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칼럼] ‘시베리아의 힘’과 경의선 그리고 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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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칼럼] ‘시베리아의 힘’과 경의선 그리고 김정은
  • 대표/발행인 이광우
  • 승인 2019.12.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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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발행인 이광우

고려인 3세 유리 텐 러시아 국회의원

저는 지난 2000년 12월에 시베리아횡단열차(TSR:Trans-Siberian Railways)를 이용해 모스크바-예카테린부르크-노보시비르스크-이르쿠츠크-하바로프스크를 답사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일보와 매일신문을 비롯한 전국 6개 신문에 ‘철의 실크로드’라는 제목의 연재물을 게재했습니다. 답사한 거리는 1만km 정도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유리 텐 미하일로비치 러시아 국가두마(국회 하원) 3선 의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경북 안동 출신인 고려인 3세였고, 한국식 이름은 정홍식입니다.

지역구는 바이칼호가 있는 이르쿠츠크였는데, 당시 두마에서 산업에너지 및 건설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음을 접했는데, 여러모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입장에서도 아깝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취재 약속을 하고 두마의 의원실을 찾아갔을 때, 그는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남북한 경의선 연결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열정이 묻어났습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경의선이 연결되면 남한은 이르쿠츠크의 천연가스와 셀룰로이드, 원목 등 원자재를 손쉽게 공급받을 수 있다.”

“푸틴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리가 기술과 자본을 댈 테니 전쟁은 포기하고 경제를 생각하라. 경의선을 통해서 경제적 혜택을 누려라’라고 조언했다. 김 위원장은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중‧러 밀월의 상징, ‘시베리아의 힘’

20년 가까이 지난 일들을 떠올린 이유는 지난 2일 심상찮은 기사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힘(Power of Siberia)’이란 사업을 성사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연결된 천연가스관(파이프라인)을 말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날 가스관 개통식을 가졌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TV화상으로 개통식에 참여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 개통식을 지켜보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사진: 가스프롬 홈페이지).
'시베리아의 힘' 개통식을 화상으로 지켜보는 가스프롬 관계자들(사진: 가스프롬 홈페이지).

푸틴이 지시하고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의 알렉세이 밀레르 사장이 가동 명령을 내리자,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천연가스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화상에 나타난 두 정상의 얼굴을 보니 흡족함이 만면에 묻어났습니다. 이 사안은 그만큼 역사적이고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은 지난 2004년부터 가스프롬과 중국 석유천연가스집단(CNPC)이 함께 진행해 온 것으로,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의 코빅타와 야쿠티야 공화국의 차얀다 두 대형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가스관을 통해 중국 동북지역으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가스관의 총 길이는 약 3000km입니다.

러시아는 앞으로 30년 동안 연간 380억㎦의 천연가스를 중국에 공급할 예정입니다. 전체 공급량은 중국 가스 수요의 10% 정도인 1조㎦이고, 전체 계약금액은 4천억 달러(한화 약 472조 원)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자원 수출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고, 중국은 연료를 원활하게 확보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인 셈입니다.

러시아가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연쇄효과로 인해 낙후된 시베리아 동부지역의 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전 세계에 기술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스프롬의 영문판 홈페이지를 보니 그런 분위기가 여실히 읽힙니다.

홈페이지에 있는 크렘린궁 대변인과 밀레르 사장의 말을 정리정돈하면 이러합니다.

“‘시베리아의 힘’은 영하 62도의 극한적 기후 조건에서 최대의 효율로 진행되었으며, 습지대, 산악지형, 지진대, 영구 동토층, 암석지대 등을 거치며 완성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장비와 최첨단 기술, 친환경 소재가 동원되었다. 가스프롬의 시설이 들어선 지역에서는 1900개의 상설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시베리아의 힘’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러시아 동부지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라서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가속화 할 것이다.”

'시베리아의 힘' 개통식에서 화상으로 인사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 가스트롬 홈페이지).
'시베리아의 힘' 개통식에서 화상으로 인사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사진: 가스트롬 홈페이지).

중국은 중국대로 미국산 천연가스의 수입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좋은 일입니다.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하나 더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안은 나아가 두 나라의 밀월관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척도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가스관 설치는 위험한 도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두 나라가 갈등 관계에 빠졌을 때, 러시아가 이 가스관의 밸브를 잠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러시아는 유럽을 상대할 때 천연가스를 전략적 카드로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러시아는 한때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기우는 듯하자 가스관을 잠그거나 가격을 인상해 위협을 가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거니와, 그런데도 ‘시베리아의 힘’을 가동하기로 했다면,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대단한 믿음이 구축되었다는 뜻일 터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나라는 군사적 측면에서도 돈독한 관계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중국에 조기경보시스템 개발을 지원했다, 12만 8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연합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러시아가 사상 처음 자국 군사 훈련에 중국군을 초대해 합동 훈련을 진행했다, 는 보도가 이미 나왔습니다. 아예 두 나라가 군사동맹 방침을 굳히고 문안을 협의 중이라는 보도까지 가세했습니다.

지난 7월에는 두 나라의 군용기들이 동해와 동중국해 공해상에서 연합 비행훈련을 실시하면서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시베리아의 힘’은 단순히 가스관 연결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 신문 월스트리트저널은 ‘시베리아의 힘’을 두고 “두 강국의 협력을 강화하는 물리적 유대”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 속에는 국제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내포돼 있습니다. 앞으로는 두 강국이 힘을 합쳐서 미국을 상대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는 것입니다.

경의선과 가스관은 핵무기보다 힘이 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북한 간의 경의선 연결과 가스관 연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북한이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지난 2000년 9월에는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경의선 복원 기공식이 열렸고, 오락가락하는 일들이 있다가, 지난해에는 경의선 철도 공동조사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남북관계를 감안한다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저는 ‘철의 실크로드’를 쓸 당시 <김일성 저작집>에 내심 기대를 걸었습니다. 저작집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남북이 철로를 합작할 경우 남조선으로 들어가는 중국 상품을 날라주기만 해도 1년에 4억 달러 이상을 벌 수 있고, 궁극적으로 가만히 앉아서 15억 달러 이상을 벌 수 있다.”

15억 달러는 북한의 1996년 총 교역 규모 19억 8000만 달러의 약 75%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은 ‘경의선 연결’을 유훈으로 남겼고, 김정일은 당시 ‘유훈 통치’의 일환으로 경의선 연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유리 텐 의원의 전언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러시아가 경의선 연결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김일성의 셈법처럼 엄청난 통관료 등을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경의선 연결에 합의했을 때, 사실 저는 더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시베리아의 힘’처럼 가스관을 한반도에 연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도 이 사업을 추진했었습니다.

그러다 김정일이 사망하는 돌발변수가 발생했고, 지리멸렬한 일들이 전개되면서 20년 가까운 세월이 하릴없이 흘러갔습니다.

경의선이 연결되면 평화정착에 이어 통일(전 단계로서의 연방제든)도 성큼 다가오리란 생각을 했습니다. 경의선을 통해 전 세계의 사람과 화물이 오가게 되면 이해관계가 걸린 나라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쟁 위험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러시아철도부(MPS)의 알렉산더 비탈리예비치 첼코 1차관이 저에게 한 말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김정일에게 경의선을 연결하라고 설득했으니) 남북통일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경의선과 가스관이 핵무기 못지않은 전쟁 억지력을 가질 수도 있어 보이는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김일성의 유훈에 관심이 있는지도 역시 궁금합니다. 그러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시베리아의 힘’을 보면서 남북한이 마냥 기회를 흘려보내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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