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노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하나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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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버킷리스트]노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하나 만들어 볼까?
  • 편집위원 정태철
  • 승인 2019.09.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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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나의 버킷리스트 ②
정 태 철(현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법정대학장, 전 대학원장, 전 한국언론학회 부회장)

버킷리스트를 적고 실천하는 게 요즘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즐거움’이 되고 있다. 이는 8, 90대 어르신들이 젊었을 때는 가당치 않은 호사였다. 자식 먹여 살리는 게 인생의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버킷리스트를 시시덕거리는 것 자체가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

나도 버킷리스트를 적어보는 축복을 누려보자. 버킷리스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현역 때, 다른 하나는 은퇴 후 실현을 도모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캠핑카 여행하기, 제주도 한 달 살기 등을 버킷리스트에 기록하고 긴 연휴나 각종 유급 휴직 제도를 활용해서 실행하고 지워나간다. 부러운 일이다.

정태철 교수는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Bista Socila Club)'처럼, 나이 80에, 농익은 피아노 연주와 노래로, 무대에 서는 꿈을 꾸고 있다(사진; 시빅뉴스 자료).
정태철 교수는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Bista Socila Club)'처럼, 나이 80에, 농익은 피아노 연주와 노래로, 무대에 서는 꿈을 꾸고 있다(사진; 시빅뉴스 자료).

대학 교수 은퇴 2년을 남겨둔 내가 한창 때 꼭 해보고 싶었던 로망 리스트가 있었을까? 가만 생각하니, 평일 밤과 주말도 무언가 해대야 했던 세월을 보낸 게 수북했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해외여행은 그럭저럭 다녀 봤지만,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이었으니 특별히 버킷리스트를 성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나의 버킷리스트였겠다” 싶은 게 하나 있다. 바로 ‘저널리스트 경험’이었다. 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되기 위해 학생 시절부터 공부했지만, 일선 기자 경력이 없었고 이론밖에 몰랐으니, 막연하지만 기자 경험을 갖고 싶은 꿈이 있었다. 다행히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컬럼비아 미주리언(Columbia Missourian)’이라는 미국 일간지에서 과목과 연계되어 한 학기를 취재기자로, 다른 한 학기를 편집기자로 보냈다. 내가 쓴 기사가 미국의 가판대에서 팔리는 일은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다.

유학 후, 경성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되자, 나는 제자 학생들에게도 학생 시절에 나처럼 인턴 이상의 ‘진짜’ 기자 경험을 갖게 해보자는 뜻을 가졌다. 20년을 넘게 노력한 끝에, 학과의 부속 언론사이면서, 당국에 정식 등록돼 있고, 네이버에서 뉴스로 검색되는 ‘시빅뉴스’라는 인터넷 신문 창간을 주도하게 됐다. 그리고 신방과 교수로서는 매우 희귀하게 실제 언론사인 시빅뉴스의 발행인 겸 대표로서 6년을 일했고, 칼럼도 썼으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출석해서 시빅뉴스 발행인 자격으로 기사에 불만을 가진 뉴스원과 시비를 벌여보기도 했다. 그게 버킷리스트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저널리스트 경력갖기’라는 나의 버킷리스트가 덜컥 실현된 듯하다.

최근에 나는 '은퇴 후 버킷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그 가짓수가 제법 늘고 있다. 무얼 적을까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 게 수년 전 어느 학생이 던진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교수가 안 됐으면 무슨 직업을 가지셨을 것 같나요?”

그 질문에 주저 않고 답한 게 ‘야구선수’였다. 나는 대전 용두동에 있는 서대전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전국을 제패할 만큼 강한 야구팀이 있었다. 그 학교 출신 유명 야구 선수 중에는 고(故) 윤몽룡 선수가 있다. 투수 겸 4번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분이다. 서울 중앙고 재학 시절에 전국대회 우승은 물론, 고교 시절 한 해에 두 개의 만루 홈런을 쳐낸 진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 다른 선수는 두산의 전신 OB베어스에서 투수로 뛴 박상열 선수가 있다. 이 분은 친한 동네 형이기도 하다.

초등학생 4학년 때, 그때로서는 덩치가 제법 컸고 운동신경이 좋았던 내가 야구하는 모습을 운동장에서 눈여겨 본 야구부 감독이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끈질기게 부모님을 학교로 모시고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당시는 지금처럼 유소년 야구 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을 때였고, 한번 야구로 발을 들여 놓으면 공부와 담을 쌓아야 했던 풍토라서 야구 선수 하고 싶다는 말을 부모님 앞에서 감히 꺼내보지도 못했다. 미련이 남아서인지 그때 야구부들이 연습하던 야구장 언저리를 애꿎게 서성였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후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취미로 야구를 즐겼는데, 대전 문화동에 있던 충남대 야구장 담을 넘긴 홈런을 친 기억도 있다. 왕년의 홈런타자 김우열 선수나 현 한화 단장 박종훈 선수의 키가 나와 같은 175cm였으니, 나도 홈런왕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무튼 ‘진짜 선수’의 길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500원짜리 야구연습장에서 야구선수 못된 한풀이하듯 방망이를 휘둘러보기도 했다. 은퇴 후 야구동호회를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날아드는 야구공을 잡기에 내 민첩성이 이제는 따라줄 것 같지 않다.

교수 아니면 되고 싶었던 꿈이 또 하나 있었다. 그건 의외일지 모르지만 ‘음악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69년, 내게 음악의 꿈을 키운 계기가 있었다. 내가 다닌 대전중학교는 당시에 반 대항 전교 합창경연대회를 열었다. 그 대회는 지정곡 20곡을 한 달 전에 알려주고 대회 때 한 반씩 무대로 올라와 지휘자가 제비 뽑은 곡을 2곡 불러서 우열을 가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담임인 음악 선생님은 나를 어여쁘게 보셨는지 지휘자로 지명하고 방과 후 반 전체에게 노래부르기를 맹연습시켰다. 결과는 떼논 당상, 1등이었다. 그 누가 음악 선생님이 지도한 반의 합창 실력을 꺾을 수 있었을까.

다음 해도 합창대회가 열렸다. 2학년 우리 반은 작년 우승팀 지휘자인 나를 지휘자로 뽑았다. 음악선생님은 그해 나와 다른 반 담임이었다. 나는 반 친구들과 방과 후 한 달 동안 지정곡 20곡을 열심히 마스터했다. 우리 반은 대회 날 <잘 살아보세>라는 곡과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윤창곡을 멋지게 불렀고, 우승은 음악 선생님 반이 아닌 우리 반이었다.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2년 연속 우승한 ‘유명 지휘자’가 된 나는 학교 행사 때마다 합창 지휘자로 불려 다녔다. 당시 대전중학을 다닌 동기 선후배들은 지금도 내 이름은 몰라도 “지휘했던 애” 하면 금방 나를 알아본다.

3학년 때는 합창대회가 없어졌는지 기억이 없고, 대신 악기경연대회가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다니던 리코더 퉁소(생김새는 플라스틱 리코더인데 세로가 아니고 가로로 불어야 하고, 소리 내는 부분이 진짜 국악기 퉁소처럼 되어 있는 악기였다)로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선 타향에~~”로 시작되는 가곡 <여수(旅愁)>를 구성지게 연주해서 피아노, 하모니카 연주자에 이어 3등을 차지했다.

1972년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전국적으로 통기타 붐이 일었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란 말이 정말 유행했다. 마침, 내 짝지 친형이 기타 학원을 하고 있어서 3개월을 사사받았다. CCR의 <Who’ll Stop the Rain?>, 엘비스 프레슬리의 <Burning Love> 등은 내 18번 연주곡이었다. 같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면서 어울리던 7인방이 있었다. 주말이면 대전 인근 계룡산 동학사 계곡을 찾아 우리끼리 자칭 콘서트를 열었다. 우리가 트윈폴리오의 <웨딩케익>, 이장희의 <그건 너>를 기타 선율에 맞춰 부르면, 등산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빡빡머리 고딩 보컬 그룹에 "나중에 대학 가면 한가닥 하겠네" 하며 박수를 보내주곤 했다. 그중 한 명이 진짜 연예인이 됐는데, 3년 전 작고한 개그맨 이하원이었다.

2학년 때는 YMCA 고등학교 합창단원이었던 선배가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고 나와 기타 7인방이 같이 합창단에 들어가 발표회, 방송출연, 미군부대 위문을 다녔다. 같이 합창하던 친구들 중에는 성악, 기악, 작곡 등으로 음악을 후에 전공한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우리에게 합창을 지도했던 분이 엄기영 전 MBC 합창단장이었다. 그때 우리는 그를 “기영이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어니언스의 <저 별과 달을>, 4월과 5월의 <옛사랑>, 유심초의 <사랑이여> 등 7080 노래는 지금도 2부 화음 멜로디를 잊지 않고 있다.

70년대 일반 가정집에는 피아노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가 된 누나가 첫 월급으로 피아노를 구입했다. 공부가 바쁜 고등학생이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악기인 피아노가 집에 생기자, 나는 틈만 나면 누나 방으로 가서 <초급 바이엘> 교재를 놓고 피아노를 두들겼다. 독학이었지만 나름 음악적 소양을 갖춘(?) 나는 비틀즈의 <Yesterday>, 사이먼 앤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등을 악보 보고 뚱땅 거리며 겨우 흉내 내는 수준까지 갔다. 하지만 그후 피아노는 내 인생에서 멀리멀리 떠나갔다. 바쁜 삶과 함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덧 내 나이 60 중반. 인생을 풍요롭게 살려면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스포츠 하나와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악기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그 누구가 말했던가. 이제 와서 운동은 숨 잘 쉬고 잘 걸으면 되지만, 내 버킷리스트에 악기가 빠질 수 없었다. 요새 흔한 섹스폰은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내 은퇴 후 버킷리스트에는 오래 전부터 이미 ‘피아노 연주’가 굵게 밑줄이 그어져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하루 10시간 씩 3년, 그러니까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어느 분야든 대가가 된다고 했다. 피아노를 배워보자는 꿈이 요새 와서 부쩍 더 자라고 있다. 내가 꿈꾸는 피아노 연주는 조성진 같은 예술가 차원은 아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 <스팅(The Sting)>의 주제가를 비롯해서,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비틀즈의 <Hey Jude>,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같은 서양 팝송이나 한국 대중가요를 즉흥 연주도 하고, 누가 어떤 키로 부르든 즉석에서 반주해주고, 노래도 같이 부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란 영화가 있다. 80세가 넘는 왕년의 쿠바 라틴 음악 스타 가수, 피아니스트, 기타리스트들이 다시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미국 순회공연도 하고, 결국에는 앨범을 내서 그래미 상까지 받게 된다는 다큐멘터리다. 최근, 합창단을 하던 친구들과 동창회 대화 중에 고향 대전의 도심 끄트머리에 조그만 무대가 있는 카페를 하나 협동조합으로 차려서 날마다 조촐한 음악회를 가지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언젠가 그렇게 해보자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바의 잔주름 가득한 노(老) 뮤지션처럼 늙었으나 농익은 피아노 연주와 노래로, 나도 나이 80에 무대에 서는 꿈을 꾸어 본다. 그 카페의 이름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면 더 멋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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