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흥미 넘치는 열린 세계, 인생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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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흥미 넘치는 열린 세계, 인생도 마찬가지"
  • 취재기자 이원영
  • 승인 2016.04.2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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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만주 모던> 펴낸 동아대 한석정 교수의 파란만장한 삶과 학문 이야기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 안쪽에 내걸린 전설적인 전 세계 헤비급 복싱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사진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의자에 묶인 시커먼 폐타이어는 또 뭘까. 체력단련용이거나 야구 배팅연습용인 듯했다. 양쪽 벽 책장에 빼곡히 들어선 각종 사회학 서적, 그리고 책장 옆 벽에 내걸린 대형 만주 지도가 아니라면 체육학과 교수 연구실로 오인할 뻔했다.

이곳은 만주국 관련 한국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진 한석정(63)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연구실이다. 그는 최근 10여 년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문학과지성 刊)을 펴냈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롤모델이 만주국에 있었다는 그의 지론이 이 책에 압축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그는 한국의 ‘불도저식' 급성장과 산업화, 근대화의 원류를 1930~40년대 만주국 체제에서 찾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직결돼 있는 시공간이 1960년대라면, 또 이 시대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곳이 바로 1930~40년대의 만주라는 것이다.

만주국은 1932년 제국주의 일본이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를 내세워 현 중국의 동북3성 일대에 세운 괴뢰국이다. 한 교수는 “중국역사가 기록한 만주사의 주인공은 불쌍한 인민밖에 없다. 그것도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다르게 접근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주의를 이분법적 사고, 단순화법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중립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는 역사에는 숨은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역사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찾아가는 열려있는 세계"라고 말했다.

▲ 한석정 교수(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재수, 삼수, 사수... 우여곡절 끝에 대학 졸업

당초 한석정 교수 연구실을 찾은 것은 그의 신간 서적에 관한 얘기를 듣고 그의 연구 업적에 관해 질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구실을 장식한 심상치 않은 소품들 때문에 그의 인생 자체가 궁금해졌다. 그는 왜 여느 사회학자와는 달리 연구실에 권투선수 사진을 내걸고 폐타이어를 비치하고 있을까.

마치 예능인처럼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그의 말솜씨를 따라 가보니,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1953년 마산에서 태어난 한 교수는 월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그는 줄곧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다고. 그런데 입시를 앞둔 3학년이 되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공부에 담을 쌓고 지내던 한 친구가 “자신이 대학에 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그에게 간곡히 부탁해왔다. 의협심이 남달랐던 그는 친구를 돕기로 작정했다. 학교 수업시간은 물론 방과후에도 거의 매일 그 친구와 붙어다녔던 것. 문제는 그 친구 주위에는 유혹거리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공부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함께 지내다 되레 그 친구의 '노는 세계'에 자신이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그 친구를 도우려고 붙어 다니다 보니 내가 오히려 그에게 동화되어 공부는커녕 부산 시내 곳곳으로 놀러 나가기 바빴어요. 친구따라 강남 간 케이스가 바로 딱 그것이었지요."

1년 동안 신나게 놀러다닌 대가로 그는 보기 좋게 대학 입시에 떨어졌다.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재수한 끝에, 한 해 뒤 서울대 치의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노는 세계에 물든(?) 탓이었을까. 대학 생활의 자유를 만끽하다 1학년 때 낙제점을 받고 다시 유급됐다. 새로운 고민이 몰려들었다. "평생 남의 이빨이나 들여다보며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것. 다시 문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밥 팔아서 X 사먹어라”는 주위 사람들의 핀잔과 걱정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지원해 합격했다. 고교 졸업 시점으로 따지면, 4수 끝에 대학에 입학한 것. 하지만 한량처럼 노는 버릇은 남주기 힘들었다. 1학년 교양과정부 당시 정말 열심히(?) 놀았다. 결국 또 학사경고를 받아 당시 1지망, 2지망, 3지망에서도 탈락한 학생들의 '패잔병 집합소' 국문과로 배정됐다. 지도교수에게 불려가 “한 번만 더 학사경고를 받으면 퇴학시키겠다”는 불호령을 듣고서야 “내가 국문과 졸업도 못할까” 하는 오기가 생겨 공부를 시작했다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는 대학 졸업장을 따냈다.

대학 시절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그는 졸업 후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경험을 쌓아 무역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생각으로 1978년에서 1979년까지 율산실업, 제세산업, 대봉산업을 거쳐가며 근무했다. 1970년대 당시 신흥 무역회사였던 이들 기업은 세칭 '무서운 아이'들로 불렸던 율산의 신선호, 제세의 이창우 씨등 패기만만한 젊은 기업인이 창업했던 회사들이다. 율산, 제세, 대봉 등은 한때는 직장인들의 신화로 불릴 정도로 잘 나갔지만 고속성장 시대에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모두 허망하게 무너졌던 곳이다. 다니던 회사가 연이어 파산하자, 그의 실망도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주위 친구들이 '네가 정말 미워하는 회사 있으면 그곳에 입사해 봐라'라는 농담아닌 농담을 했겠어요. 허허."

▲ 한석정 교수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짧은 기자생활, 그리고 미국 유학

그래서 다시 들어간 곳이 언론사였다. 당대 사회계열을 전공한 학생들의 전형적 사회 진출 루트는 고시 공부를 하거나 언론사에 취직하는 것. “따분한 고시 공부는 하기 싫고, 적성에 맞을 것 같은 기자나 하자며 들어간 곳이 한국일보였어요. 처음 사회부 기자로 일했는데 그때가 바로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1980년 4월이었지요."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온 나라에 민주화 열기가 끓어올랐던 그때, 이른바 '3김(金)'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의 긴장으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도 없을 만큼 안갯속이었다.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결국 정권을 틀어쥐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통폐합을 강행했고, 언론에 족쇄를 채워 취재 보도를 일일이 간섭했다. 막 기자를 시작했던 그에게도 암울한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언론사가 자유롭지 못한 환경에서 더이상 성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8개월의 짧은 기자 생활을 마감하고 그 해 12월 한국일보를 나왔다.

▲ 한국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한석정 교수(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유학시절, 적성에 맞는 '역사사회학'과 '만주사' 발견

그리고 그는 서른 셋,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홀연히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사회학’이라는 관심사를 발견했다. 볼스테이트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 사회학 석사 과정에 유학생을 모집하고 있는 걸 보고 신청했다. 대학 시절엔 사회학개론도 들어본 적 없었는데, 대학 측에서 몇 달이지만 사회부 기자로 일한 경력을 높이 평가해줬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1995년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그는 한국과 미국을 수없이 오갔다. 10년 간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인문학에 기초한 선진 교육을 몸소 경험한 그는 입시와 출세를 위한 공부에 내몰리는 한국 교육 현실에 회의를 느꼈다.

“유럽 대학에서 영향을 받은 미국의 하버드 등 대학들은 인문학(문학, 사회학, 철학)과 인성 교육으로 미래의 지도자를 키워내고 있었어요. 한국의 ‘범생이 교육’과는 확연히 달랐어요.”

한 교수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여전히 아쉽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예로 들었다. 재수, 삼수를 했을 때 거울 앞에서 “빼빼 마르고 볼품 없는 청년”을 본 기억을 떠올리며 “공부도 운동도 못하는 자신이 형편없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동네 야구를 시작했다. 친구들과 아마추어 야구팀 ‘도르마’를 조직했던 그는 그 인연을 40년 간 이어오고 있다. 지금 연구실의 타이어도 배팅 연습 도구라고 한다. 그는 “체력이 있어야 공부도 할 수 있다. 운동뿐만 아니라 학창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하면 인생을 보는 종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깊숙한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하마드 알리를 보며 키워온 '권투선수'의 꿈

 

▲ 전설적인 전 세계 헤비급 복싱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사진: pixabay).

인생에 대한 그의 호기심과 도전의식은 권투에로 이어졌다. 1960~1970년대 한국은 '복싱의 왕국'이었다. 전 국민이 일요일 저녁 8시 MBC의 권투 중계 프로그램 <챔피언 스카웃>에 열광했고, 한일전 복싱 경기가 열리는 날엔 전국이 들썩였다. 당시 일본 선수를 누르고 동양챔피언을 거머쥐었다가 후일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됐던 김기수 선수는 국민스타였다. 흑백화면으로 흘러나오는 '대한늬우스(대한뉴스: 1953년~1994년 정부가 제작, 영화관에서 상영한 영상 보도물)'에선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 하이라이트도 보여 줬다.

"어린 내 눈에도 알리는 정말 멋있었어요. 유년시절부터 권투는 강인함을 상징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어린 시절 꿈꿔왔던 권투를 마흔이 넘은 1994년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야구 배트로 공을 치며 맛본 타격의 재미를 권투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무엇보다 그 어려운 역사사회학 공부를 해내고 귀국한 당시라 권투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바로 권투 도장에 등록했다. 1996년 3월 아마추어 복싱 부산 신인대회 웰터급에 출전해 우승한 그는 내친 김에 같은 해 11월 아마추어 복싱 부산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웰터급 준우승까지 거머쥐었다. 2006년엔 40~50대 대상으로 하는 제1회 프로복싱 시니어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는 1주일에 한 두 번은 권투 도장에 나가고 있다고 한다.

"백세 시대, 연구와 운동 오래 하고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만주사 연구는 의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는 "만주사는 정말 복잡해서 흥미로운 역사”라고 말했다. 만주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던 때 한 역사사회학 교수의 만주사 수업을 듣게 되면서부터 비롯됐다. 그가 2008년에 번역한 책 <주권과 순수성-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의 원저자인 시카고대학 사회학과 '프래신지트 두아라' 교수와의 오랜 인연도 같은 시기에 만주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됐다고. 그는 이 책 서문에서 두아라 교수가 "만주사 연구를 먼저 시작한 건 한 교수"라고 언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20여 년 간 만주사 연구에 매진해 오고 있다. 여러 학위 논문을 발표하고, 단행본도 출간했다. 이번에 펴낸 역작 <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말고도 이미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화려한 군주>, <만주-교차하는 역사> 등 여러 저서를 발간했으니, 그는 한국에선 명실상부한 만주국 연구의 1인자인 셈이다. 그는 “30대에 늦게 시작한 공부지만, 지금까지 여기에 매진하며 연구하다 보니 이 분야에서 저명한 전문가가 돼 있더라”며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는 정해진 대로 가는 길보다 늦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길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고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다들 알다시피 앞으로는 100세 시대가 펼쳐집니다. 서른, 마흔이 아니라 팔순이라도 새로운 일을 하는 데는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서른 여섯의 나이에 찾은 적성이 바로 ‘역사사회학’이었습니다. 역사와 사회를 접목시켜 역사를 바탕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 길을 꾸준히 가야하겠지요."

우리 사회가 갑질사회가 된 것도 좁은 땅에서 많은 인재들이 갇혀 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며 청년들에게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글로벌 시대로 뻗어 나가라. 말년에 꽃 피우는 인생도 좋다. 젊을 때 연애든 공부든 운동이든 다양한 경험을 하라"는 당부와 함께 응원의 말을 잊지 않았다.

취재진을 연구실 앞까지 바래다 주는 그의 얼굴엔 평생 한 분야의 연구에 매진해 온 학자의 자부심과 함께 운동으로 다져진 팽팽한 활력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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