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궁궐에 황제의 초상화를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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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궁궐에 황제의 초상화를 옮기다
  • 취재기자 주태형
  • 승인 2019.12.10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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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고종 초상화, 풍경궁에 모시다’전 내년 2월 16일까지 전시
조선 마지막 궁궐 ‘풍경궁’으로 고종 어진과 순종 예진 옮기는 행렬도
부산박물관이 내년 2월16일까지 전시하는 ‘황제의 초상화, 서경 풍경궁에 모시다’전 홍보물. 풍경궁 반차도의 일부를 옮겨놓았다. 임금의 초상화를 실은 가마인 ‘어진연’을 관원들이 옮기는 부분이다(사진: 부산박물관 홈페이지).
부산박물관이 내년 2월16일까지 전시하는 ‘황제의 초상화, 서경 풍경궁에 모시다’전 홍보물. 풍경궁 반차도의 일부를 옮겨놓았다. 임금의 초상화를 실은 가마인 ‘어진연’을 관원들이 옮기는 부분이다(사진: 부산박물관 홈페이지).

‘황제의 초상화, 서경 풍경궁에 모시다’. 부산박물관이 내년 2월 중순까지 여는 전시회다.
제목만 보면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모신 것 같지만 초상화가 아닌 ‘반차도(班次圖)’라는 것이다. 반차도는 ‘조선왕조의궤’에 많이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 의례에 참여하는 문무백관(文武百官 문신과 무신 모두를 포함한 신하) 및 각종 기물 등의 정해진 위치와 행사 장면, 행사 내용, 사용된 제물 행렬 배치 등을 설명한 책이다. 반차도는 이런 설명을 도와주는 기록화다.

풍경궁 반차도는 근대복식의 변화와 당시 국가의례 형식과 궁중기록화의 제작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다. 유명한 반차도로는 정조의 수원화성행차도가 있다. 이번에 전시하고 있는 풍경궁 봉안반차도의 정식명칭은 ‘어진예진봉왕서경교시시자경기지풍경궁봉안반차도(御眞睿眞奉往西京敎是時自京畿至豊慶宮奉安班次圖)’이다. 고종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과 순종의 예진(睿眞 왕세자의 초상화)을 경기(京畿 서울 경운궁)에서 서경(西京)에 있는 풍경궁(豊慶宮)에 봉안하러 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풍경궁봉안차도의 모습이다. 반차도는 조선왕조의궤에 많이 실려 있다(사진: 취재기자 주태형).
풍경궁봉안차도의 모습이다. 반차도는 조선왕조의궤에 많이 실려 있다(사진: 취재기자 주태형).

반차도의 도상은 2가지로 나뉘는데 행렬중앙에 중요 인물들이 있고 인물 좌우로 의장구를 들고 있는 관원들이 있다. 맨 앞은 ‘도로차사원’이 길안내를 맡는다. 이들은 임시 관원이다. 그 뒤로 주부군현(州府郡縣) 지방관, 각 도의 행정을 맡은 종2품 관찰사, ‘시종원’(侍從院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비서관원들이 있던 궁내부 산하기관)의 시종, ‘겸주사’(兼主事 문안文案과 도필刀筆 담당관원), ‘향정’(香亭 의장행렬에서 향로를 싣는 가마), ‘용정’(龍亭 옥책이나 금보 따위 나라의 보배를 운반할 때 쓰는 가마), 차비관(差備官 종묘제사, 가례 등 의전을 행할 때 특별한 임무를 맡는 임시관원), ‘분시어’(分侍御 의장과 호위를 맡은 관원), 어진연(御眞輦 임금의 초상화를 실은 가마), ‘산선’(繖扇 왕의 행차 시에 왕의 가장 가까이 배치하는 양산과 부채 어진연 뒤의 백색부채), 향정, 용정, 예진연(睿眞輦 세자의 초상화를 실은 가마) 뒤로 산선이 배치된다. 예진연 뒤의 산선은 푸른 부채를 들어 앞의 어진연의 백색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행렬 양옆으로 있는 의장구 중 맨 처음에 ‘문기’(門旗)를 들고 있는데 이는 왕의 행차나 공식행사에서 왕을 상징하기 위해 가장 앞에 배치한다. 뒤로는 꿩의 깃으로 만든 부채인 ‘치우선’(雉羽扇), 주홍칠을 한 대나무 장대에 도금한 참외 모양의 조각을 세워 꽂은 의장구인 ‘입과’(立瓜), 반대로 가로로 꽂은 ‘와과’(臥瓜), 壽(목숨 수)자 문양을 넣은 부채인 ‘수자선’(壽字扇), 병장기 모양의 ‘어장’(御仗), 별자리 문양을 넣은 깃발 ‘열수기’(列宿旗), 나무로 도(刀)를 만들고 자루 및 칼집은 은 도금바탕에 금으로 봉황 문양을 부착한 ‘의도’(儀刀), 표범무늬 기창(旗槍)인 ‘표미창’(豹尾槍), 그 뒤로 푸른색 바탕의 네모형 부채인 ‘청화방선’(靑花方扇), 덮개의 일종으로 궁궐 밖 행사에 사용하던 ‘오색화산’(五色花繖), 표미창이 뒤 따른다.

반차도 뒷부분 사진이다. 행렬 마지막 신선의 부채가 파란색인 것을 보아 순종의 예진이 보관된 가마인 예진연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진연 앞에 있는 것은  용정이다(사진: 취재기자 주태형).
반차도 뒷부분 사진이다. 행렬 마지막 신선의 부채가 파란색인 것을 보아 순종의 예진이 보관된 가마인 예진연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진연 앞에 있는 것은 용정이다(사진: 취재기자 주태형).

반차도에 있는 어진과 예진은 1902년(광무 6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제작했다. 면복(冕服 왕의 관복)본 익선관본 2본, 군복대본, 군복소본 등 모두 5본이었고, 예진은 복건본이 추가되어 6본이었다. 이것들을 서울 경운궁(덕수궁) 흠문각(어진을 보관 하던 곳)에 보관했다. 이 중 익선관본 어진과 예진 각 1본은 풍경궁 태극전과 중화전에 옮겼다.

왼쪽의 사람이 입고 있는 관복이 왕의 면복이다. 면복은 고려초기부터 조선말기 까지 왕들이 제례(제사 예절)때 입던 옷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왼쪽의 사람이 입고 있는 관복이 왕의 면복이다. 면복은 고려초기부터 조선말기 까지 왕들이 제례(제사 예절)때 입던 옷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황룡포를 입은 순종의 어진이다. 순종이 쓰고 있는 모자를 익선관이라고 하는데 이런 어진을 익선관 어진이라고 한다. 순종 어진 복원 모사도다. 1928년 이당 김은호의 순종어진을 2014년에 복원하여 제작한 모사도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황룡포를 입은 순종의 어진이다. 순종이 쓰고 있는 모자를 익선관이라고 하는데 이런 어진을 익선관 어진이라고 한다. 순종 어진 복원 모사도다. 1928년 이당 김은호의 순종어진을 2014년에 복원하여 제작한 모사도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풍경궁은 서경에 있었는데 서경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1902년(광무 6년) 평양부(平壤府)를 서경으로 승격시켜 부르던 지명이다. 풍경궁은 대한제국의 이궁(離宮)이다. 이궁은 행궁이라고도 하는데 주로 왕이 피서나 피한을 하기 위해 짓거나 통치력의 효과적인 파급을 위해 지방에 곳곳에 지어 돌아다니며 머물기도 하는 궁궐이다. 중국의 한나라는 300여 개의 이궁이 있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서경(평양), 남경(서울), 동경(경주)에 이궁을 짓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대표적으로 정조의 수원화성의 행궁이 있다.

풍경궁은 1902년에서 1903년까지 정전(正殿 궁궐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태극전과 중화전, 편전(便殿 왕이 신하들과 일상적으로 국정을 논하던 건물)인 지덕전, 동궁전(東宮殿 황태자나 왕세자가 거처하는 건물)인 중화전, 정문 황건문 등 주요 전각만 지어진 채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한번도 풍경궁으로 ‘행행’(行幸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 한 적이 없다.

풍경궁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평양에 주둔하여 풍경궁 주변을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1907년 일본군이 근대식 병원인 평양동인의원으로 바꾸었다. 철도 부설 노동자를 치료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했다. 이후 고종이 폐위된 이듬해 1908년(융희 2년)에 풍경궁의 관제(官制 국가통치조직의 관리·운영에 관한 기술적 구조의 일정한 양식 또는 그것을 구비한 조직형태)가 폐지되고 봉안됐던 어진과 예진은 경운궁(덕수궁) 정관헌(어진을 보관하던 건물)으로 이전했다. 풍경궁은 1910년 평양 자혜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3년 평양의학전문학교가 됐다. 지금은 북한의 평양의학대학이 됐다.

1971년 동국대학교가 학생회관을 지으면서 황건문을 철거하고 있다. 황건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내려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사진: 서울신문 2009년 11월 4일.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기사 캡처).
1971년 동국대학교가 학생회관을 지으면서 황건문을 철거하고 있다. 황건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내려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사진: 서울신문 2009년 11월 4일.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기사 캡처).

풍경궁의 건물들은 1935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아있었지만, 이후 한국전쟁 때 파괴됐다.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 1925년 경성 대화정 조계사(동국대학교 자리에 있던 일본식 절)의 요청으로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을 경성으로 가져가 조계사의 산문(절의 정문이자 상징)으로 삼았고, 해방이후 대화정 조계사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서고 정문으로 사용했다. 1971년 학생회관이 황건문 옆에 신축되어서 현대식 건물과의 부조화와 유지보수부실로 인해 철거했다. 이후 주춧돌마저 도서관 근처로 치워지고, 현판은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박물관은 2010년부터 매년 3회씩 개최하고 있는 ‘신수유물(新收遺物)’ 소개전의 올해 마지막 전시인 ‘황제의 초상화, 풍경궁에 모시다’를 2층 미술관에서 개최했다. 전시는 매주 월요일·지정 휴관일을 제외한 화~일요일 오전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하며, 매주 금·토요일은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부산박물관은 부산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번지에 위치하며 부산 지하철 2호선 대연역 3번 출구에서 635m 거리에 있다.

부산박물관의 위치다. 대연역 3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635m를 걸으면 나온다(사진: 부산박물관 네이버 지도 사이트 캡처).
부산박물관의 위치다. 대연역 3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635m를 걸으면 나온다(사진: 부산박물관 네이버 지도 사이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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