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神이다-27/Goodbye, Rishikesh (안녕, 리시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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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神이다-27/Goodbye, Rishikesh (안녕, 리시케시)
  • 서창덕
  • 승인 2019.12.1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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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덕
서창덕

"당신은 마하라지의 제자다!"

홀리(Holy) 축제의 다음날 아침. 나는 아쉬람의 사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내 목소리는 흥분으로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가라앉히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사무실 직원도 내 흥분에 놀란 표정이었다.

-2주 뒤에 마하라지의 제자들 모임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는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얼마나 마하라지의 제자를 찾고 있었는지 당신들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잘 알고 있다. 내게는 분명히 마하라지의 제자들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당신의 일정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일정 때문에? 그들은 얄팍한 핑계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그렇다면, 내가 출국날짜를 2주 뒤로 연기하면 그 모임에 참석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물론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 아쉬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누구나 그 행사에 참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마하라지의 제자들만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참석이 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진짜인가? 그렇다. 사실이다. 나는 마하라지의 제자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다. 당신은 이미 마하라지의 제자다.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벙벙해졌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뭐라고? 내가 이미 마하라지의 제자라고? 뭐지? 당황한 틈으로 저 가슴 밑바닥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당신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생각이다. 우리는 당신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우리는 당신을 매우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 당신은 우리도 못했던 일을 했다. 이미 당신은 우리의 친구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사실 내 일정을 2주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행사기간 일주일을 합치면 무려 3주나 뒤에 한국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약 한 달이나 입국일을 늦춰야 한다.

1년마다 열리는 행사라고 했으니 혹시 내년에 온다면 참석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당신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나는 그들이 최초로 인정한 마하라지의 특별한 제자가 되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는 아쉬람의 내 방으로 돌아와 몇 달 전 처음 리시케시에 올 때 가지고 왔던 질문지를 꺼내보았다. 그때 나는 이곳에 오면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기대를 안고 왔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억대 연봉의 직장까지 과감히 벗어던졌다. 그러나 마하라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법을 이어받은 제자는 아쉬람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앞이 캄캄하고 억장이 무너졌다. 이대로 돌아갈까. 돌아간다면 또 얼마나 큰 웃음거리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표를 반려해 달라고 할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갈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나를 인도한 인연과 내 운명을 믿고 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늘 기도하며 아쉬람에 남아 있는 단서를 뒤졌다. 매일 밤 갠지스의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고독과 후회로 밤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기적적으로 도서관에서 귀한 자료들을 찾았고 그 자료와 아쉬람 곳곳에 남아 있는 그림과 자잘한 흔적들을 연결하자 마하라지의 위대한 비밀들이 하나하나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다보면 또 막혔다. 벽에 부딪혀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순간에는 마하라지에게 간곡하게 기도를 드렸고 마하라지께서는 꿈과 영감을 통해 답을 주셨다. 아쉽지만 이만하면 됐다. 이곳에 오지 않고 한국에서 수련만 계속했다면 몇 년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자들은 내가 풀었다는 비밀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그동안의 연재를 통해 일부를 소개했지만 그 동안의 과정을 간단하게 핵심만 요약하면 이렇다. 15년 전에 나는 한국에서 국선도를 수련하다가 쿤달리니가 열렸다. 몸에 많은 변화가 왔지만 국선도 수련에서는 없는 변화였다. 그러다가 미국에 있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가 설립한 자아실현협회(SRF)의 크리야요가를 전수받아 많은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크리야요가의 핵심은 빛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견성이라고 하고, 선도에서는 현빈지문이라고 한다. 국선도에서는 통기법 과정이다. 그러나 이 빛을 본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가 높은 단계의 수련이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자유자재의 경지인 솔성(率性)의 단계가 남았다. 높은 단계의 수련은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매우 어렵고 더디다. 나는 크리야요가를 배워 많은 진전을 이뤘지만 벽에 부딪혀 정체기가 왔고, 바로 그때 하늘의 도움으로 양익스님이 그리신 범어사 청련암 벽화를 만났다.

청련암의 벽화를 보고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기존의 불교가 아니고 티베트에서 발달한 밀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밀교도 불교다. 양익스님은 우연하게 불교 속의 밀교를 익혔고 말로 설명할 수 없어 청련암에 벽화로 남기셨다. 5년 전에 우연히 그 벽화를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내가 수련하는 크리야요가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무려 4년 간 그 벽화를 연구하며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청련암의 벽화를 분석한 기록을 책(<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으로 출판했다. 벽화의 수련법을 통해 나는 한 단계 더 성장했다.

그리고 또 정체기가 왔다. 그때 어떤 분이 책 한 권을 갖고 왔다. 내가 출판한 책에 있는 그림과 유사하다며 갖고 온 책이었다. 나는 또 깜짝 놀랐다. 청련암의 벽화를 처음 봤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그 책은 멀리 인도에서 출판된 책이었지만 청련암 벽화와 매우 유사했다. 인도의 그림은 훨씬 더 상세했고 넓고 깊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기다렸다는 듯 연이어 일어날 수 있을까. 너무나 완벽한 우연의 일치였다. 만약에 누군가 드라마를 썼다면 너무 티가 많이 난다며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책을 따라 인도의 리시케시 아쉬람에 왔고 다시 나는 또 한번 성장했다. 묘한 것은 청련암의 벽화를 그리신 양익스님도 돌아가신 뒤에 법이 이어지지 않았고, 리시케시의 마하라지도 돌아가신 뒤에 법을 이어받은 제자가 없었다. 나는 아무런 도움 없이 남은 단서를 분석하고 공부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하라지를 대신해 내 노력을 인정해줬다. 여기까지가 지난 15년 동안 이어진 나의 간략한 수행여행기다.

거지에게 적선을

나는 배낭을 메고 아쉬람 밖으로 나왔다. 나는 미리 준비한 리시케시의 마지막 날을 보내야 했다. 사실 나는 며칠 전부터 리시케시의 마지막 날을 계획하고 있었다. 우선 나는 단골가게에 들러 200루피를 10루피의 잔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한국식당 ‘드림카페’를 향해 걸었다. 보통은 삼륜차 릭샤를 타고 락슈만줄라 다리까지 올라가지만 오늘은 람줄라를 건너기로 했다. 중간에 작은 이발소에 들러 이발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10루피의 잔돈을 200루피나 바꾼 것은 두개의 다리 근처에서 구걸하는 걸인들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지나치며 늘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한번 주면 떼거리로 몰려들기 때문에 마지막 날 한번은 꼭 주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두 개의 다리에 늘 상주하는 걸인들은 대략 열 명 안팎이었다. 한 사람당 10루피를 준다면 100루피면 충분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넉넉하게 200루피를 바꿨다.

아, 그러나 그들도 내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람줄라 다리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걸인들이 나와 있었다. 새로 보이는 이들도 몇 명 있었다. 영업구역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 좀처럼 새로운 걸인들이 진입하기는 쉽지 않은데 특이한 일이었다. 람줄라 다리를 건너는데 벌써 100루피나 나갔다. 그런데 이발소 앞에까지 가는데 또 두 명이 보였다. 이제는 80루피밖에 남지 않았다.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이발소 주인도 바뀌었다. 평소 보던 어린 친구가 아니다. 은은히 흘러나오던 팝송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밖에서 보던 것보다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비포장 도로 옆에 출입문도 달려있지 않은 이발소라 거울을 비롯하여 가위 면도기 세면대 등등 모든 곳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겨우 이발이 끝나 눈을 떴더니 너무 짧게 잘랐다. 끝이 아니다. 방심하는 사이 가위가 움직이더니 왼쪽 눈썹을 싹둑 잘랐다. 가위가 오른쪽으로 움직이자 깜짝 놀라 제지했다. 눈썹이 짝짝이가 되었다. 괜히 이발을 했다고 후회하는데 주인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10루피로 바꾼 돈이 80루피밖에 남아 있지 않아 불안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정확히 8명의 걸인이 길에 나와 있었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걸인에게 적선을 하겠다는 내 목표가 정확하게 달성이 되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인도의 신들은 얼마나 대단한가.

리시케시를 떠나며(사진: 서창덕 제공).
리시케시를 떠나며(사진: 서창덕 제공).

무소의 뿔처럼 가라

마지막 밤이다. 벌써 세 번째 인도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다시 이 땅에 돌아올 수 있을까. 인도는 내게 무엇이었나? 다시 되돌아본다. 멀리 히말라야를 돌아 내려온 갠지스강의 깊은 숨소리가 들린다. 히밀라야의 바람소리. 숨소리. 그 고요함을 깨고 개가 짓는다.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면, 내가 먹기 좋게 누군가 잘 차려준 밥을 먹는 상황이었다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대차대조표는 늘 어디든, 똑같다.

히말라야에 살아 계신 위대한 스승 바바지에게 감사를 드렸다. 21살에 책을 통해 만나 치기어린 기도에 응답을 주셔서 수많은 고비를 거쳐 나는 히말라야에 왔다. 비록 히말라야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이보다 더 어두운 곳일지라도 내 영혼의 끈을 놓지 말아달라고 기도했다.

갑자기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기운들이 몰려와 잠깐 정신을 잃었다. 잠시 어지러운 사이 갑자기 왼쪽 허리에서 뜨거운 기운이 반응하여 올랐다. 그리고 척추 전체적으로 반응들이 사하스라 차크라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뜨거운 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라. 가라. 걱정하지 말고 가라. 힘들더라도 견뎌라. 끝까지 가서 성취하라.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서 너를 응원하고 보호하고 힘을 보낼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히말라야의 위대한 스승 바바지는 그렇게 또 내 등을 떠밀었다. 〈끝〉.

■에필로그, 새로운 시작

인도의 리시케시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인 2019년 6월부터 연재를 시작했는데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무려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연재를 끝내고, 다시 저는 긴 수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또 떠난다고? 그만하면 충분한데 왜 또 떠나려고 하는가? 혹시 떠나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이상한 병에 걸린 거 아냐?’

작년 말에 직장을 그만 두고 이미 두 번이나 갔었던 인도에 또 간다고 했을 때 한사코 말렸던 사람들이, 또다시 긴 수행(修行)을 떠난다고 하니 이건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저도 그만 떠나고 싶습니다. 누군들 이 추운 겨울 따듯한 아랫목이 그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랫목에 누워 지내면 몸은 편하겠지만 그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이 길은 자만과 자신을 속이면 끝이라고 경계합니다.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물어 내가 부족하고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스승과 길이 있다면 저는 결코 이 여행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무려 40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혹독한 수행을 했던 마하라지께서는 무려 12일 동안 꼼짝 않고 삼매에 들 수 있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 나와 똑같은 50대 중반의 나이에 더 깊은 히말라야 설산(雪山)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스승을 만나 위대한 성취를 이뤘습니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에게 결코 성취는 없습니다.

‘도대체 명상이란 게 뭔데? 목표가 뭔데? 마음 가라앉히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동안 내 얘기에 취해 너무 먼 얘기만 한 것 같아 미안해졌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언제나 저의 목표는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신(神)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른 수행자들의 목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부에 신이 있습니다. 단지 잡다한 현실과 복잡한 욕망에 가려 보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 당신은 육체뿐인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내면에 거룩하고 무한한 신성을 지닌 신(神)이다. 단지 당신은 길을 잃었을 뿐이다.’

이렇게 힘주어 말하면, 사람들은 ‘아, 예 그러셨어요.’ 하고는 끝입니다. 그래, 너 잘났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말도 되지 않는 소리 그만하라는 뜻입니다. 답답하지만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본질에서 약간 빗나가더라도 마지막이니, 간단하게 요약설명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불립문자의 세계이지만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문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종교와 모든 수련법은 자기 안의 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선도(仙道)에서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내 안에 항상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께서 아버지 없이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성령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신성한 아버지 신(神)으로부터 성령을 부여받았습니다.

불교는 내 안의 신(神)을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자기 안의 신성을 찾아갑니다. 기독교는 내 안에 있는 신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방법으로 신을 찾습니다. 선도는 호흡법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 신에게 다가갑니다. 방법은 조금씩 달라도 모든 종교와 모든 수련법의 목표는 똑같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해하는 것과 직접 찾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행 끝에 ‘깨달았다’고 하시는 바람에 이것을 체험이 아닌 이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두 이해했다며 더 이상 수련은 필요 없다며 과시하고, 나아가 남까지 가르치며 더 높은 진리에 다가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말년에 병에 걸리고 죽을 때가 되면 불안해집니다. 분명히 깨달았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깨달았다는 데 고통스럽고 정신은 오락가락 합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두 눈으로 정확히 봐야 합니다. 내 안의 신을 본 것을 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선도(仙道)에서는 현빈지문(玄牝之門)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내 안에 하나님이 임하셨다고 합니다. 연재한 글에서도 수차례 언급했지만 이것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하는 현실의 체험입니다.

어떤 사람은 엉뚱한 것을 보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마음속 상상으로 만들어낸 신을 만나는 것은 종이호랑이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본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로 증명이 됩니다. 다양한 초능력도 생기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에너지, 즉 지복(至福)입니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한 어마어마한 사랑과 긍정의 에너지를 가진 실재하는 의식(意識)입니다.

정확하게 신을 만난 사람은 소리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귀를 막아도 들리고 이 빛은 눈을 감아도 보여야 합니다. 늘 이것을 보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늘 함께 하는 자가 바로 해탈한 자입니다. 바로 선도에서 얘기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늘 에너지가 넘치기 때문에 얼굴에 밝은 빛이 나고 아프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해탈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이유와 핑계로도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지복(至福)은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슷한 예를 든다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줬을 때 내면에 은근하게 감도는 기분 좋은 감정입니다. 이 기분 좋은 감정의 열배쯤 되는 느낌이 바로 지복(至福)과 비슷한 체험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적선(積善)의 마음은 우주의 마음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타인을 돕는 지장보살의 마음이 없으면 우주의 본마음인 신(神)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왔을 때의 좋은 마음에 우주의 에너지가 결합되면 지복(至福)의 체험과 거의 비슷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에너지가 동반되어져야 합니다. 에너지가 충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을 체험하거나 해탈하거나 깨달았다는 것은 미세하게 빗나간 것입니다. 미세하지만 옛 선인들께서는 호리지차(毫釐之差)라고 하셨습니다. 즉, 털끝만큼 차이 나도 하늘과 땅만큼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울 때는 정식으로 정통의 법을 배워야 합니다. 대개 자기가 뭔가 크게 깨쳤다고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정은 비슷한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빗나갑니다. 물론 본인은 절대 빗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정통의 법이 아닙니다. 정통의 종교나 수련법보다 훨씬 뛰어난 새로운 법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지도 받는 사람에게 빛과 소리를 듣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이라고 합니다. 즉 신에게 갈 수 있는 작은 불씨를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을 켜본 경험이 없거나 스스로 빛을 보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절대 타인에게 이 불씨를 옮겨줄 수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성인들의 체험을 아무리 떠들어 봐도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일단 소리를 듣거나 빛을 보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쉽습니다. 그 불빛을 키우고 그 소리에 집중하여 키우면 됩니다. 그 소리와 빛이 나를 신에게 데려다줍니다. 올해 초에 내가 갔었던 리시케시의 마하라지는 그 빛을 어마어마하게 크게 키웠던 분이며, 그 키우는 방법에 있어 단연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리시케시를 향해 떠났던 것입니다.

일단 빛이 켜진 사람에게는 옆에만 가도 빛을 쪼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오랫동안 수련한 공간에 가면 우주의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장소에서 오래 수련함으로써 우주의 진동이 그 방안에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갖춰야 될 최소한의 요건입니다.

원래 연재할 생각이 없었는데 <시빅뉴스>에서 우선 연재를 하고 책으로 내자는 의견을 주어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연이 닿았습니다. 책으로 낼 때는 연재에서 담지 못했던 내용들을 담고 간추리려 합니다. 그리고 책이 나오는 내년 봄에는 수련장을 개설하려고 합니다. 이미 두 개의 스터디 그룹이 생겼고,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라 장소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um. Peace. Amen(옴. 평화. 아멘)

다음 카페 : 풍월 크리야요가(cafe.daum.net/PranaKriyaYoga)

email : ss788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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