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살이 설워 울던 부산 ‘40계단’에서 피난민 애환 느끼다
상태바
피난살이 설워 울던 부산 ‘40계단’에서 피난민 애환 느끼다
  • 취재기자 정소희
  • 승인 2019.10.29 16: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란수도 부산, 한국전쟁 역사 담은 40계단 문화관도 볼 거리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 장소엔 배경음악 ‘Holiday’가 울리는 듯

‘그래도 살아야겠다.’ 전쟁 중 흩어진 가족들이 아직 살아있으니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버텨나간 피란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삶과 애환을 안고 안타깝게 헤어진 가족을 앉아서 기다리다가 물동이를 지고 힘겹게 쪽방으로 향하던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은 지금 ‘40계단’이라 불리며 아직도 그때 그 자리 부산 중구 중앙동 4가에 자리 잡고 있다.

왼쪽 사진은 40계단 거리의 입구 모습. 오른쪽 사진은 입구를 지나 들어오면 보이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왼쪽 사진은 40계단 거리의 입구 모습. 오른쪽 사진은 입구를 지나 들어오면 보이는 피란민들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은 열차 부산역 옆을 지나 조금 걸으면 지하철 중앙역 위에 있다(사진: 네이버 지도).
40계단은 열차 부산역 옆을 지나 조금 걸으면 지하철 중앙역 위에 있다(사진: 네이버 지도).

40계단은 부산의 원도심 속 한 가운데에서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의 모습과 그때의 감정을 안고 있다. KTX 부산역에서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중앙역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쭉 걸어오면 피란민들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들과 함께 40계단 테마거리가 펼쳐진다. 다양한 카페와 식당들도 40계단 주변에 줄지어 있어서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하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계단과 거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2004년 6월 ‘부산시 최우수 거리’, ‘2006년 아름다운 길 100선’으로 선정될 만큼 이 길 속에서는 우리나라의 깊은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던 한 대학생(21)은 “흔히 부산 젊은이들이 ‘서면의 하트 조형물’ 앞에서 친구와 약속을 잡듯이 40계단은 중앙동의 만남의 장소인 것 같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모이는 장소로 딱이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피란민이 오가던 40계단. 계단 중간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남성의 조형물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수많은 피란민이 오가던 40계단. 계단 중간에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남성의 조형물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부르던 명칭이다. 계단이 40개가 있어서 40계단으로 불렸는데, 예전에는 주민 사람들이 아니면 그 명칭을 몰랐다고 한다. 그 후 1955년 가수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로 40계단이 유명해졌다.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 설워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

이렇게 그 노래 가사에서 40계단이 언급된다. 노래 가사에서는 그 시절 피란민들의 상황과 사람들의 애환을 잘 나타내 그날의 감정이 마음속에 스며들 수 있게 한다. 대학생 송규연(21, 경남 양산시) 씨는 “노래 가사만 읽어도 마음이 아프다. 노래를 들으니 노래 가사의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며 힘들고 아팠을 피란민들의 마음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원래 이곳에 계단이 만들어지기 전, 모든 것은 그저 넓은 바다일 뿐이었다. 조선 말 1902~1908년 사이에 부산 바닷가 앞산 복병산을 깎아 바다를 흙으로 메꾸는 매축을 했고, 그래서 생긴 바닷가 앞 평지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부산역 등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복병산을 깎아내려 생긴 비탈길 자리에 40계단이 생겨났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수많은 사람이 부산으로 피난을 오면서 40계단은 피란민들의 삶에 아주 중요한 공간이 됐다. 피란민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모였던 영도다리처럼 40계단도 그러한 역할을 했다. 그들이 이 계단에 앉아 헤어진 가족을 기다리고,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고달픈 삶을 달랜 애환의 계단이 된 것이다. 송규연 씨는 “피란민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다. 평범한 계단처럼 보이지만 정말 중요한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해 준 계단이라 40계단을 보는 동안 뜻 깊은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피난시절, 부산의 중심지였던 중구에는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그만큼 중구는 좀 더 특별했다. 40계단은 말할 것도 없고, 영도다리, 부산역, 자갈치 시장, 국제시장, 남포동, 그리고 그 당시 정치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광북동까지 부산의 경제, 문화, 교육의 모든 것이 갖춰진 것이 중구였다. 그중에서 40계단은 갈 데 없는 가난한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었다. 문화 해설사 김모(70) 씨는 “40계단은 삶의 길목이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오르내렸던 피란민들의 삶이 담긴 곳이다”라고 말했다.

40계단을 올라가면 인쇄 골목과 벽화 골목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을 올라가면 인쇄 골목과 벽화 골목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 주변 지도(사진: 부산광역시 중구 문화관광과)
40계단 주변 지도(사진: 부산광역시 중구 문화관광과).

하지만 1953년 부산 역전대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작은 불씨가 점점 커져 결국 40계단까지 덮쳤다. 그 후 40계단은 1953~1959년 사이에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5m 떨어진 곳에 옮겨졌다. 1993년에는 재정비를 하며 조형물들이 세워지고 점점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피란민들의 애환이 담긴 40계단이 재정비 후 새롭게 변했고, 관광명소로 자리 잡으며, 인쇄 골목과 벽화 골목도 함께 생겨나 그 주변에 좀 더 활기가 생겼다. 40계단을 올라가면 인쇄 골목과 벽화 골목이 보인다. 직장인 곽모(24, 부산시 영도구) 씨는 “도심 속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40계단의 역사와 아픔을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정비로 한층 활기차져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느낌이 새롭고 깊게 와 닿는 곳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40계단 토요문화광장의 공연 모습.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어서 40계단에 활기를 불어넣는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 토요문화광장의 공연 모습. 자연스럽게 주민들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어서 40계단에 활기를 불어넣는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현재 40계단은 다양한 축제와 볼거리가 있다. 40계단 문화관 시설관리사업소에 의하면, 10월 12일~11월 2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40계단 토요문화광장이 열린다. 토요문화광장은 원도심 문화 창작 공간 또따또가 팀, 인디밴드 등의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다. 동광동 주민센터 시설관리사업소 직원은 “40계단은 중앙동의 상징적인 곳이지만 막상 부산 시민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고, 평일에는 직장인들이 40계단 주변 카페를 많이 찾아오지만 주말에는 그렇지 않다. 40계단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축제를 마련했다. 한산한 40계단의 주말을 축제로 활기차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5일에는 우리 민족의 꿈 ‘통일’을 주제로 한 제16회 40계단 문화 축제가 열렸고, 지난 9월에는 예술교육도시 중구 추진단에서 주관한 40계단 예술 교육 문화제가 열리는 등 다양한 행사가 가득하다. 대학생 장 씨는 40계단 예술 교육 문화제에서 초록영화제 허주영 진행자가 선정한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감상하는 등 영화제를 즐겼다. 장 씨는 “중앙동이 원도심이라 조용한 도시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거기서 일어나는 소소한 문화의 물결이 퍼져 큰 힘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40계단은 다양한 행사뿐만 아니라 영화와 방송 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졌다. 특히 1999년에 상영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명장면 중 하나로 배우 안성기, 박종훈이 빗속에서 결투를 벌이는 배경 장소가 바로 40계단이다. 이 장면의 배경 음악인 비지스의 <Holiday>라는 곡이 들리는 듯한 이곳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찾아오는 곳이다. 2012년에는 40계단이 TV 예능 프로그램 <런닝맨>의 촬영지 배경이 되기도 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40계단 문화관에는 피란민들의 집, 옷, 생활 도구가 전시돼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 문화관에는 피란민들의 집, 옷, 생활 도구가 전시돼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소희).

40계단을 들렸다면, 40계단 문화관도 꼭 가 볼 장소 중 하나다. 무엇보다 40계단의 역사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40계단 문화관이다. 문화관은 40계단에서 120m 떨어진 곳에 있는 동광동 주민센터 5층에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란수도가 됐던 부산의 그 날, 그곳,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냈고, 그 시절 사용된 물건들과 피란민들의 생활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곳이다. 부산여대 학생 강재연(21, 경남 양산시) 씨는 문화관을 둘러본 후 통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강 씨는 “희망을 잃지 않고 오늘날의 모습을 만들어준 분들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잊지 않을 것이다. 통일이 돼서 이런 아픔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날의 아픔을 이겨내고 현재 경제 성장을 이루고 민주주의로 잘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은 무엇일까? 해설사 김 씨는 해설을 듣는 관광객들에게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생활 후 지금 우리나라가 잘살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그 대답의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많은 시설이 파괴된 후 교육은커녕 살아갈 집도 제대로 없는 힘든 상황이 왔다고 말해 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국민들의 교육열은 뜨거웠고 밥을 못 먹더라도 자녀 교육을 시키겠다는 그 열정, ‘우리는 힘들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마음이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들었다고 그는 관광객들에게 설명한다. 김 씨는 “그 시절 부모들의 교육에 대한 치맛바람은 열정”이라며 “그 때의 교육 덕분에 현재의 산업들이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한국전쟁과 40계단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해설사 김 씨는 그 의미를 두 가지로 정의했다. 첫 번째,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을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피난 온 가족들의 부모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된 몸을 이끌고 다녔던 애환의 삶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김 씨는 “현재 우리나라는 복지와 교육 모두 잘 이뤄지고 있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수많은 아픔이 있었다”며 “희망을 잃지 않고 비참한 삶을 이겨낸 선조들께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