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가족 위해 버틴 삶이었다”...잔주름만 남은 어느 할머니 인생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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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가족 위해 버틴 삶이었다”...잔주름만 남은 어느 할머니 인생 스토리
  • 취재기자 이예진
  • 승인 2019.11.12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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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가장, 아내, 엄마, 장사꾼으로 힘든 삶의 연속
- 할머니 남은 소망은 “자식들 다 컸으니 이제 불우이웃 도우며 살고 싶다”

꿈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살다가 꿈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많다. 그 옛날 자식과 가정에 헌신한 우리 어머니란 여인들의 삶이 그랬다. 여기 평생을 자기 자신보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 이애경(75, 가명) 할머니의 삶이 그랬다. 어느 때는 한 집안의 장녀로서, 어느 때는 한 가정의 아내로서, 또 한 때는 자식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이애경 할머니는 “내 인생에서 나를 위해 살았던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지나고 나니 다 소중한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흰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이애경 할머니의 옆모습.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사진: 취재기자 이예진).
흰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이애경 할머니의 옆모습.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사진: 취재기자 이예진).

1945년 이애경 할머니는 부산에서 그리 부유치 못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생활력이 무기력했던 아버지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떠맡았던 어머니, 그리고 밑으로 여동생 세 명과 어린 남동생까지, 총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았다. 대식구 집안이었기에 어머니 혼자서 하는 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어릴 적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소녀 이애경은 자신도 돈을 벌겠다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집 앞에서 고구마 장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고구마 장사는 생각보다 수입이 괜찮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초등학교 졸업한 후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집안 형편상 학교 다닐 돈이 없었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애경 할머니는 “학교를 계속 다녀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지만, 일하러 나간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해서 차마 중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약 5년간 고구마 장사를 하고 보니, 할머니는 야무진 장사 솜씨가 생겨났고, 더큰 장사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러나 당시 나이 19세였던 이애경 할머니는 부모의 중매로 결혼을 해야 했다. 1970년대에는 부모가 주선하는 중매로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을 때였고, 자신 또한 이 때문에 장사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장사 솜씨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휘됐다. 바로 남편 사업을 돕는 조력자로서 빛을 발한 것이다. 결혼 후 아는 지인과 함께 장사하던 남편에게 할머니는 직접 자신들만의 사업을 시작해보자고 건의했고, 부부는 소매업에 종사해 큰 이익을 거뒀다. 그녀는 “포기했던 나만의 장사에 대한 꿈을 남편 사업을 도우면서 아쉽지만 나름 꿈을 펼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번갈아 온다고 했던가.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 다가와 그녀를 괴롭혔다. 23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남편의 외도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당시에 심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그때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 자식들이 있어 시간을 두고 참고, 견디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자식들을 두고 맨몸으로 집에서 나왔다.

외도 사실을 알고 참고 지낸 지 10년. 그녀는 32세의 나이로 이혼하고 부산에서 한 옷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재정적으로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기에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러던 와중 갑작스럽게 전 남편 사업이 기울어 아버지 밑에 있던 아들 세 명이 그녀를 찾아왔고, 그때부터 할머니는 아들 셋을 혼자 힘으로 키워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식들 밥 차려주고, 학교 보내고, 서울에 가서 물건을 가지고 다시 가게로 와 손님들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 매일 반복된 그녀의 일과였다. 이애경 할머니는 “그런 생활을 거의 10년 가까이 했는데, 그때는 하루하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단했다”고 말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애경 할머니의 손(사진: 취재기자 이예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애경 할머니의 손(사진: 취재기자 이예진).

그녀는 그렇게 몇 년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옷가게를 운영했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할머니는 어느 정도 돈을 모으게 됐고, 그 돈으로 모든 자식을 공부시켰고 결혼까지 무사히 시킬 수 있었다. 자식들이 모두 결혼하고 자신이 혼자 남게 됐을 때, 이제 자신도 누구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할머니에게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아들 사업 보증으로 인해 전 재산인 자신 소유 집 한 채를 처분해야 했던 것이다. 65세, 예순이 넘은 나이에 한순간에 집을 잃고 방 한 칸 구할 돈도 사라진 그녀는 한동안 다른 자식들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완전한 밑바닥이었다”고 말했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녀는 항상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 성실하게 살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다. 다시 무일푼이 된 할머니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집 주변에서 공병을 주워 팔기도 했고, 주위 사람들의 잔심부름이나 집 청소를 해주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우뚝이처럼 어엿한 자신만의 집을 다시 장만하게 됐다. 집을 잃고 난 후 약 10년만인 75세에 할머니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애경 할머니는 “나를 믿고 항상 열심히 살았더니, 좋은 일과 좋은 사람들이 항상 내 곁에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올해로 75세를 맞은 그녀는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이애경 할머니는 자신이 지나온 삶을 뒤돌아봤을 때, 힘들었고 불행이 잦았지만, 그래도 멋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남은 인생을 더 열심히 살고 싶다. 형편이 여유롭다면 조금씩이라도 기부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베풀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그녀가 추구하는 인생 목표다. 할머니는 현재 이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실제로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매달 조금씩 기부도 하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도 조금이나마 베풀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이애경 할머니 자식들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제몫을 하면서 평범한 삶을 지내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약간의 생활비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할머니를 힘들게 했던 전 남편은 언 듯 들으니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여로>라는 노래를 들으며 가끔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 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길 때/봄나비 나래 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나르는 낙옆 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네/무심한 강물 위에 잔주름 여울지고/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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