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으로 범어사 손님 사로잡던 수정집 할머니의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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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으로 범어사 손님 사로잡던 수정집 할머니의 뒤안길
  • 취재기자 고여진
  • 승인 2019.11.12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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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수술 후 건강 나빠져 50년 음식 장사 접어
오리소금구이 못 잊는 단골들, ‘문 열었냐’ 전화 오는 게 가장 큰 안타까움
매일 범어사 길 산책하며 지난 날 회상하는 게 일상

“범어사에서 내 음식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거다.” 부산 금정구 범어사로 향하는 등산로에서 김해옥(74, 부산시 금정구) 할머니는 조촐한 음식 장사를 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고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이곳은 일명 ‘수정집’이라고 불렸다. 김해옥 할머니의 오랜 일터이자 쉼터였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고 했다. 그 수정집이 최근 문을 닫았다. 식당일이 할머니의 근력을 힘에 부치게 했다. 수정집과 할머니의 사연을 쫓아가보자.

한때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범어사 앞 수정집이 수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이제는 문을 닫고 영업을 정리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한때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범어사 앞 수정집이 수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속에 이제는 문을 닫고 영업을 정리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김해옥 할머니의 ‘수정집’은 자신의 고향인 경남 창녕에서 처음 시작됐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음식을 잘하던 어머니 밑에서 곁눈질로 음식을 배웠다. 조금씩 배운 음식을 엄마가 일손이 바쁠 때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과 남매들에게 해주면서 점점 음식 실력을 쌓아갔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은 결혼 후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머릿속으로 요리가 번뜩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이 요리 뿐이기도 했고, 내가 요리로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할머니는 속마음을 전했다.

그후 1982년 36세 때,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오고 난 후로 할머니에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소소하게 시작했던 장사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씩 모은 돈으로 번듯한 건물에서 식당을 차리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시련으로 가세가 기울어져 결국엔 그곳을 나와야만 했다. 김해옥 할머니는 그 일을 회상하며 “많이 아쉽고 눈물이 나요.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나는 그때 깨달았어요”라고 말했다. 그 후, 할머니 식당은 부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딸애 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기도 했고 부산 영락공원 밑 길거리에 식당을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떠돌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범어사 계곡이었다. 그게 1990년의 일이다.

범어사 등산로를 걷다보면 수정집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범어사 등산로를 걷다보면 수정집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수정집 대표 메뉴는 도토리묵과 오리 소금구이다. 신선한 묵과 할머니가 직접 만든 새콤달콤한 특제 양념, 그리고 싱싱한 채소들이 들어간 도토리묵은 산에 올라가던 등산객들의 입맛을 한껏 돋워줬다. 수정집의 단골손님이었던 장춘돌(63, 부산 금정구) 씨는 “한 번 먹으면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고 아주 맛이 일품이었어요. 이모 손맛에 내가 10년 가까이 여기를 찾았지요”라고 말했다.

도토리묵에 가려진 또 다른 할머니의 ‘숨은 무기’는 오리 소금구이다. 대표적인 메뉴는 도토리묵이지만 특별히 손님들이 요청할 때만 만들어지는 메뉴라서 숨은 무기가 됐다. 생오리고기에 갖가지 양념을 하여 잡내를 제거한 오리를 양파와 마늘, 그리고 청양고추와 함께 불판에 올려준다. 할머니는 “음식이 거추장스러울 필요가 없어”라며 “나는 담백함으로 승부하고 손님들은 맛있게 즐겨줬지”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오리고기가 불판에서 익어가고 있다. 사진은 영업을 닫기 전 활영된 것이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할머니의 오리고기가 불판에서 익어가고 있다. 사진은 영업을 닫기 전 활영된 것이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식당 위치를 자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단골들이 식당을 다시 찾아와 주는 이유는 할머니의 노력 덕분이다. 아직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을 사용하는 할머니는 자주 오는 손님들의 전화번호와 식당 운영에 필요한 도매상들 번호를 수첩에 기록해 놓았다. 휴대전화에도 전화번호를 등록할 수 있지만, 굳이 수첩에 적는 이유에 대해 할머니는 “나는 이게 더 정감이 가요. 손으로 쓰면 더 정성이 들어가지. 손님들이 내 상황도 모르고 왔다가 그 날 장사를 안 하면 미안해 할 것 같아서 옮길 때마다 꼬박꼬박 전화를 드렸지요”라고 말했다. 수첩은 할머니의 정성과 함께한 세월을 증명하듯 색이 바래고 헤져있다.

할머니 수첩 내부에는 손님들과 도매처의 번호로 꽉 차있다. 원래는 이름과 번호들이 보이도록 적혀 있지만, 개인정보라서 기자가 안 보이게 처리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할머니 수첩 내부에는 손님들과 도매처의 번호로 꽉 차있다. 원래는 이름과 번호들이 보이도록 적혀 있지만, 개인정보라서 기자가 안 보이게 처리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식당 일을 하면서 할머니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역시 음식 맛이었다. 요리하기엔 환경이 열악한 산이기 때문에 할머니는 매일 깨끗한 물과 요리재료를 가방에 짊어지고 산을 오르내렸다. 가방 속에는 파전 반죽, 도토리묵, 얼음 등 다양한 재료로 가득 찼다. 할머니의 하루 장사를 책임져주는 가방의 끈이 끊어지기도 하고 무게를 견디지 못해 길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가방을 꿰매어가며 다음 날 장사를 준비하곤 했다. 모진 세월이었다. 할머니는 “가방이 너무 무겁지만 이렇게 안하면 산에서는 금방 상하고 맛이 없어져서 서둘러 산을 오르곤 했지요”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음식재료를 넣고 산을 올랐던 할머니의 가방 모습(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수십 년 동안, 음식재료를 넣고 산을 올랐던 할머니의 가방 모습(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터진 가방을 꿰매어 놓은 자국이 가방에 선명하다. 그야말로 수정집 역사의 산 증인이 따로 없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터진 가방을 꿰매어 놓은 자국이 가방에 선명하다. 그야말로 수정집 역사의 산 증인이 따로 없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음식을 파는 것만이 내 일은 아니었어요” 자신은 장사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서로의 일상을 듣기도 하고 몰랐던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할머니의 식당 손님 얘기는 이야기보따리 그 자체였다.

범어사로 가는 길목에 식당이 있어서 석가탄신일에는 유난히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까닭에 싸움도 자주 일어났는데, 한 번은 할머니는 손님들 싸움을 말리다가 눈 옆을 주먹으로 맞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맞고 돌바닥에 누워있는데 여기서 장사를 그만해야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장사를 하면 즐거운 일도 많지만 당황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나서 감당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고 속마음을 밝혔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이후에도 장사를 쉬지 않고 문을 열었다. 할머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런 일이 있어도 나가는 거 보면 내가 참 일을 좋아했나봐”라고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도 고비가 찾아왔다. 건강악화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원래 다리가 불편했던 할머니는 양쪽 다리 모두 인공관절 수술을 한 상태다. 처음에는 경과가 좋아서 장사를 계속 이어갔지만, 이제는 무리해서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로 악화됐다. 결국, 수정집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쉬는 동안 할머니는 약 50년간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봤다. “장사를 하며 많은 사람과 알게 됐고 내 음식을 통해 배불리 먹고 돌아가는 사람을 보는 것은 굉장히 뿌듯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빽빽한 나무들과 깨끗한 공기 속에서 있으면 온종일 일로 몸은 피곤해도 정신은 맑고 상쾌했지”라고 말했다.

김해옥 할머니는 자신의 식당 인생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김해옥 할머니는 자신의 식당 인생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고여진).

할머니는 식당을 접은 후 몸은 편해졌지만 씁쓸하고 안타까운 점도 많다. 손님들이 오늘 장사하느냐고 전화 올 때, 그 때마다 미안하다며 전화를 끊는 것이 가장 아쉽다. 일을 하면서 자신이 만든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가는 손님들을 보며 할머니는 뿌듯함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 일을 더는 할 수 없다.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할머니는 그래도 범어사는 계속 찾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해온 일을 어떻게 한 번에 그만두겠어요. 식당 문은 닫았어도, 범어사를 찾아 올라가면서 그 공기라도 마시며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할머니는 체력이 닿는 한 범어사는 자주 방문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곳은 나의 인생이고 이제는 쉼터이니 앞으로의 여생은 장사꾼이 아닌 범어사 방문객으로 살 거예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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