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만유기(漫遊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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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만유기(漫遊記)
  • 편집인 강성보
  • 승인 2016.02.2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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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한 달간 중국 산동성 칭다오(靑島)에 체류했다. 한 여행사가 주선한 단기 중국어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다.

말이 연수지, 실은 만유(漫遊)였다.

기초도 안된 상태에서 이미 굳어버린 머리를 가지고 겨우 한 달간 중국어를 제대로 갈고 닦을 리 만무하고, 아예 그럴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통쉬에(同學, 학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4개반 20여 명의 ‘학생’들 대부분이 나처럼 현직에서 은퇴한 60대 영감들이라 학업에는 다들 뜻이 없었다. 수업은 월화수목금 매주 5일 하루 6시간씩 진행됐는데, 챠오커(翹課, 땡땡이)치기 일쑤였다. 툭하면 핑계 대고 각자 호텔 방에서 빈둥거리거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칭다오 시내를 배회하곤 했다. 수업에 들어가도 그다지 진지한 자세들은 없었다. 칭다오 대학 한국어 학과 시니어 학생들이 교사로 동원되어 초보적인 회화, 발음 등을 가르쳤지만 서로 알아듣는 어귀들의 교집합이 그리 크지 않은 탓인지 엉뚱한 질문, 대답이 수시로 튀어나와 교실을 폭소 한마당으로 만들곤 했다. 누군가 “봉숭아 학당이 따로 없네”라며 파안대소했다.

한 달 간 연수는 그렇게 웃고 떠들고 즐기며 지냈다. 중국어 실력 늘어난 것은 거의 없다. 시장에서 물건 살 때 제대로 값을 깍을 수 있고, 음식점에서 그 복잡한 중국 요리를 떠듬더듬 그런대로 시킬 수 있게 된 것이 이번 연수 아닌 연수의 소득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은 내 나름 목적이 있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높은 순위에 있는 오악독존(五嶽獨尊), 천하제일 명산 태산에 올라보는 것, 취푸(曲阜)를 찾아 공자님의 가르침을 본향에서 흠향하는 것, 그리고 동양의 아카데미아로 불리는 린츠(臨淄) 직하학궁(稷下學宮)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것 등이다. 이들 모두 산동성 경내에 있으며 칭다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주말 등을 이용해 여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태산 등정은 실패했다. 당시 산동성 일대에 30여 년만의 한파가 덮쳐 태산에 올랐다가는 얼어 죽기 십상이라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취푸 가는 길에 타이안(泰安) 역사에서 먼발치로 웅장한 산세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태산 정상에 올라 천하를 발아래 내려다 보고자 하는 꿈의 실현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취푸는 역시 공자 천하였다. 칭다오에서 3시간 남짓 기차로 달려 취부동(曲阜東) 역에 내리자 대형 공자상이 관광객들 앞에 위용을 과시했고, 시내 곳곳에 공자 유적, 공자 기념관이 널려 있었다. 거리 이름, 건물명 등에도 온통 공자 공(孔)자가 붙어 있었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에 도착했는데,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장권은 50위안. 우리 돈으로 약 1만 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입장권을 살 필요가 없었다. 여권을 제시하자 그냥 입장하라는 것이었다. 공묘뿐 아니라 공림(孔林), 공부(孔府) 등 공자의 유적 모두가 60세 이상은 무료라는 귀뜸을 들은 바 있었는데, 사실이었다. “유교의 본향이라 그런지 확실하게 경로우대를 하는 구만”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남북으로 1.3km, 연면적 50만 평, 대형 방의 개수만 460개에 이르는, 자금성에 이은 중국 두번째 규모의 건축물 공묘를 주마간산 식으로 대충 둘러보고 바로 옆에 있는 공부(孔府)에 들렀다.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중국 유명 백주(白酒) 중 하나인 공부가주(孔府家酒)의 본산지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30위안 짜리 표를 팔고 있었으나 역시 여권만 보여주고 그냥 입장했다. 이곳 경내에서 공자의 74세손을 만났다. 이름은 공번중(孔繁仲). 자(字)는 중평(仲平)이라 했다. 현재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부 경내에 널찍한 아트리에를 갖고 자신의 서예작품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었다. 9척 장신 공자님의 아우라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촌로 같은 수수하고 순박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동양 최고 성현의 후손이 다소 구차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측은지심이 들어 그의 서예 작품이 표구된 두루말이 족자 하나를 샀다. 쓰여진 글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 직역하면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공자 말씀이 아니라 그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노자의 도덕경 중 한 구절이지만, 내가 평소 좋아하는 경구라 선뜻 지갑을 열었다.

린츠(臨淄)에 간 것은 그보다 2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짧은 중국어 실력이었지만 용감하게 나홀로 여행에 도전, 물어 물어 이 역사적 유적지를 찾은 것이다. 칭다오 역에서 기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면 츠보(淄博) 역에 도착하는데, 린츠는 여기서 버스로 약 30분쯤 걸리는 곳에 있다.

린츠는 현재 츠보 시의 한 행정구역 중 하나로 편입되어 있지만 2,000년 하고도 수백여 년 전 춘추 5패, 전국 7웅중 최강국이었던 제(齊)나라의 수도로 중국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 인구가 10만 호(약 40~5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제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주(周) 문왕이 은(殷) 주왕을 멸하고 새로운 황조를 열 때 일등공신 강태공(姜太公)에게 봉읍한 영토였다. 지금의 산동성 일대다. 16대 제환공(齊桓公)때 전성기를 구가했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관중, 포숙아의 도움을 받아서다. 린츠 중심가에 대단한 규모의 강태공 사당이 자리잡고 있고, 멀지 않은 곳에 관중 사당도 있다.

직하학궁(稷下學宮)은 기원전 4세기 중엽 전국 7웅이 각축전을 펼치던 무렵 제나라 전오(田伍) 환공이 천하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도성 린츠성(臨淄城)의 직문(稷門)아래 세운 학문의 전당이다. 제나라 왕실은 최고의 예우로 천하의 인재를 초빙하여 자유롭게 학파를 발전시키고 평등하게 논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전대미문의 학문이 발전한 것은 당연지사. 직하학궁은 단지 제나라의 싱크탱크에 머물지 않고 이후 중국의 찬란한 고대 문화를 상징하는 학술 및 사상의 산실이었다.

맹자, 순자, 한비자, 상앙, 묵자 등 역사상 큰 이름을 남기고 있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벌였고 맹자가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운위하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 바로 이 직하학궁이다.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과 장의도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그리스 아테네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개설됐는데, 직하학궁은 동양의 아카데미아로도 불린다. 직하학궁은 진시황이 제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직후인 기원전 221년 개설된 지 130년만에 폐쇄됐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단행하고 산동성 일대를 수시로 순시한 것은 중국 대륙의 서쪽 변방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유목문화에 가까웠던 진나라의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당초 린츠 성터와 직하학궁 유적지를 직접 찾아 당시의 영광을 음미해보려 했으나 이미 날이 어둑해진데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계획을 바꿔 직하학파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는 ‘제국(齊國)역사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치 큰 성곽을 연상케 하는 박물관 안에는 산동성 일대의 오랜 역사를 담은 각종 유물과 서적, 인물 흉상 및 미니어처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웬만큼 중요한 유물에는 한국어 설명문이 붙어 있는데 번역이 형편없었다. 예컨대 ‘춘추시대’의 경우 “봄과 가을 시기”로 표기되어 있었다. 맞춤법이 틀린 것은 부지기수였다. 한글 자모는 틀림없는데, 한국인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서인지 15개의 전시관에 평시에는 불이 꺼져 있다가 관람객이 들어서면 불이 켜지고 다시 나가면 꺼지는 점소등 시스템도 특이했다. 제나라 뿐 아니라 후리(后李)문화, 대원구(大沅口)문화 등 청동기, 신석기 시대의 산동성 일대 문화 유물까지 전시되어 있는 바람에 직하학궁 기록은 소략하게 전개되어 있었다.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의 조상(彫像)과 학문 계보 등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었다.

건성건성 각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이곳 제국 역사박물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블레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이곳 린츠를 방문해 찍었다는 사진이었다. 그 설명에는 <전국책>, <사기> 등의 옛 문헌에 실린 축국(蹴鞠)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린츠가 2005년 5월 FIFA로부터 고대 축구의 발상지라는 인증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무슨 희한한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박물관 내 기념품 전시관에서 <제도축국(齊都蹴麴)>이란 제목의 책을 한 권 샀다. 백화문화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으로 제문화총서(齊文化叢書)중 한 권이라는 인증서가 붙어 있다. 나중에 칭다오 호텔에 돌아와 사전을 옆에 두고 하나하나 찾아가며 읽어보다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다. 책에 따르면, 기원전 4~5세기 대도시 린츠에서는 각종 스포츠가 발달했는데, 귀족층 뿐 아니라 일반대중에까지 보급되어 성행했던 종목이 축국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축국은 동물의 위장에 부드러운 솜가지 등을 넣어 묶고 꿰멘 뒤 이를 발로 차는 경기였다고 한다. 경기 규칙도 지금의 축구와 비슷했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었다. 축국은 이후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등 역대 중국 왕조에서도 성행했으며 고려,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데 정작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이 축국이 어떻게 시발됐는가 하는 점이었다.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 전. 당시 산동성 일대에서 문명을 가장 먼저 일으켰고 가장 강성한 세력을 가진 것은 동이족이었다고 책은 기술한다. 태호(太昊). 치우(蚩尤), 소호(少昊)씨, 강(姜)씨 등이 동이족의 주요 지도자였다. 큰 활을 쏘는 동쪽 지방의 사람이란 뜻의 동이(東夷)란 이름도 여기에서 연원한다. 동이족은 당시 월등한 군사 기술을 바탕으로 황하 중류 일대에서 세력을 가진 화하족(華夏族, 지금의 한족)을 압도했다고 한다. 특히 치우는 화하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얼굴)의 무시무시한 형상을 가진 치우는 화하족과의 전투에서 구름과 바람을 일으키는 신통력과 탁월한 전략으로 백전백승을 거둔 장수였다. 그러다가 당시 화하족의 지도자 황제(黃帝)에게 일격을 당해 전사하는데 그것이 중국 고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탁록의 전투였다. 황제는 혹여 치우가 다시 부활할 것이 두려워 사지와 머리를 따로 분리해 방방곡곡에 묻었다. 그리고 그동안 치우에게 당한 설움을 분풀이 하기 위해 치우의 위장을 도려내어 이물질을 채운 뒤 공으로 만들어 부하들로 하여금 발로 차고 다니도록 햇다고 한다. <제도축국>은 이 기록이 1973년 지금의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한 백서(帛書)에 나와 있다고 밝히고, 이것이 전설에 불과한 것이지만 축국의 기원일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이 대목을 읽다가 문득 떠올린 것이 2002년 월드컵 당시 세계를 진감시킨 한국의 응원단 붉은 악마였다. 그 때 우리의 젊은이들은 너나 없이 치우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려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당시 붉은 악마를 형상화한 기획자가 위 전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그렇진 않을 것이다.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왕이 출전할 때 치우의 형상이 그려진 깃발(독기, 纛旗)를 앞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에서 힌트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지금 서울 성동구에 있는 뚝섬은 이 독기의 독(纛)자가 변음된 것이다. 제방을 뜻하는 ‘뚝’과는 무관하다).  

아무튼 산동성은 고래로부터 동이족의 활동 무대였다. 문(文)보다 무(武)를 숭상하는 오랜 혈통은 육도삼략을 만든 강태공,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제나라를 최대 강국을 만든 관중으로 이어진다. 이들 모두 제나라 사람이며 동이족이다. 우리 한민족과 핏줄의 끈이 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동성에서 만난 여러 중국인들 모습이 우리 한국 사람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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