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칼럼]열등감으로 쓰는 허망한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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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철 칼럼]열등감으로 쓰는 허망한 슬로건
  • 칼럼니스트 박기철
  • 승인 2019.10.28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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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여(女)~문(文)/Amenity, Feminism and Lifeway ㉑ / 칼럼니스트 박기철
칼럼니스트 박기철
칼럼니스트 박기철

도시들마다 슬로건을 만든다. 가장 유명한 도시 슬로건은 I ♥ NY일지 모른다. I ♥ 뒤에 자기 도시를 이름을 붙여 어떤 도시들이 따라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리옹에 오니 GRAND LYON이라는 도시 슬로건이 여기저기 보인다. 쓰레기통에도 있고 청소차에도 있고 맨홀 뚜껑에도 있다. 그랜드란 크다는 뜻이다. 그런데 BIG이나 LARGE라는 단어보다 GRAND라는 단어에는 뭔가 더 그럴 듯한 뜻이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역사가 길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큰 형님을 GRAND Brother라 하지 BIG Brother라 하지만 할아버지는 BIG Father라 하지 않고 GRAND Father라 할 것이다. 빅이 그냥 큰 것이라면 그랜드는 역사가 길고 크니 장대長大하다는 뜻이다. 리옹이 그만큼 장대한 도시일까? 그렇게 말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네가 스스로 자기를 장대하다고 하면 좀 이상해진다. 장대하다는 것은 남들이 그리 평가해 줄 때 의미가 있다. 서울은 한 때 SOUL of ASIA라는 슬로건을 쓴 적이 있다. 서울이 아시아의 영혼이라니? 남들이 그렇게 알아주지 않는데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웃기는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리옹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마르세이유와 함께 제2의 도시로 꼽히는 곳이다. 제2의 도시들은 늘 제1의 도시를 부러워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2의 도시라는 부산은 ‘크고 강한 부산’이라는 슬로건을 쓴 적이 있다. 리옹이 그랜드라는 슬로건을 쓴다거나 부산이 크고 강하다는 슬로건을 쓰는 것은 비슷한 맥락으로 여겨진다. 2인자로서 뭔가 1인자에 대하여 심적으로 꿇리거나 열등감이 있으면 그런 식의 슬로건을 쓰는 것이 아닐까?

리옹의 도시 슬로건 GRAND LYON(사진: 박기철 제공).
리옹의 도시 슬로건 'GRAND LYON'(사진: 박기철 제공).
리옹의 관광 슬로건 ONLY LYON
리옹의 관광 슬로건 'ONLY LYON'

리옹 방문 여행 관광객들을 위한 사무소에 붙은 ONLY LYON이라는 슬로건도 마찬가지다. 자기네가 자기네를 가지고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프랑스에 오면 파리만 가지 말고 꼭 리옹을 찾아야 한다고 붙들고 애원하는 듯하다. 무엇이 리옹을 오로지 찾아 가야 할 ONLY 리옹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리옹이 가지는 내재적 차이일 것이다. 파리에도 마르세이유에도 아비뇽에도 없는 실재적 특색일 것이다. 아무리 멋진 슬로건을 쓰더라도 그런 특별한 차이가 없다면 허황된 슬로건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내가 이방인으로서 느끼기에 리옹은 휑한 도시였다. 뭔가 생기와 활력이 떨어지는 도시같았다. 8월은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 달씩 휴가를 가기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내 주관적 생각으로는 그랬다. 키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창문 하나 달랑 있는 어둠침침하며 황량한 숙소가 그런 느낌을 배가시켰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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