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계한 건물 보고 내 이름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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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설계한 건물 보고 내 이름 떠올릴 수 있도록..."
  • 취재기자 박신지
  • 승인 2015.12.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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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등대, BIFF 파빌리온 등 독특한 건물 설계자 안웅희 교수의 '건축 인생'

강희근 시인은 경남 통영 도남항의 등대를 보고 <연필등대>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 시는 “통영은 연필 등대로 일기를 쓰고 있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그 이후 도남항 등대는 연필등대라고 불리게 됐다.

부산 해운대 백사장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만든 파빌리온은 영화의 전당이 생기기 전까지 부산 국제 영화제를 빛내준 유명 건축물 중 하나가 됐다. 그후 우리나라 이곳저곳 학교나 군대 등에서 파빌리온을 응용한 건물들이 등장했다.

그밖에도 리모델링된 부산항 국제 여객터미널 등 독특하고, 특이하며,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외관으로 많은 인기를 끈 건축물들을 설계한 사람은 한국 해양 대학교 안웅희(50) 교수다.

▲ 경남 통영 도남항의 연필등대(사진: 안웅희씨 개인 홈페이지)
▲ 2006년부터 영화의 전당이 생기기 전까지 부산 국제 영화제 기간 중 세워졌던 파빌리온. 그 독특한 모양과 재질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사진: 안웅희 씨 개인 홈페이지)

안웅희 교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으로 현재 한국 해양대학교 해양 공간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 건설 기술 심의 위원회 위원, 부산 국제 건축 문화제 위원 등을 겸하고 있다.

1남 2녀 중 장남인 안 교수는 원래 미대 진학을 꿈꿨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음악이나 미술을 하면 굶어죽는다는 말을 듣던 시기였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아버지의 설득에, 그는 결국 미대 진학의 꿈을 접었다. 공대에 가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바람과 외삼촌의 추천으로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학한 후에도 건축에 대해서 큰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평소 멋있다고 생각했던 교수의 수업을 몰래 청강한 안 교수는 그 때서야 건축의 매력을 느끼고, 건축가가 되리라 마음을 먹게 됐다.

▲ 해양대학교 해양 공간 건축학부 안웅희 교수(사진: 안웅희 씨 제공)

대학 졸업 후 설계 사무소에서 10년, 해양대학교에서 교수로 13년을 지낸 안 씨는 건물을 설계하며 있었던 몇 가지 재밌는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안 교수는 원래 등대 설계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설계 사무소를 그만두고 해양대학교에 온 후 대학 주변 바닷가에 있는 등대를 보고 “등대가 어떻게 저렇게 못생겼지?”라는 생각을 하며 언젠간 꼭 예쁜 등대를 만들고자 다짐했다. 그러던 중 도남항 등대를 디자인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고, 문인들을 많이 배출한 통영의 특징을 살려, 많은 예술가들이 하늘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뾰족한 모양으로 설계했다. 그후 강희근 시인이 이 등대를 보고 <연필등대>란 시를 발표하면서 이 등대 이름이 연필등대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연필등대를 통해서 건물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지금은 사라진 부산 국제 영화제의 파빌리온에 관한 것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파빌리온이란 경기장 등의 관람석, 선수석, 병원이나 요양소 등의 병동, 박람회의 분관, 전시관 등을 말한다. 2006년부터 영화의 전당이 생기기 전까지 해운대 바닷가에는 부산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단 열흘 간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건물이 있었다. 그 컨테이너 건물이 안 교수가 설계한 부산 국제 영화제 파빌리온이다.

당시 영화제 위원장이던 김동호 씨와 우연하게 술자리를 가지게 된 안 교수는 김 전 위원장의 부탁으로 각 국에서 오는 영화인들을 맞을 수 있는 저렴한 건물을 부탁받았다. 부산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건물을 설계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산항에 쌓인 컨테이너 박스였다. 외국인들에게 독특한 인상을 남기고 부산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컨테이너라고 생각했던 안 교수는 그 때부터 컨테이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돈이 얼마나 드는지 등 컨테이너 자체에 대해 공부하고 설계에 돌입했다. 설계를 마친 파빌리온을 처음 본 영화제 관계자들은 색 배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불만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켜나간 안 교수 덕에 파빌리온은 완공됐고, 세계 각지의 언론과 영화제의 관심이 파빌리온에 쏟아졌다. 네 곳의 유럽 영화제에서도 파빌리온 설계 부탁이 안 교수에게 왔다. 그 뿐만이 아니라, 국방부에서 이동식 막사로 이용할 컨테이너 설계를 부탁받기도 했고, 교육청에서 학교 공사 중 임시 건물로 쓸 수 있는 컨테이너 교사 설계를 부탁받기도 했다. 안 교수는 “덕분에 컨테이너 박사가 됐다”며 “몇 년간 열흘이라는 시한부 건물을 만들다 보니, 파빌리온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이다”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리모델링된 부산항 국제 여객터미널, 한국형 땅콩집인 일오집, 부산 영도 광진 교회 등 다양한 건물을 설계한 안 교수는 건축하고 설계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다고 했다.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냐는 질문에, 안 교수는 설계한 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때라고 했다. 안 교수는 “건물이 세워지는 동안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 저녁으로 매일 가서 구경하고, 만져보고, 확인한다”고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며 즐기고 있는 안 교수에게도 힘들던 때가 있었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건축가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느낄 때였다. 건축이라고 하면, 건물을 짓는 큰 건설회사만 생각하고, 실제로 누가 건물을 설계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건축가의 길을 23년째 걷고 있는 안 교수는 “영화 볼 때는 제작사보다 감독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많으면서 왜 건물에 대해서는 건축 디자이너보다 제작사인 건설회사에 관심이 쏠리는지, 건축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느낄 때가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젊었을 적엔 건축가로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좋아하는 멋진 건물을 만들고 싶어 했다. 설계 사무소를 그만두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지금, 안 교수는 이윤을 따지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하고 싶은 건축 설계를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다. 안 교수는 자신이 설계하는 건물이 세상에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디자인이 필요한 곳이라면 갖고 있는 재주와 아이디어 동원해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고 싶다고 한다. 그의 집을 그리는 재능은 앞으로도 지구라는 공간에 아름답고 뜻깊은 집을 선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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