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가 있지?" "와~! 캐나다 사람 무시무시하네."
1993년 10월 26일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놀라움과 감탄이 뒤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루 전 치러진 캐나다 총선 결과를 외신으로 접하면서였다. 총 295석인 의회에서 169석을 차지하고 있던 집권 진보보수당(PCP)이 단 2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캐나다 국민이 집권 여당에 대해 응징의 철퇴를 내리쳤다. 동쪽으로는 대서양에 접한 뉴펀들랜드 앤 래브라도 주에서 서쪽으로는 태평양 연안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까지, 남쪽으로는 토론토에서 북쪽으로는 멜로우나이프까지, 영어권이든 프랑스어권이든 모든 국민이 하나가 되어 집권당의 허리를 부러뜨려 버렸다. 40대의 젊은 여자 총리 킴 캠블도 떨어졌다.
캐나다 국민이 집권당에 대해 단호하게 ‘노’를 외친 것은 경제가 어려운데도 연방부가세(GST, Goods and Service Tax,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캐나다 국민은 이미 한 해 전에 진보보수당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프랑스어 사용지역인 퀘벡 주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려는 개헌안을 마련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 거부한 바도 있었다.
진보보수당의 연방부가세 도입에 대해서는 정부 재정을 안정시킴으로써 그 후 캐나다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가 뒤늦게 나오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시절 ‘캐나다 진보보수당이 당을 몰락시키기는 했으나 캐나다를 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놓았다.
후일의 평가를 보면, 93년 선거에 대해 달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캐나다 국민이 보인 주권자로서의 단호함에 대해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보보수당은 3년 뒤 20여석의 군소 정당으로 회복되다가 결국 보수 세력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다른 정당에 흡수통합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투표는 망치다. 정치 망치다. 인물과 조직으로 이뤄진 정치세력, 즉 정당에 부서질 듯한 충격을 주어 응징을 가하는 망치다. 캐나다의 1993년 총선은 망치의 위력을 나라 안팎에 보여준 사례다.
투표장을 향해 가는 유권자의 발걸음은 정치인에게 천둥 벽력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선거만 없으면 국회의원은 정말 좋은 직업인데 ……’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곤 한다. 당선되고 나면 호시절을 보내는 정치인들에게 유권자들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선거 때이다. 약속을 위반한 자, 국민의 삶을 돌보지 않는 자,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귀와 눈을 닫은 자들을 심판할 절호의 기회가 선거다. 불만 계층, 차별 지역, 절망 세대가 투표라는 망치를 휘두르지 않으면 정치는 제멋대로 굴러간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공천 과정을 보면 여야가 국민을 얼마나 졸(卒)로 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지금 미국에선 대통령 선거철을 맞아 좌우 양쪽에서 샌더스 후보와 트럼프 후보가 청년, 빈곤층, 백인 불만 세력 등의 목소리를 정치 과정에 투영시키고 있다. 유권자들은 적극적으로 두 후보에 지지표를 모아 줌으로써 미국이, 나아가 전 세계가 미국 사회의 바닥 민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고 있다. 샌더스나 트럼프가 당선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지만, 힐러리 클린턴 후보 등 주류 세력도 이들의 목소리를 부분부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있다. 우는 아이 젖 더 준다는 말은 정치에도 잘 적용된다.
투표는 희망이다. 망치가 부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에도 쓰이듯이, 투표는 바람직한 정치 세력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공동체의 결단이기도 하다. 투표는 민주 체제에서 권력을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다. 민주주의 체제라고 해도 강력한 권력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임기 동안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려면 유권자의 의지와 힘이 모아져야 한다. 공화국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가 슬랙티비즘(slacktivism, 말만 많고 실제 행동하지 않는 게으른 행동주의. 정치 영역에서는 노력이나 부담을 지지 않고 사회운동을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희망의 망치질, 건설의 망치질을 해야 한다.
당위론이야 그렇다 치고, 한국 정치에서 선거가 유권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는가? 있었다. 12대 총선이었다.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총선거는 민주 대 반민주, 독재권력 대 민주 세력의 정면 대결이었다. 투표율은 무려 84.6%였다. 김영삼 김대중 두 지도자가 이끄는 신민당은 독재권력의 2중대 노릇을 하던 민한당을 침몰시키고 독재 세력인 민정당에 맞서 한국 민주화의 불꽃을 점화시켰다. 그 뒤 선거는 많아졌지만 투표율은 점점 떨어져 40%대와 50%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18대 총선에서는 역대 가장 낮은 46.1%를 기록했고, 19대 총선에서는 54.2%로 다소 올랐으나 이번 총선도 투표율이 높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낮았다.
양대 정당은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아성을 구축했기에 늘 심각한 응징을 피할 수 있고, 적당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선거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고 유권자들의 관심은 떨어져 갔다.
선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정치권, 여야 정당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투표를 외면해 정치가 폭주하도록 만든다면 유권자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특히 청년층이 투표장을 가지 않으면 정치권은 청년들이 안고 있는 취업의 어려움, 재정적 어려움 등 절망적 상황 그 모든 것에 대해 귓등으로 흘려듣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지훈 시인이 4·19혁명 희생자를 기리면서 썼던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는 시의 제목처럼 청년층을 포함한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우리는 안다. 투표를 외면할 이유를 찾으라고 하면 100가지도 넘을 것이다. 투표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거의 전무하고 관심이 가는 이슈와 정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래서, 투표가 희망이다. 덜 나쁜 세력에게 힘을 주어 더 나쁜 세력을 경계하고, 덜 유능한 세력보다는 더 유능한 세력에게 힘을 주는 투표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함으로써 정치의 퀄리티 콘드롤을 해야 조금이나마 발전이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여야 모두 유권자의 밝은 눈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공천과 분열, 정책도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이를 질타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더 투표장에 가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유권자는 망치를 휘둘러야 한다. 지역주의를 떠나 더 잘못된 정치세력에 대해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판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력에게는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
청년들이 투표소로 몰려가는 모습으로 썩은 정치세력의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자. 투표는 희망이다. 투표가 혁명이다. 투표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