고 포 뗀 질병관리청’이란 지적이 빈말이 아니다.

복지부는 국립보건연구원을 질본에서 복지부로 이관하는 필요성에 대해 “보건의료 R&D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복지부는 “유전체 기반 의료와 재생의료에 대한 기술 개발 부분은 질병관리본부와 조금 다른 기능”이라면서 “현 정부에서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과 관련된 기술적 지원 등의 기능은 국립보건원에서 맡는 게 좋다는 정책적 판단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복지부의 주장에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질병관리청을 방역관리청 수준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고 코로나 19로 고생한 곳은 질본인데 성과물은 복지부가 챙기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복지부의 움직임을 보면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명분과는 다른 속내가 스멀거리며 드러난다.

복지부 업무는 크게 사회복지와 보건의료로 나뉜다. 웬만한 부처에는 두 명의 차관이 있는데 복지부는 한 명의 차관이 있을 뿐이다. 정부조직법 개정안대로 국립보건연구원과 감염병연구원이 이관되면 보건의료 부문 2차관을 신설해 사회복지 부문 차관과 함께 복수 차관제를 둔다는 복안이다. 차관 자리가 생기면 그 아래에 국실이 생길 것이고 이런 저런 과도 신설될 것이다. 조직이 늘고 인원이 늘고 예산이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복지부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행정공무원들이 주축을 이룬 복지부로서는 이번 코로나 사태 때 질본의 의사 약사 연구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게 영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복지부 고위 관계자 입에서 “질병관리본부가 독립한다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도 복지부가 도와줬으니 잘한 거였다”는 말도 나왔다고 한다. 또 질본의 주요 간부 자리도 행정고시 출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어 전문직들과 얼마나 삐걱거렸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내부에서는 이들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지고 감염병 대응에도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전문직들로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치르면서 전 세계로부터 한국이 ‘K-방역’이라는 호평을 받게 된 데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거리두기’ 협조와 질본의 전문성, 의료진의 헌신 등이 시너지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감염병이나 방역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을 존중하지 않고 행정공무원들의 탁상행정이나 정치인들의 보여주기식 선동이 판을 쳤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꼴을 우리도 보고 있을지 모른다.

2011년 5월 초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날아온 뉴스에 전 세계는 놀랐다. 10년 전 9·11 테러를 일으킨 것으로 지목된 알 카에다 테러조직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을 파키스탄 은신처에서 제거했다는 뉴스였다. 미군 특수부대 네이비실 특수요원들의 기습작전으로 파괴된 은신처 현장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은 특수작전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백악관 상황실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백악관 전속사진사 피트 수자가 잡은 ‘오바마 상황실’은 긴박한 작전 순간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생생하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부터 장관, 백악관 보좌관들의 자리 배치는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상황실 테이블의 정중앙 대통령 자리에는 오바마 대신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을 지휘한 마셜 B 웹 합동특수작전사령부 준장이 앉아 있다. 점퍼에 와이셔츠 차림의 오바마 대통령은 웹 장군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뒤의 오른쪽 구석에 쪼그린 듯 앉아 상황실 내 모니터를 통해 작전 상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군사작전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군 지휘관에게 주도권을 넘긴 오바마의 실용주의 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해석된다.

웹 준장 좌우 테이블에 조 바이든 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데니스 맥도너프 국가안보부보좌관이 심각한 모습으로 상황실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다. 미군 최고지휘부 중 한 명인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과 톰 도닐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빌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담당 보좌관,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 등은 모두 웹 준장의 뒤나 옆에 서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모습은 이 사진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질병관리청 승격 문제가 문 대통령의 전면 재검토 지시로 원점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천만 다행이다. 그래도 일부에서는 복지부가 호락호락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도 들린다.

전문가를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행정공무원들이 의료 환경 보건 건설 도시계획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침을 바르고 참견하던 시대는 지났다. 일은 해당 분야 전문가에게 맡기고 행정은 그 일이 잘 되도록 서포트 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질병관리청 승격과 업무분장이 시금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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