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변리사의 특별한 특허 이야기] 특허는 '역사 체인저'...산업혁명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로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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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변리사의 특별한 특허 이야기] 특허는 '역사 체인저'...산업혁명도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로 비롯
  • 박창희
  • 승인 2020.05.01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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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1769년 특허 획득
증기선, 증기기관차, 제철소 송풍기로 응용되면서 산업혁명 촉발
와트와 투자자 볼턴의 만남은 지금도 '기술 사업화'의 모범

박창희 변리사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이학석사와 이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특허법인 플러스 대표 변리사, 카이트엔젤클럽 부회장, 질병관리본부 국가병원체 자원은행 심의위원 등을 맡고 있습니다. 화학 바이오 분야 전문 변리사로서,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전자재료와 신약분야 등에 대한 특허 출원, 특허전략수립, 기술사업화 컨설팅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박창희 변리사는 독자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테크놀로지 관련 특허 이야기를 우리 생활 주변 소재와 연결하여 쉽게 전달해 드릴 예정입니다.

박창희 변리사
박창희 변리사

산업혁명은 영국의 방적기 발명에서 시작됐다. 1764년 여러 개의 물레추를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제니 방적기가 발명됐고, 얼마 후에는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적기가 발명됐다. 그 결과, 면사 생산량은 이전보다 최고 300-400배나 늘어나, 가히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적기는 물레방아의 회전동력을 이용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방적 공장이 강가에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영국의 옷감 공장들이 강가에 죽 들어서게 됐다.

그런데 가뭄으로 강물이 메말라 버리자 물이 모자라니까 공장들이 기계를 제대로 돌릴 수 없는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물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다른 힘(동력)으로 기계를 돌릴 수 있기를 고대했는데, 이 문제를 증기기관을 수리하던 제임스 와트가 해결해서 사람들의 바람을 일시에 이뤄 주었다.

사실, 증기기관은 와트가 제일 먼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와트보다 앞서서 이미 토머스 뉴커먼이 사용가능한 증기기관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 이 증기기관은 2층 높이의 건물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정작 마력은 성능 좋은 물레방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효율이 떨어지니 증기기관을 돌리는 데 많은 양의 석탄이 필요했다. 그래서 석탄 채굴하는 광산에서 막장에 고인 물을 퍼 올리는 목적밖에는 쓸모가 없었다. 산업혁명의 도약을 가져온 역사적인 돌파구는 바로 뉴커먼이 발명한 증기기관보다 월등한 성능을 갖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었다. 이 증기기관은 지금부터 250여 년 전인 1769년에 첫 특허를 받았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사진: 위키백과 무료 이미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사진: 위키백과 무료 이미지)

와트는 이 증기기관 특허권을 바탕으로 존 로벅과 동업하게 된다. 마치 특허권을 바탕으로 투자하는 조건으로 공동지분을 갖는 요즘의 ‘기술 사업화’ 방식과 닮아 있다. 존 로벅은 필요한 정밀한 기계를 만들지 못해 큰 이익을 보지 못하고 그의 지분을 단추 제조업자인 매슈 볼튼에게 팔았다. 그래서 시작된 와트와 볼턴의 공동사업은 특허 기반 기술 사업화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가 됐다. 볼턴의 사업 안목과 와트의 기술적 창의성이 서로 보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장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장

와트는 영국 의회 법령에 의해 25년 연장된 특허권을 확보하고 1775년 사업을 시작했다. 투자자 볼턴은 와트의 기술을 높이 평가했으며, 또한 와트를 존중했다. 와트는 투자자 볼턴이 재정적 리스크에 빠지지 않도록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의 환상적 파트너십이 증기기관 관련 사업의 성공을 가져왔다. 볼턴이 와트에게 제안하여 추가로 발명한 ‘증기기관에 연결한 회전식 장치’는 수력 방적기를 대체했고, 면방적 공장의 기준이 됐으며,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져 나갔다. 와트는 부단한 실험과 시도를 하면서 특허 침해자들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실어 나를 교통수단이 필요해졌고, 와트의 증기기관을 활용한 증기 기관차와 증기선이 잇따라 발명되면서, 산업혁명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철 용광로에 바람을 불어 넣는 송풍기에도 이용되기 시작하여 제철 산업에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으며, 대량 생산된 양질의 철은 목선보다 튼튼한 철선을 만들 수 있게 했다. 이 무거운 철선은 증기기관의 회전력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여기에 큰 대포를 장착한 대영제국은 해군 군함을 앞세워 19세기에 세계에서 막강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근대 산업사회의 성격을 규정했으며, 세계 질서를 서양 중심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영국은 농업 중심 사회에서 공업 중심 사회로 바뀌었고, 이게 바로 '산업 혁명'이었다.

물레방아라는 자연의 힘보다 더 강력하고 편리한 인공 동력이 필요했던 당시의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고, 이는 와트가 아니었어도 누군가가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해서 그 시대적 요구에 부응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와트와 볼튼의 좋은 파트너십과 탁월한 기술 사업화 전략은 산업혁명의 완성을 더 빨리 앞당기게 됐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5년간의 공동경영이 끝난 1800년, 와트의 증기기관 특허권은 만료됐으며, 64세의 와트는 계획대로 은퇴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면 누구나, 아니 현대의 우리도 누구나 바라는 건강과 부와 명성을 만족스럽게 누리다가 1819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국과학진흥협회는 제임스 와트의 공적을 기려 1889년 ‘와트’라는 그의 이름을 아예 일률과 동력을 재는 단위(W, kW)로 채택했고, 1960년 제11차 도량형총회에서 국제단위계의 하나가 됐다. 그의 증기기관에 대한 기술혁신은 세상을 크게 바꾼 대표적인 발명 가운데 하나이며, 발명가와 투자자가 만나 기술 사업화에 성공한 모범적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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