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 못난다"...젊은이들 '수저론 허탈감'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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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못난다"...젊은이들 '수저론 허탈감' 확산
  • 취재기자 김정이
  • 승인 2015.12.10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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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 판정 기준표, 빙고게임도 등장..."처지를 밑거름으로" 자립의 목소리도

대학생 김정운(25, 부산 남구 대연동) 씨는 이른바 고학생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 배달하고, 원룸에 돌아와 삼각김밥 하나로 아침을 때운 뒤 등교, 학교를 파하면 다시 서면에 있는 비어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뒤 밤늦게 돌아와 겨우 눈을 붙이는 일과를 매일매일 반복한다. 여친과 데이트는커녕 친구들이랑 소주 한 잔 마음 놓고 할 여유도 없다. 자기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막노동을 하는 부모에게 손을 벌일 입장도 못된다. 김 씨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여유롭게 대학생활을 즐기는 친구들을 보면 속이 쓰린다. 김 씨는 "남들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고들 하는데, 나는 흙수저도 못되는 시궁창 수저를 물고 나왔습니다"라며 쓴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다. "사회에 나가면 이 고된 생활이 밑거름이 되어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성공할 자신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요즘 ‘금수저,’ ‘흙수저’ 등 이른바 수저론이 '헬조선' 과 함께 고된 시절을 보내는 젊은이들의 세태 풍자 아이템으로 유행하고 있다. 최근 사법시험 존치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서 로스쿨생과 사시생을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로 지칭하는 주장이 제기돼 수저론은 다시한번 뜨거운 사회 이슈로 부상했다. 수저론은 영어 격언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Be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에서 유래됐다. 서양 귀족이나 상류층은 은으로 된 식기류를 사용했고, 아이가 태어나면 은수저를 선물하면서 이런 말이 생겨났다.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그 용어를 더 강조하기 위해 은을 금으로 바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은 취업과 결혼 앞에 좌절하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많이 쓰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분류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수저 등급을 나누어 표로 정리해둔 ‘수저계급론’이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 표에 따르면, 금수저는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둬 취업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계급, 은수저는 적당히 일하고 결혼하는 계급, 동수저는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계급, 흙수저는 돈도 배경도 없어 살기 어려운 계급을 말한다.

▲ 부모의 소득을 분류하여 수저로 등급을 매기는 수저론 기준표(출처: 네이버 블로그의 기준표를 시빅뉴스가 재작성).

이것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 수준이 자녀의 삶을 결정짓고, 각자에게 부여되는 기회가 평등하지 못한 현실을 말해준다. 이런 현실에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세정(21, 부산 연제구 연산동) 씨는 SNS에서 수저론 기준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씨는 부모의 배경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공감한다. 이 씨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의 도움으로 쉽게 외국을 다녀오는 친구들을 종종 봤다. 그런 친구들은 다른 사람보다 쉽게 더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방송 중인 KBS2 TV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과 다른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연예인 송일국 씨가 세쌍둥이를 태울 수 있는 트레일러 자전거를 타거나, 아이들이 서당 체험, 안전 체험, 치즈목장 체험을 하러가는 모습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쉽게 누리기 힘들다. 이런 모습들은 부유층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보는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떨어뜨리고, 시청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주부 주모(48) 씨는 요즘 아빠와 함께하는 TV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나면서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연예인 중심의 출연자들이 사는 삶이 일상적인 모습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주 씨는 “출연자들이 사는 호화로운 집과,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모습이 TV 속에 많이 등장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만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 가정이 어렵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대전일보가 보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남녀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은 총 자신이 평균 34억 원 이상으로 조사됐다. 또한 이 조사는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부모의 재력을 말하는 유산이 1위를 차지했으며, 스스로 노력해서 부자가 되기보다는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빠르다는 응답이 2배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저론 기준표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은 ‘흙수저 빙고게임’이다. 가로, 세로 다섯 칸짜리 표에 흙수저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가정환경이 적혀있다. 흙수저 빙고게임은 선택된 개수가 많을수록 흙수저에 가까우며, 동그라미 개수가 10개가 넘으면 하층민이라는 농담도 나왔다.

▲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관심을 끄는 빙고게임. 본인이 흙수저인지를 알아보는 게임이라고 한다(출처: 네이버 블로그 그림을 시빅뉴스가 재작성)..

김강산(21, 부산 해운대구) 씨는 흙수저 빙고게임이 만들어진 현실이 안타깝다. 김 씨는 “최근 들어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많이 쓰여 씁쓸하다. ‘알바 해본 적 있음,’ ‘부모님이 음식남기지 말라고 잔소리함’과 같은 것은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김도현(24, 부산 동래구 온천동) 씨 역시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정 배경 때문에 많이 좌절했다. 김 씨는 “내 주위에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친구가 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요즘 금수저 논란이 되고 있는 현실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14일 이투데이가 보도한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www.saramin.co.kr 대표 이정근)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2.8%는 부모와 관련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또한 복수응답이 허용된 상태에서, 응답자의 63.3%는 부모 덕에 돈 걱정 없이 구직하는 사람을 볼 때 상대적 박탈감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응답했으며, 부모님 회사에 취업하는 사람을 볼 때(48.2%), 경제적 여유로 취업이 안 급한 사람을 볼 때(47.1%), 부모님을 통해 청탁 취업하는 것을 볼 때(40%), 면접에서 부모님의 직업을 물어볼 때(30.5%) 등의 순으로 부모와 관련된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낀다고 응답자들이 각각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상대 사회복지행정학과 송미숙 교수는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성공을 뒷받침하며, 이로 인해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는 “하지만 돈은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돈이 있어야 아주 작은 것도 누릴 수 있게 된다. 계급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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