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 색깔과 장영실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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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 색깔과 장영실 전기
  • 시빅뉴스 대표 정태철
  • 승인 2016.02.01 0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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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대학 졸업반일 때 인턴으로 은행에 들어갔다가 그 능력을 인정받고 비정규직 텔러로 특채됐다. 그 후에도 그녀는 특유의 친화성과 성실함으로 정규직 승진, 대리, 차장, 지점장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여성 은행 임원 자리에까지 올랐다.

지금부터 약 10여 년 전, 나는 이 여성의 이런 성공 스토리를 한 인터넷 잡지에서 읽고 그 기사를 카피해서 학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다. 이 기사는 우리 학생들에게 배울 게 많을 것 같아서였다. 다음날, 그 게시판에는 익명의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교수님, 차라리 ‘장영실 전기’를 올리시지요.”

이 글을 접한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듯해서 올린 글인데, 왜 이 학생은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달았을까? 나는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기분이 멍했다. 당시 나는 한 학생의 뜻밖의 반항적인 댓글을 두고 며칠 간 끙끙 앓았다.

문득 과거의 이 에피소드가 다시 생각난 이유는 요즘 KBS에서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방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영실은 관노의 신분으로 태어나 나중에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아 종3품이란 관직에까지 오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10여 년 전 당시에 내가 학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여성 은행원 이야기는 학생 입장에서 보면 부모들로부터 “너는 왜 남들처럼 못하냐?”고 온갖 수모를 당해가며 신물 나게 들은 개천에서 용 난 얘기, 혹은 인생 역전 성공 신화였다. 나의 게시판 글은 주눅이 들은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기는커녕 그들의 기를 다시 한 번 죽이는 얘기였던 것이다. 당시 나는 학생 입장을 깊게 생각지 못했다. 그 댓글을 올린 제자에게 이제야 미안함을 전한다. 그날 이후, 나는 교훈식 설교는 학생들에게 효과가 별로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10여 년 전보다 최근의 젊은이들은 더 마음이 편치 않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태어날 때 어떤 색깔의 수저을 물고 나왔는지에 따라서 미래가 결정된다고 믿는 풍조가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현실을 ‘헬조선’이라고 비하하는 현상도 널리 퍼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나라를 벗어나서 외국에서 살아보자는 탈조선 엑소더스 이민 행렬도 늘고 있다고 한다(<시빅뉴스> 2015년 10월 27일자 영상뉴스). 게임 상에서나마 신분상승의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지키우기’ 같은 모바일 게임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시빅뉴스> 2015년 12월 23일자 기사).

이 세상에 문제 없는 사회는 없다. 한 사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원인이 사회의 잘못인지 개인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이 무수한 철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찾고 헤매는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이때 사회 문제의 원인을 사회 전체에서 찾으려는 것을 구조주의라 하고, 개인에게서 찾으려는 것을 개인주의라 한다. 과연 수저 색깔에 따라 우리 젊은이들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은 문제의 가정에서 문제아가 나온다는 교육 이론처럼 구조나 환경이 인간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다. 이를 사회과학에서는 구조결정론, 혹은 환경결정론이라 부른다.

그 반대의 관점인 개인주의는 사회 문제는 사회 구조 탓이 아니라 각 개인이 그 사회에 어떻게 적응하느냐 하는 개인차의 문제라고 본다. 이는 아무리 문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한 개인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문제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인간의 역사를 지배한다는 주의론(主意論, voluntarism)이라고도 한다. 수저 색깔로 사람의 인생이 출발도 하기 전에 결정된다는 수저론은 개인주의적 관점, 즉 주의론적 관점에서 보면 꼭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과연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구조를 탓하라고 가르칠 것인가(구조결정론), 아니면 개인의 역량 부족을 탓하라고 가르칠 것인가(주의론)? 학계는 이런 류의 질문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식의 이분법적 지식, 또는 이항대립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의 정신과 육체, 철학의 주관과 객관, 물질과 이념, 논리학의 이성과 감성, 경영학의 동양과 서양, 물리학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생물학의 진화론과 창조론, 정치학의 보수와 진보, 민주와 반민주 등처럼 모든 지식은 이분법적 개념 위에서 형성돼 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회 현상이 두 개의 대립적 개념 중 어느 한 쪽에 속하는지를 구분해야했고, 그렇게 하도록 배웠다. 이게 지식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다. 20세기까지 대부분의 사회과학은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대립적인 관점 중 하나로 사회를 분석하고 이해했다. 그런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분법적 지식 체계를 해체하고,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탈피해서, 대립된 양극단의 관점을 통합적으로 봐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고 사회 문제가 제대로 풀린다고 주장하는 사상의 조류가 등장했다. 이게 바로 포스토모더니즘이다. 이들의 사회 이해 방법론이 바로 관점의 ‘융합(convergence),’ 또는 통합이다. 퓨전이라고도 한다.

분명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적 환경이 세습되는 경향이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수저 색깔이 젊은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 현상은 다분히 구조적 문제다. 구조적 문제 해결은 대부분 기성세대 몫이다. 교육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나서는 게 맞다. 젊은이들도 수저론 같은 구조적 문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젊은이들에게 구조에 순응하라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구조만 바꾸면 다 된다는 주장도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헌 구조를 바꿔 제3의 새 구조를 만들었다고 해도, 개인차에 따른 또 다른 불평등이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구조가 어떠하든, 젊은이들에게 개인 역량을 키워 장영실이나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 신화를 만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사는 것처럼 이기적인 행위는 없다. 일부 개인은 살아남아도, 대다수 사회 구성원을 괴롭히는 사회 모순은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사람 생명보다 돈을 밝히는 의사, 사회 정의보다 자신의 ‘끝발’을 더 좋아하는 검사는 자기 잘 나고 부모 잘 만나서 출세했을지 모르지만, 모두 사회악이다. 그래서 더불어 사는 사회와 무관한 개인의 역량 강화는 양심이라는 가치를 동반해야 한다. 결국, 젊은이들은 구조적 모순은 합리적으로 따져야 하고, 동시에 개인적 역량은 양심이라는 가치와 함께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융합적 생존 방식’이다.

젊은이들 중 일부는 사회 구조나 자신의 능력 탓보다도 자신에게 신분의 한계를 쥐어준 부모에 대한 원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물질적 후원은 유한하다. 재벌이 아닌 부모한테 무한한 물질적 후원을 바라고 그게 부족할 때 부모를 원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자식에게 부모는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극복하는 방법은 부모보다 좀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에 따른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도 내 부모를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나서야 자식의 지위 향상이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진정한 바람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젊은이들은 현실이 워낙 힘들다 보니 닥치는 대로 남을 원망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부모 탓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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