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비례벌금제가 실질적 평등을 누리게 해줄 것이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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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비례벌금제가 실질적 평등을 누리게 해줄 것이라는 착각
  • 부산시 연제구 조윤화
  • 승인 2019.10.0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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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한한 자들이 받는 복지혜택은 부자의 호의가 아니라 빈자의 권리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부자들에게 세금을 강요하는 것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로써,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는 정당하다고 봤다. 오늘날의 한국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라는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재산가들이 저소득 계층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돼 있다. 그러나 ‘부자는 마땅히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이러한 논리가 조세 제도뿐만 아닌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적용된다면 이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부 정치인들은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부담하게 하자는 식의 정책을 발의해 대중들의 호감을 사려고 시도하는 데 이를 표퓰리즘이라 한다.

현재 포퓰리즘은 대중의 바람을 대변하는 정치 활동이라는 원래 좋은 의미로 쓰이기보다는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공약을 내세워서 무조건 표만 얻으려 하는 정치 활동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인다. 최근 정부가 밀고 있는 정책 가운데 포퓰리즘 논란에 불씨를 붙인 정책이 있다. 바로 재산비례벌금제 얘기다.

더불어민주당과 법무부는 지난 18일 열린 당정협의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이기도 했던 재산비례벌금제 도입에 합의했다. 재산비례벌금제는 같은 범죄에 대해선 같은 벌금이 선고되는 현재 시행 중인 ‘총액 벌금제’와 달리, 피고인의 경제적 사정을 고려해 벌금액을 달리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판사는 먼저 피고인에게 벌금이 며칠짜리인지 선고한다. 이후 피고인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일일 벌금액을 결정하는데 총 벌금액은 벌금 일수에 일일 벌금액을 곱한 금액이 되는 것이다. 이론만 놓고 보자면 가진 재산에 따라 벌금을 다르게 매기자는 재산비례벌금제는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법안 같다. 하지만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선 원래의 목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는 현실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정책에 불과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은 “총액 벌금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은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지만, 부유층은 가진 재산에 비해 벌금액이 적어 형벌로서 효과가 크지 않다”며 재산비례벌금제 도입으로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최근 기회의 공정과 결과의 평등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장관이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소리를 국민이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드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재산비례벌금제의 시행은 시기상조다.

피고인에 대한 정확한 소득 조사는 재산비례벌금제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현 정부가 국민의 정확한 소득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의문이다. 당장 국가장학금만 보더라도 소득 분위 산정 방식에 의문을 품는 국민이 다수다. 언젠가 어머니로부터 한숨 섞인 푸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사교 모임에서 지인들로부터 ‘국가장학금에서 높은 분위를 받기 위해 자동차, 집을 다른 가족 명의로 돌려놓았더니 높은 소득 분위를 받아 자녀가 대학을 거저 다니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소득신고를 정확하게 한 사람이 괜스레 억울한 기분이 드는 이상한 상황이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고수입의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자영업자의 소득 누락이 심각하고,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공직자들의 세금 탈루 의혹이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재산비례벌금제를 도입하는 것은 유리 지갑인 일명 ‘월급쟁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돼 또 다른 불평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불 보듯 뻔하다.

재산비례벌금제 찬성론자들은 이 정책 도입으로 벌금 수억 원을 부여받고도 이를 내지 않기 위해 노역으로 때우는 일명 ‘황제 노역’이 없어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지난 2014년 대주그룹 허재호 전 회장은 벌금 254억 원을 내지 않고 버티다 일당 5억 원의 노역으로 사회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재산비례벌금제가 정말 황제 노역을 없앨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현재 형법 69조는 ‘벌금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납부를 해야 하고, 벌금을 내지 않은 자는 1일 이상 3년 이하의 기간 노역장에 유치된다’고 적시하고 있다. 실제로 벌금 수백억 원을 선고받은 피의자가 벌금을 낼 여력이 있음에도 벌금을 내지 않고 노역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선고된 벌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최대 노역 기간은 3년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쩌면 죄질이 나쁠수록 일당은 커질 수밖에 없는 애초에 모순된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30일 안에 벌금을 다 거두어들이면 해결될 일 아닌가 하는. 이에 대해 JTBC가 검찰 출신 변호사에게 자문하니 “한국에선 명의신탁, 차명계좌가 많아 지금 인력으로 모든 벌금 징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단다. 결국, 국민의 실질 소득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이 고정값이라면 재산비례벌금제의 제대로 된 실현도, 황제 노역 없애기도 불가능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죄를 처벌하는 데에 있어 왜 그 사람의 경제적 조건까지 고려돼야 하는지 원론적 의문이 든다. 현재 총액 벌금제로는 부유층이 가진 재산에 비해 벌금액이 적어 형벌의 효과가 크지 않다고 본다면 반대로 재산비례벌금제가 시행되면 상대적으로 적은 벌금을 내는 쪽의 계도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예시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먼저 폭행을 가했다. 맞고만 있을 수 없던 부자 또한 대응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고 법원은 이들에게 쌍방폭행 혐의를 내리면서 부자에게 가난한 자보다 10배 많은 벌금을 부과했다. 이 경우에도 재산 비례제도가 합당하고 공평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1992년 재산비례벌금제를 도입한 영국은 쌍방폭행 사건에서 한 피고인에게 다른 쪽보다 10배가량의 벌금을 선고해 논란이 일자 6개월 만에 총액 벌금제로 회귀한 바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공정과 평등이 일상에서 자주 언급되는 요즘이다.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으려 무리하게 정책을 집행하고 결정하기보단, 벌써 예상되는 문제점을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다. 조 법무부 장관은 재산비례벌금제에 우려를 표하는 시각에 대해선 “유럽의 많은 나라가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조 법무부 장관과 이 제도 시행을 합의한 정부 여당에 우리나라가 유럽 나라들만큼 개인의 재산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를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또한, 전두환 정부 때인 1986년부터 도입 여부가 검토됐으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미뤄져 왔던 이 법안을 지금 도입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마련했는지 듣고 싶다. 이들은 국민에게 이해를 구하고 설명을 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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