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 국민을 졸(卒)로 보는 정치와 4.15 선거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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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국민을 졸(卒)로 보는 정치와 4.15 선거판
  • 편집주간 송문석
  • 승인 2020.03.3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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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주간 송문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도 없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흥행을 얻지 못하고 있는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 얘기다. 어느 정당의 정책과 비전이 어떻다거나 누가 후보로 나왔다거나 하는 말이 진지한 화젯거리로 오른 걸 본 적이 없다. 정치인 욕하는 소리만 들려온다.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의 정치면에 이젠 그만 좀 봤으면 싶은 식상한 정치인들의 얼굴이 나타나면 “맞아, 국회의원 선거운동이 시작됐지”라고 생각의 되새김질을 하는 게 전부다.

정치혐오증을 갖게 만든 건 정치인들이었다. 꼼수란 꼼수는 모두 부렸고, 반칙과 편법, 말 바꾸기와 적반하장, 안면몰수와 후안무치 등이 난무하면서 국민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판을 개싸움판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조국 수호에 앞장선 개싸움국민운동본부가 여당의 위성 비례정당의 핵심 정파로 참여했다. 역사에 기록될 일이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가 4.15총선을 앞두고 투개표 관리에 관한 점검을 하고 있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가 4.15총선을 앞두고 투개표 관리에 관한 점검을 하고 있다(사진: 더 팩트 제공).

투표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여서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해야 하지만 이번 선거처럼 야바위판처럼 만들어 정치에 염증을 느끼게 한 적이 있었을까 싶다. 정치권은 처음부터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정치판과 선거판이 어떻게 짜여 지더라도 어차피 자기 지지자들은 자신들을 찍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싫더라도 반대편을 찍지는 않을 거라는 오만감과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다. 건설적인 비판을 하면 “그래서 어쩔 건데. 그렇다고 저 당 찍을거야?”라고 흰 눈을 치켜뜨고 부라렸다. 국민들을 거수기나 쓸개 빠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을 터다.

오는 4월 15일 유권자들은 투표장에서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한 희한한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첫 번째 황당한 일은 길어도 너무 긴 투표용지다. 길이가 48.1㎝에 달하는 비례대표 후보 투표용지 앞에서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 투표용지 길이가 33.5㎝ 였고, 17대는 24.7㎝, 18대는 26.0㎝, 19대는 31.2㎝ 였다고 하니 속된 말로 게임이 되지 않는다. 투표지가 너무 길어 멀쩡한 투표지분류기 놔두고 100% 수작업으로 개표작업을 해야 한단다. 이런 소극이 없다.

운동회 100m 달리기의 결승선 테이프 같은 긴 투표용지를 들고 기표소에 들어가면 유권자들은 이번엔 수많은 정당 이름에 또 놀랄 것이다. 비례대표 후보 투표용지에 적힌 정당 이름 35개가 눈을 어지럽힌다. 게다가 이름도 비슷비슷해 이것이 저것같고, 저것이 이것 같다. 글귀가 어두운 연로한 유권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찍을 가능성도 높다.

기호순서도 기상천외 역대급이다. 지역구 후보 투표용지와 비례대표 투표용지의 기호순서가 다르다. 지역구 후보 투표용지는 의석수가 많은 민주당 통합당 민생당 소속 후보가 차례로 1~3번 기호를 받고 투표용지 상단을 차지했다. 그러나 소속 의원이 있지만 지역구 후보를 내지 않은 미래한국당과 더불어시민당은 투표용지에서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정의당이 민생당 바로 아래 네 번째 칸에 6번 기호를 받는다. 4번과 5번 기호는 없다. 이에 비해 비례대표 투표용지에는 후보자를 내지 않는 민주당과 통합당이 보이지 않는다. 기호 3번을 받은 민생당이 첫 번째 칸에 놓인다. 이어 4번 미래한국당, 5번 더불어시민당, 6번 정의당, 7번 우리공화당 등 순으로 기호를 받게 된다. 여기엔 1번과 2번이 없다.

정치권에서는 투표를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이번 선거가 끝나면 선거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그들도 희한하고 기묘한 선거법의 문제를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박원호 교수 같은 이는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48개 정당이 난립한 적이 있는데 70년 전으로 시계를 돌릴 것 같다”고 개탄한다.

앰브로스 비어스는 ‘악마의 사전’에서 ‘정치’를 ‘우리네의 범죄 계급 중에서도 보다 저급한 족속들이 즐기는 생계의 수단’으로 정의했다. 이번 선거제도의 핵심이라 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공직선거법을 두고 여야가 국회에서 벌인 진흙탕 싸움은 비어스의 표현 그대로 ‘저급’했다. 입으로는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 장벽을 낮춰 원내정치의 다양성을 확보하겠다고 거창하게 포부를 밝혔지만 현실을 거꾸로였다.

소수정당 배려는 말뿐이었다. 선거법 개정에 반대한 미래통합당은 재빠르게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이 가시화되자 “국민 투표권을 침해하고 정치를 장난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비난하던 이해찬 대표와 “쓰레기 정당”이라고 했던 민주당 지도부도 ‘장난질’을 하며 ‘쓰레기 정당’ 창당에 허겁지겁 나서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었다. 그리곤 이 대표와 더불어시민당 우희종 최배근 공동대표는 서로를 향해 ‘형제’ ‘사돈’ ‘시댁’ ‘종갓집’ 등의 표현을 해가며 낯뜨거운 애정을 과시했다.

두 거대 정당이 위성 정당에 의원 꿔주기까지 하며 의석수 확보에 혈안이 된 건 말하나 마나다. 쌀 99가마 가진 부자가 1가마 가진 가난뱅이에게 쌀을 나눠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쌀 1가마를 빼앗아 100가마를 채운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정체성까지 의심받으며 ‘4+1협의체’에 참여했던 정의당 등 소수 정당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비어스가 ‘투표’를 ‘다수파가 소수파에게 저항해보았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단순한 조작’이라고 냉소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벌써 인터넷에는 거대정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몇 번에 몇 번’이라는 구호가 난무한다. 정당으로 짝을 지어 지역구 O번에 비례대표 O번을 찍자는 운동이다. 정당 이름이 비슷비슷하고 두 개 투표용지의 기호가 제각각이니 들여다 봐야 헷갈리기만 할 뿐이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몇 번에 몇 번’을 찍잔다. 후보자 이름과 정당 이름을 읽어내려가면 헷갈리기만 하니 숫자를 외어 눈 딱 감고 찍으라는 얘기다.

정당의 정책이나 비전, 후보자의 정견 같은 것을 보고 투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사치에 불과하다. 소수 정당의 국회 원내 진입의 문을 넓혀 다양한 국민의 의사를 국정에 수렴한다는 말도 말짱 헛소리다. 거대정당 두 개가 주물럭거리는 선거판이 돈 놓고 돈 먹기 같은 야바위판처럼 변해버렸다. 선거가 이래도 되는 걸까. 도대체 국민을 장기판의 졸(卒)로 보지 않는다면 이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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