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한민족은 백의민족? 배달민족? 바보야, 우린 ‘온돌민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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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한민족은 백의민족? 배달민족? 바보야, 우린 ‘온돌민족’이야!”
  • 편집위원 정태철
  • 승인 2019.11.0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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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 세계 최초 온돌 통사 ‘한국 온돌의 역사’ 출간
세계 온돌 유적 중, 한국만이 온돌의 현대화 성공, “그래서 우리는 온돌민족”
한국 온돌 특징과 그 민족적 생활양식에 끼친 의미 정리했다는 평가 받아

'발해사 연구 거목'의 '한국인 생활사' 꿰뚫은 역작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우리나라 발해사 연구의 거목이다. 그에게 발해는 민족적 아쉬움의 영역이었다. 고구려의 장엄한 기상과 광대한 영토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발해와 통일신라라는 남북국시대로 겨우 유지됐다. 그러나 926년 발해 멸망 이후, 우리는 고구려 고토 만주 대부분을 상실했고 한반도로 위축됐다. 그게 바로 송기호 교수의 민족적 아쉬움이었고, 동시에 발해사 연구에 천착한 계기가 됐다.

평생에 걸친 그의 발해 연구는 엄청난 저술로 열매를 맺었다. <발해의 역사(역서)> <발해를 찾아서> <발해정치사연구> <러시아 연해주와 발해 역사> <발해를 다시 본다> <발해고(역서)> <발해를 왜 해동성국이라고 했나요?> <발해 사회문화사 연구> 등이 그의 노고를 보여준다.

어느 날부터 송기호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또 다른 아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 역사가 학생들의 암기력 측정 수단이 되고, 궁중 암투와 붕당 사화라는 정치적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도전한 분야가 한국인에게 다가가는 역사, 사람 냄새 나는 역사, 즉 생활사였다. 송 교수는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풍습과 생각을 다룬 <이 땅에 태어나서>부터, 한국인의 가족과 의식주를 다룬 <시집가고 장가가고> 등 7권에 이르는 ‘우리 역사 읽기 시리즈’를 완간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일종의 ‘별건 성과’가 온돌이라는 생활사 연구였다. 그의 고귀한 한국사 연구 여정의 정수 <한국 온돌의 역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시빅뉴스가 송기호 교수에게 온돌 연구 과정, 결과, 그리고 의미를 물었다. 송 교수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내왔다. 시빅뉴스 독자와 함께,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도 아니고, 배달민족도 아니며, ‘온돌민족’이라고 불러야 가장 정확하다는 그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온돌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해달라.

“처음에는 발해 온돌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발해 온돌은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이란 사실에는 연구자 간 대체로 동의하는 상황이었지만, 고구려 온돌의 유래에는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었다. 20여 년 전, 러시아 학자와 이 문제를 논의할 적에, 그는 고조선으로부터 온돌이 시작되었다고 답해서, 그 의견에 대해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점을 간직하고 됐고, 몇 년 뒤에 내가 한 번 직접 온돌의 고조선 기원을 밝혀보겠다고 나서게 됐다.

터키 에페수스의 하이퍼코스트(온돌 유적의 일종) 유적 앞에 선 송기호 교수(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터키 에페수스의 하이퍼코스트(온돌 유적의 일종) 유적 앞에 선 송기호 교수(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학생 시절에 친구 부친 묘소를 방문했다가 숭실대학 발굴팀이 부근에서 집자리 발굴을 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잠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이때 온돌이 유적에서 발굴됐으나, 당시에는 중요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경험이 20여 년 뒤에 나를 온돌사 연구로 이끌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온돌에서 생활하면서, 산에서 땔나무 해 오던 추억도 연구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온돌은 역사 연구의 분야 중 생활사에 속한다. 송 교수는 생활사 7권을 내기도 했는데 생활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

“몇 년 전 미국에서 경제 위기가 왔을 때에 그렇게 많은 경제학자들이 있는데 왜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는지 원인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너무 수리 경제에 매몰되어 사람이란 요소가 빠진 경제학 연구가 됐기 때문이란 반성이 있었다. 역사도 결국은 사람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가 제도나 구조 등에 빠져서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역사학이 되어버렸다. 우리 역사서에서도 사람이 빠져 있다. 생활사 연구는 사람의 역사로 돌아가는 일이다.

또 하나는 이제 젊은 세대는 한자를 읽지 못하고 전통생활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전통과 단절된 산업화 이후의 세대들이다. 예를 들어 구들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궁이에 불을 어떻게 때는지 모르는 이들에게 온돌의 역사를 강의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역사가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과연 과거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따라서 이들에게 과거 삶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까닭에 과거 삶을 복원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생활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이번 저서에 ‘최초의 온통 통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동안 국외는 물론, 심지어 국내에서도 체계적인 온돌 연구가 없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온돌사 연구는 문헌사, 고고학, 건축사에서 모두 가능하다. 그러나 이 세 분야에서 체계적인 역사서를 쓰지 못했다. 온돌 생활은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문헌 기록이 거의 없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항만이 역사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돌연구는 고고학 발굴 자료에 의존해야 하는데, 1990년대 이래 최근 20여 년 간 국내에서 발굴이 많이 이루어져 비로소 온돌 연구가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거시적인 연구가 아니라 온돌의 형식을 분류하고 연대를 부여하는 미시적인 연구에 머물러 있다. 건축사에서는 건축 구조나 개별적인 건물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고고학 자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우리처럼 풍부한 자료가 없을 뿐더러 일상화된 온돌 문화도 없으니 이 방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기 어렵다. 온돌 구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헌사 연구자이면서 고고학을 부전공했고 전통적인 온돌 생활을 해봤던 필자가 이 방면에 과감히 뛰어들어 온돌사의 큰 흐름을 처음으로 잡아본 것이다.”

-무엇을 온돌이라고 가리키는가?

춘천에서 발굴된 고대 쪽구들 모습. 쪽구들이란 방바닥 전체가 아니라 흰색으로 칠해진 부분처럼 방의 일부만 온돌 형태를 갖춘 것을 말한다(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춘천에서 발굴된 고대 쪽구들 모습. 쪽구들이란 방바닥 전체가 아니라 흰색으로 칠해진 부분처럼 방의 일부만 온돌 형태를 갖춘 것을 말한다(사진: 송기호 교수 제공).

“우리나라에서는 취사와 난방을 겸하는 시설로 선사시대 이래의 노지(爐址, 일종의 모닥불이나 화롯불)가 있고, 역사시대 초입에는 솥을 거는 입체 시설인 부뚜막이 등장했으며, 난방을 강조한 온돌이 비슷한 시기에 발명되어, 이 세 가지가 중심을 이루며 세력 다툼을 벌였다.

온돌 하면 지금 우리 눈에 떠오르는 독특한 구조가 있으나, 초기 형태로 올라가면 어느 것을 온돌이라 정의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아무도 온돌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지 않은 채 연구를 해왔다. 온돌은 불을 때는 아궁이(부뚜막) 부분, 뜨거운 공기가 지나가는 고래 부분,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 시설로 나뉜다. 여기서 온돌의 핵심 부분이 고래(구들)다.

고래는 아궁이에서 나온 뜨거운 공기가 방 안에 오래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 ㄱ 자로 꺾은 것이 기본이다. 이에 따라 방의 벽을 따라 고래가 이어진다. 고래 바닥도 수평에 가깝게 만들었다. 배연시설이 1자형인데다가 벽과 수직으로 만나며 경사도가 있어서 연기를 빨리 배출하려는 것과 구별된다.

온돌은 방 안의 일부에만 구들을 놓는 초기 형태에서 방 전체에 놓으면서 부엌과 공간이 분리되는 후기 형태가 있다. 이 책에서는 앞의 것을 쪽구들, 뒤의 것을 온구들이라고 명명하였다. ‘온구들’이 지금 우리나라 아파트 방바닥 전체를 따스하게 해주는 온돌인 것이다.”

-전 세계 온돌의 발상지는 극동(북옥저), 화북, 로마(동지중해)라고 지적했다. 이들 온돌의 대략적인 특징과 그후 전파 모습을 설명해달라.

“온돌은 기원전에 동지중해, 몽골, 극동 등에서 각각 발생하였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하이퍼코스트는 로마에서 꽃을 피워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주로 목욕탕 시설로 이용되었고, 일부 대저택의 난방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이 전통이 이슬람 세계로 이어져 목욕탕 시설로 내려오고 있고, 주택 난방용으로는 활용되지 못하였다.

몽골에서도 온돌이 사용된 증거가 흉노 유적에서 속속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온돌도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또 이들이 독자적으로 발명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 북부로로부터 전해진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중국 북부(화북)에서도 발달된 온돌이 일부 확인되었으나, 자료가 너무 적어서 그 유래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이에 비해서 극동(북옥저)에서 발명된 온돌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한반도로 이어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온돌과 비교된다.”

-한국 온돌의 계승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온돌의 전승도. 북옥저-한반도-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온돌의 전승 지역을 한눈에 보여준다(그림: 송기호 교수 제공).
온돌의 전승도. 북옥저-한반도-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온돌의 전승 지역을 한눈에 보여준다(그림: 송기호 교수 제공).

“온돌은 북옥저 지역인 두만강과 그 이북에서 발생하여 남쪽으로 전파되면서 두 갈래로 발전한다. 하나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이루어진 북방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한반도 남부에서 이루어진 남방의 길이다. 북방에서는 고구려, 발해를 거쳐 금나라, 청나라, 현재의 중국으로 이어졌고, 남방에서는 삼국을 거쳐 고려, 조선 및 현대 한국으로 이어졌다.

고대에 온돌의 분포 범위는 대체로 북옥저, 부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사의 범위와 일치한다. 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 열도에서도 온돌을 사용하였으나, 현지에 동화되면서 온돌은 오래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여진족이 온돌을 이어받으면서 이민족도 온돌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니, 현재 중국 북부에서 온돌이 사용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온돌은 고대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쪽구들에 속한다.”

-고려시대 온돌의 특징을 설명해달라.

“고려시대 온돌 자료는 다른 시대에 비해 적어서 그 실상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고려에서는 반지하식 주거 시설이 줄어들고 지상식 건물이 크게 확대되는 시기로 보이는데, 온돌은 주로 반지하식 주거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자칫 사라질 위험을 안고 있었다. 사실 이때에 온돌 구조도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온돌은 추운 기후에 적합한 시설이니 한반도 남부보다는 만주에서 더 발달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온돌이 지상건물에도 보급되면서 쇠퇴하던 구조에서 새 싹이 돋았다. ㄱ자형 구들이 쇠퇴하면서 1자형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방 전체에 1자형 구들을 놓는 구들, 즉 온구들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서민의 문화였던 온돌이 이 무렵부터 상류층으로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시대에 한민족 전체가 향유하는 온돌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온돌의 특징을 설명해달라.

“조선시대에도 주로 가난한 서민이 온돌을 사용하였고, 상류층은 마루를 많이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점차 온돌로 전환하였다. 서울 공평동에서는 임진왜란 때 불탄 집자리가 많이 발굴되었는데, 상류층 저택은 중심 건물에 마루가 있었고 귀퉁이에 작게 온돌이 마련되어 있었다. 양반은 이 시기에도 마루가 깔린 방에서 생활하였고, 온돌방은 노인이나 병자를 위한 시설이었을 뿐이다.

왕도 16세기에는 평상 아래에 화로를 놓고 난방을 하여 잠을 잤다. 아직 제대로 된 온돌을 사용하지 않았다. 온돌은 원래 서민의 문화로 시작하였는데, 북방에서는 발해 때에 이미 최고지배자에게까지 퍼졌지만 남방에서는 조선 후기에야 궁궐의 임금에게까지 도달하였다.

온돌이 확산되면서 대도시는 땔감 부족에 시달렸다. 근대 사진을 보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주변은 산이 헐벗었다. 민둥산이 늘어나면 큰 비에 토사가 씻겨 내려가 하천을 메웠으니, 서울에서 청계천 준설이 조선 후기에 현안이 되었다. 다행히 현대에 들어서 연료가 연탄으로 바뀌고 식목을 꾸준히 한 결과로 산이 다시 푸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료 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북한에서는 아직도 민둥산 천지이다.”

-우리를 백의민족보다 온돌민족으로 부르는 것이 더 맞다는 주장을 설명해달라.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F.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란 말로써 일본을 상징하였다. 생활사를 집필하고 강의하면서 나는 이처럼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말이 무엇일지 고민해왔다. 근대에 대두한 개념어로 '배달의 민족'과 '백의민족'이 있다.

앞의 것은 단군신화의 광명사상에서 따온 것으로서 일본에 저항하는 시기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농후해서 제3자에게 현재의 우리를 대표하기에 부적절한 감이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배달 앱으로 다소 희화화된 느낌도 든다.

백의민족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흰옷을 즐겨 입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기에 충분하지만, 현대화와 더불어 지금은 흰옷 문화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 실체가 없어졌다.

그 대안의 하나로서 '온돌민족'을 이 책에서 제안한 것이다. 온돌은 고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찜질방, 전철 좌석이나 비데 변좌의 난방 등 많은 문화가 온돌이 있었기에 생겨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없는 문화이다. 그러니 한국만의 문화로서 온돌을 내세우고 온돌민족을 내세울 수 있다.”

-현대 세계의 온돌 사용 실태는?

온돌은 돌과 흙으로 만든 구조물이라 하중 문제가 크다. 이 때문에 현대에 아파트가 보급되면서 사라질 위험이 있었으나, 보일러를 이용한 온수순환식으로 변모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통 문화 가운데 현대화의 바람 속에 사라진 것이 많지만, 온돌만은 그러지 않아서 한국의 독특한 생활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온돌에서 파생된 문화들이 생겨났으니 찜질방이 대표적이다. 한국인은 열기 속에서 몸을 지져야만 하는 온돌의 후예가 된 것이다.

외국에도 우리의 온돌 문화가 여러 곳에 전파되고 있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고급 주택에 온돌이 시설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보니 서양의 회사도 보일러식 온돌을 보급하고 있었다. 앞으로 한국의 온돌 문화를 외국에 널리 선전하고 보급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온돌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전망은?

온돌을 등재하려는 움직임은 알고 있으나 구체적인 진행 상황은 모른다. 다만 한국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온돌 문화는 등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역사 연구 계획, 1년 남은 은퇴 후 계획 등에 대해 말해 달라.

이제까지 생활사 7권을 냈고, 생활사와 관련된 온돌사도 두 권을 출간했으니, 이로써 일단 이 방면의 연구는 마감하겠다. 그리고 원래 전념해온 발해사로 돌아가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자 한다. 정년이 1년 여 남아 있으니, 이 기간에 발해사 3부작의 마지막 책을 내고, 발해사 개설서도 집필한 뒤에 대학을 떠나려고 한다.

은퇴 후에는 혹시 건강이 허락한다면, 발해사 사료를 주석과 함께 번역하고, 나아가 나의 한국사 연구 경험을 토대로 한 한국사 연구법 책을 내고 싶다.”

편집자주: 바쁘고 힘든 와중에도 흔쾌히 시빅뉴스 인터뷰에 응해 주신 송기호 교수님께 시빅뉴스 임직원 모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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