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21/조국을 비난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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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길 잃은 신(神)이다-21/조국을 비난하지 않는 이유
  • 서창덕
  • 승인 2019.11.0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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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덕
서창덕

“저는, 조국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구속되기 하루 전날. 평소 나를 좋아하는 한 사장님이 내게 정경심이 구속될 거 같은지 물었다. 그의 물음에 벌써 정경심이 구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묻어 있었지만 나는 그의 바람을 외면하고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많이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책(<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을 꼼꼼히 무려 두 번이나 정독할 정도로 애독자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마치 내 책의 영업사원처럼 만나는 사람마도 내 책을 홍보하며 꼭 사서 보라고 강권하는 사람이다. 나로서는 매우 고마운 사람이지만 그렇더라도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한발 더 나아가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련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경심도, 조국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화가 났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가 내 수련의 경험을 다룬 책(<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을 감명 깊게 읽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이 자기 나름대로 오랜 시간 수련을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는 평소 등산을 좋아했는데 어느 날 산에 갔다가 무리를 해서 지쳐 있는데 마침 앞에 멋진 소나무가 있어 내게도 그 멋진 기운을 좀 나눠달라며 껴안았더니 정말 그 소나무에게서 좋은 기운이 나오더란다. 그때부터 그는 늘 새벽에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껴안았다. 그렇게 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단전호흡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몸에 기운이 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기운을 흡입하는지도 터득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단전호흡의 대표단체인 국선도를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도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독학으로 그 정도까지 깨쳤으니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 책(<당신은 길 잃은 신이다>)은 티베트의 밀교수련법을 다룬 어려운 책이라 한 번도 제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그 책을 무려 두 번이나 꼼꼼히 읽어낼 정도로 수련이 깊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는 이해를 못한다며 꼭 사서 보라고 강요하다시피 했다. 그렇게 내게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편이 되어줄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 마하라지(사진:서창덕 제공).
평생 히말라야에서 수련한 스승 마하라지(사진: 서창덕 제공).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

인도 리시케시의 요가 니케탄 아쉬람을 창시한 마하라지는 무려 40년 동안 히말라야를 떠돌다가 55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위대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티베트에서 최상승의 밀교를 터득하고 난 뒤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온 위대한 스승은 이미 200살이 넘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위대한 스승 또한 그가 체득한 모든 법을 물려줄 적당한 제자를 찾고 있었다. 위대한 스승은 불과 일주일 만에 55년을 기다린 마하라지에게 그가 가진 모든 비법과 모든 기운을 남김없이 전해주었다.

마하라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모든 의문이 풀렸고 모든 것을 체득했다. 15세에 경전 읽기를 못하게 하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피해 단돈 700루피와 모포 한 장을 갖고 집을 떠났던 마하라지는 그로부터 무려 40년 만에 위대한 스승을 만나 마침내 최상승의 도를 완성한 것이다.

히말라야에서 밤을 지새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곳이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잘 알 것이다. 마하라지는 단 며칠을 견디기도 힘든 히말라야에서 눈과 바람과 허기와 싸워가며 무려 40년 동안을 수행자로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스승을 만나 모든 의문을 풀고 모든 것을 깨쳤다. 그 감회가 어떻겠는가. 더구나 그에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전해준 위대한 스승은 어떤 연고와 어떤 세속의 만남과 얽힘도 없는 완전한 초면이었다. 어찌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물을 흘리는 그를 괜찮다고 토닥이던 위대한 스승은 대신에 꼭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아무런 대가와 아무런 인연도 없이 모든 것을 물려준 위대한 스승이 유일하게 지키라고 했던 계율. 그 첫 번째 계율이 바로 아래의 문장이다.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

나는 그토록 위대한 스승이 남긴 첫 번째 계율치곤 너무 평범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에게? 겨우 이거야?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고? 이런 건 굳이 히말라야에 가지 않더라도 시중의 어떤 평범한 강의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흔하디흔한 문장이 아닌가.

나는 이 말이 지닌 무게를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문장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이 말이 조금씩 만만찮은 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수행을 위해 앉을 때마다 이 문장을 떠올린다.

“내 안의 가짜를 몰아내야 한다”

히말라야에서 수련 중인 필자(사진:서창덕 제공)
히말라야에서 수련 중인 수행자(사진: 서창덕 제공)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진짜 자신(眞我)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내 안의 가짜를 몰아내야 한다. 가짜 자아를 보통 에고(ego)라고 한다. 일상생활을 하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반응하고, 방어하는 주체를 에고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의 내가 아니라는 것은 그렇게 반응하는 주체가 유한하고 쉽게 변하는 허상(虛想)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매운 것은 절대 못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운 고추를 잘 먹는다. 예전에는 음식에 고춧가루가 들어가면 화를 냈는데 지금은 어떤 반찬이나 국에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으면 느끼해서 못 먹겠다며 투덜거린다. 그렇다면 매운 것을 싫어했던 과거의 내가 나인가? 아니면 매운 것을 잘 먹는 지금의 내가 나인가?

그건 나의 입맛이 변했기 때문이지 본질의 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고 항의할 수도 있다. 맞는 말씀이다. 그것이 진짜 본인이다. 간추려 설명하면, 과거에 매운 맛에 화를 냈던 내가 있고 지금은 매워도 화를 내지 않는 내가 있다. 화를 내는 나와 화를 내지 않는 나를 늘 지켜보는 변하지 않는 내가 바로 진짜 자아인 진아(眞我)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현재 설정하고 있는 나의 기준과 기대에 맞지 않아 화를 내는 것이다. 나중에 그 기준이 바뀌면 화를 내지 않게 된다. 즉,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화를 내는 사람은 그 기준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가짜의 나이고, 화를 낼 때나 화를 내지 않을 때나 늘 지켜보는 변하지 않는 내가 진짜 나인 참자아(眞我)인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에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본래 없다고 하신 것이다. 내 기준에 따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면서 그것이 맛있네, 맛없네, 그것이 잘 됐네, 잘 못 되었네, 하는 것들이 모두 뿌리가 없는 헛된 자아에서 비롯된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렇듯 수행자는 가짜인 나를 몰아내고 진짜인 나의 존재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게 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대부분의 수행자가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에고를 버리고 진아를 찾는 수행을 계속 해 가다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져 내가 가진 모든 능력들이 커지게 된다. 이때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흔히들 ‘도고마장(道高魔長)’이라고 한다.

내 마음이 밝아지고 깨끗해지면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잘못된 부분들이 더 눈에 쏙쏙 들어오게 된다. 이 단계에서 신이 나 그런 것들을 보고 비판하고 비난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그들과 비슷한 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비난에 앞장서는 나는 바로 기준에 따라 변하는 나의 가짜 자아인 에고(ego)이다. 겨우 진아(眞我)를 찾아 한발 전진했는데 진아의 높아진 안목으로 타인을 비난하다가 그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스승은 첫 번째 계율로 숨어서도 절대 타인을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공자, 무안을 당하다

비난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공자(孔子)의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당대의 성인으로 널리 알려진 공자가 나이 칠십이 되어 채나라 국경을 지나는데 밭에서 두 여인이 뽕을 따고 있었다.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구슬처럼 예뻤고 서쪽에서 뽕을 따는 여인은 얼굴이 곰보처럼 얽었다. 그래서 치기가 동한 공자는 농담 삼아 동쪽 가지는 구슬박이고(東枝璞)이고 서쪽 가지는 얽은 박이라고(西枝縛)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서쪽의 얽은 여인이 공자를 보고 ‘입술이 마르고 이가 튀어 나온 게 7일간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밝아 문장은 천하에 떨치겠다’고 응대한다. 무안을 당한 공자는 서둘러 가던 길을 재촉하는데 그만 채나라 국경에서 포졸에게 잡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공자는 뽕따는 얽은 여인의 지혜를 빌려 겨우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얽은 여인이 예언한 대로 공자가 굶게 된지 딱 7일 만이었다.

이때 공자가 크게 뉘우치고 후세에 전한 교훈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수행자가 해야 될 유일한 행동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자신에게 비추어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수행자다.

가끔 절에서 법문을 들으면 중간에 꼭 교회비난을 한다. 교회에 가도 마찬가지로 불교를 비난한다. 또 최근에 생긴 신흥종교나 수행단체에 가면 기존의 불교와 기독교 모두 엉터리라고 비난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옆 동네의 교회나 절에서는 또 그 단체를 사이비라고 비난한다. 이렇게 핑퐁을 하다 보면 수행하는 경건한 곳에서 싸우다가 날이 샌다. 수행하라고 만든 곳에서 비난하다 수행할 시간이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마하라지는 가장 첫 번째 계율로 절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타주의는 선이고, 이기주의는 악이다

한편, 최근 몇 달 동안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는 조국의 사태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에 나는 공감한다. 뭔가 평범하지 않은 하늘의 메시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나 신(神)이라는 단어들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들은 그냥 생명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지구와 우주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별들이 공전을 하고 자전을 하고,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은, 모두 우주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구에도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되었다가 다시 따듯한 봄이 온다. 바로 지구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작은 생명도 있으면 큰 생명도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만이 살아가는 지구가 아니다. 지구는 우리 모두를 안고 기르는 큰 생명체다. 감각에 흔들리는 가짜 자아인 에고를 모두 닦아내고 우리가 참자아 속에서 깊이 고요해지면 지구라는 큰 생명체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더 깊이 고요해지면 우주라는 큰 생명체가 진동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우주는 생명체임에 분명하지만 사람처럼 입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 수는 없다. 대신 우주는 어떤 상(象)이나 징조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요즘 들어 잦은 태풍이나 지진 등의 자연재해는 우주가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사표시다.

우주의 언어가 꼭 자연재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보다 고차원적언 의사를 표현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몇 달 동안 대한민국을 달구고 있는 ‘조국 사태’다. 나는 이번 사건이 2년 6개월 전의 박근혜 탄핵과 맞물려 있다는 생각이다.

촛불이 모여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 어두운 정권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밝고 깨끗한 현재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촛불혁명이 탄생시킨 깨끗한 정부에서 과거 어두운 정부 시절과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차이가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방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올해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2019년을 대표하는 단어가 ‘내로남불’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왜 이런 황당한 기준과 행동이 만연하는 것일까? 이기심이 극치가 되어 그저 내 욕심만 존재하는 세상이 된 탓이다. 과도한 욕심 때문에 모두가 조금씩 마음을 기부해서 지켜왔던 공공의 도덕과 정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트럼프, 아베, 푸틴, 시진핑도 마찬가지다. 그런 지도자를 뽑았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들도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은 지구 전체적으로도 이기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다.

요즘은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헷갈린다고 한다. 그러나 선악의 기준은 언제나 분명했다. 이타주의(利他主義)는 선(善)이고 이기주의(利己主義)는 악(惡)이다. 이기주의의 기반은 개인의 에고(ego)이고 이타주의의 기반은 참자아(眞我)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각자의 이기주의가 극(極)에 달해 선(善)과 도덕은 밑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온다. 이를 노자(老子)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했고 주역(周易)에서는 ‘극적반(極則反)’이라고 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고 겨울이 깊으면 봄이 멀지 않다.

리시케시 사원의 벽화(사진: 서창덕 제공).
리시케시 사원의 벽화(사진: 서창덕 제공).

내년부터는 맑고 청명한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전편에서도 얘기했지만, 이렇게 극에 달한 상태에서 오는 2020년은 새로운 금(金)의 기운이 시작되는 경자(庚子)년이다. 천간(天干) 금(金)의 기운은 가을하늘처럼 맑고 청명한 기운이다. 지지(地支)의 자(子)는 새벽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며 쥐가 움직이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끝없는 후안무치의 시대가 이어질 것 같지만 내년부터는 도덕과 정의가 조금씩 살아날 것이다. 태풍에 단단하지 못한 부실한 열매가 떨어지듯이 이기심에 가득 차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멸하거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당대에도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던 공자였지만 뽕을 따는 두 여인의 너무나 차이 나는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평정심을 잃었다. 그래서 동쪽 가지는 구슬박이고(東枝璞)이고 서쪽 가지는 얽은 박이라고(西枝縛)이라고 했다. 잘난 체를 한 것이고 성인이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비난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얽은 박이라고 자신이 놀렸던 바로 그 여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야 공자는 크게 뉘우치고 후세에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교훈을 전했다.

타인을 비난한다는 것은 내가 넘친다는 것이다. 참자아는 늘 자신을 비우기 때문에 절대 넘치는 법이 없으며 언제나 고요하게 자신을 관조한다. 이 고요가 깨지면 수행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속에 들어가 같이 비난하고 어떤 편에 선다는 것은 이미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잊은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수행자에겐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심각한 방해요소다. 그래서 마하라지에게 최상승의 비법을 전한 위대한 스승은 이것을 수행자가 가장 첫 번째 지켜야 할 계율로 정하셨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지금은 스스로 반성할 때지 한가하게 타인을 비난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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