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정치가 김인애 씨의 꿈...“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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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가 김인애 씨의 꿈...“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만들자”
  • 취재기자 정수아
  • 승인 2019.11.20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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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민중당 준비위원장 ‘김인애’ 씨, 사회약자 위한 1인 시위하며 청년 정치에 헌신
비정규직, 반값 대학 등록금, 하청근로자, 미국 방위비분담금 문제에 발 벗고 투쟁
내년 국회의원 출마 위해 ‘정책제안운동’ 이끌 채비에 분주
청년정치가 김인애 씨는 경성대부경대역 3번 출구에서 몇 달 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 김인애 제공).
청년정치가 김인애 씨는 경성대부경대역 3번 출구에서 몇 달 째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 김인애 제공).

한 젊은 여성이 매일 아침마다 경성대부경대역 3번 출구에서 ‘날강도 미국! 방위비분담금 인상 저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11월의 끝자락, 쌀쌀해진 날씨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젊은 나이에도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부산 청년민중당 준비위원장 김인애(28) 씨다.

현재 인애 씨가 활동하고 있는 청년민중당은 민중당 안의 청년조직이다. 청년민중당은 청년들이 당 활동의 주인으로서 청년정치에 중점을 두고 활동한다. 청년민중당은 청소년, 대학생,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전국에 총 2200명에 가까운 당원이 활동 중이다. 현재 서울시와 경기도에는 시도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부산, 광주, 전북, 울산, 경남, 강원, 제주에서는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인애 씨는 “부산 준비위원회에서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고, 또 다른 직책으로는 민중당 부산시장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인애 씨는 현재 부산 청년민중당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수아).
김인애 씨는 현재 부산 청년민중당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수아).

제주도에서 2남 2녀 중 장녀로 1990년에 태어난 인애 씨는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2009년에 대학에 진학하려고 하니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 등록금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국립대인 부산대학교 기계공학부에 진학한 것도 부모님의 등록금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함이었다.

‘왜 대학 등록금이 이렇게 비쌀까,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게 맞는 걸까’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온 인애 씨는 22세 대학교 4학년 때, 어린 나이에 삭발을 하고 당시 사회 현안이었던 대학 반값 등록금 투쟁에 열정을 다해 참여했다. 그리고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대학 반값 등록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녀를 포함한 대학 반값 등록금 투쟁에 힘쓴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대학교에 국가장학금이 생기고, 인애 씨의 동생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반값 등록금 혜택을 보게 됐다. 인애 씨는 “정치라는 게 활동을 하면 국민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반값 등록금 투쟁을 하면서 정치에 대한 효능감을 느껴 많은 정치 중에서도 청년정치 분야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반값등록금 투쟁 이후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던 인애 씨는 청년의 직접정치를 위한 정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정규직, 청년정치를 위해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그녀는 창당발기인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2017년 10월 15일 민중당을 만들었다.

청년정치란 청년들의 시선으로 본 사회의 문제들을 과감히 사회 이슈화하는 것이다. 대학생 학비 문제, 청년들의 최저임금 문제, ‘주한미군 세균무기 실험실’ 문제, 그리고 ‘비정규직’ 등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고, 집회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 예시다. 인애 씨는 “청년민중당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집회에 참여하고, 노동자들과 연대해 마을의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인애 씨가 외주화 중단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사진: 김인애 제공).
김인애 씨가 외주화 중단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사진: 김인애 제공).

인애 씨는 청년민중당에서 활동하면서 ‘정책제안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책제안운동은 4000명 정도의 청년들을 만나서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개개인의 의견을 들어보는 활동이다. 인애 씨는 정책제안운동을 하면서 우리나라 청년들이 대중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취업 문제부터 통일 문제까지 청년들은 정말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분야에서 제대로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인애 씨는 “학력이나 나이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농민은 농민 문제 해결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정책제안운동은 민중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계기”라고 밝혔다.

‘정책제안운동’을 하면서 당원들이 사람들의 여러 의견을 모아 정리해서 청년민중당이 발행한 수첩(사진: 취재기자 정수아).
‘정책제안운동’을 하면서 당원들이 사람들의 여러 의견을 모아 정리해서 청년민중당이 발행한 수첩(사진: 취재기자 정수아).

청년민중당에서 활동하고, 집회에 참여하며, 1인 시위를 하면서 인애 씨는 느끼는 점이 많다. 그녀는 “부산 초량에 부산 시민들이 직접 ‘항일 거리’ 현판을 설치하거나 1억이 넘는 모금을 모아 소녀상을 세우는 것을 보고, 부산 시민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 없다 하지만, 다들 이런 정치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멋있다”고 전했다.

김인애 씨가 하청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추모집회에서 발언 중이다(사진: 김인애 제공).
김인애 씨가 하청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고 김용균 추모집회에서 발언 중이다(사진: 김인애 제공).

또한 인애 씨는 투쟁을 하면서 ‘상실의 눈물’을 많이 흘렸다. 2019년 1월 5일, 부산 서면에서 고 김용균 추모집회가 있었다. 고 김용균 씨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는 석탄을 운반하는 컨베이어벨트에 낙탄이 쌓여있는지 확인하는 순찰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규정상 정규직의 역할인 낙탄을 ‘제거’하라는 지침을 받게 됐고, 제거 도중 몸이 컨베이어벨트에 빨려 들어가 사망했다. 인애 씨는 김용균 씨처럼 숨진 수많은 하청노동자들 편에 서서 발언했다. 고 김용균 추모집회에서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노동자들을 위해 투쟁하는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비정규직을 없애고, 돈만 아는 놈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 그런 나라가 될 때까지 투쟁하겠습니다. 비정규직 철폐의 그 길에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세월호 촛불집회, 방위비분담금 1인 시위처럼 정치 쪽에서 일을 하는 것이 어느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인애 씨는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활동한다. “1인 시위를 하는 나를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젊은 애들이 역사를 아냐, 뭘 아냐’고 무시할 때도 있지만, 옆에서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아 청년 정치 활동을 하면서 딱히 힘든 점은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20대 초반에는 어려운 길로 가려 하는 인애 씨를 걱정하던 부모님도 정책이 바뀌고 삶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지금은 인애 씨를 응원하고 있다.

내년 4월에 국회의원 출마를 목표로 삼은 인애 씨는 ‘정책제안운동’을 다시 해보려 준비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의견을 준 시민들과 꾸준히 연락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다시금 준비하는 정책제안운동에서 시민들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가져 소모임을 유지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인애 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촛불 집회에도 앞장서 참여했다(사진: 김인애 제공).
김인애 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촛불 집회에도 앞장서 참여했다(사진: 김인애 제공).

인애 씨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같이 만들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인애 씨는 대학 반값 등록금 투쟁을 하기 전, 한진중공업 집회에 가서 노동자 투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스팔트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며 울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며 같은 노동자인 아버지를 떠올렸다. 2014년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본가인 제주도에서 재학 중인 목포대학교까지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동생을 떠올렸다. 인애 씨의 동생 또한 제주-목표를 왕복하다 세월호 학생들처럼 침몰사고를 당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절실히 느끼고 가족처럼 아파하는 인애 씨는 오늘도 그들을 위해 열심히 싸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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