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은님’이 ‘후배님’이라고 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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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은님’이 ‘후배님’이라고 했더라면
  • 대표/발행인 이광우
  • 승인 2019.07.2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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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떠올릴 때마다 씁쓸했습니다. 시적 화자는 설렁탕집 여주인을 타박하고 있는 것인데, 여주인은 왜 고약하게 설렁탕을 갑질하듯 내놓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돼지 같은 주인 년이라고 욕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사회적으로 큰 갑질을 할 처지인 것 같지는 않은데,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면 좋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지난 16일부터 시행됐습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게 이 법의 취지입니다. 요컨대, 상호존중의 문화를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법에 따르면, 상사의 폭행과 폭언, 음주·흡연·회식 참여 강요, 허드렛일 시키기, 일감 안 주기, 업무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식의 교묘한 괴롭힘 등은 징계 대상이 됩니다.

간호사들의 ‘태움’ 관행처럼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허점이 많아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이 법대로라면 ‘갑질 생태계’에서 ‘최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사업주가 조사와 징계를 진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엽기적 갑질 행태를 보인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 같은 사람들도 ‘내로남불’ 식으로 아랫사람들만 징계할 수 있습니다. 양 회장 같은 사람이 이 법을 인사와 징계의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도 있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할 자가 남을 단죄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교묘하게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자)의 입장을 우선시하는 성희롱 범죄의 경우처럼, 아랫사람이 ‘내가 언짢았으니 갑질을 한 것’이라 우길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며칠 전, 관련 공무원을 만나 보니 이런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지난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발효됐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이런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공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문화방송(MBC)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MBC의 계약직 아나운서 11명은 지난 16일 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해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정규직인 손정은 아나운서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적으로 이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안팎에서 손 아나운서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나왔습니다.

반응을 살펴보니, 손 아나운서의 논리도 논리지만, 먼저 고압적인 말투에서 불쾌감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손 아나운서는 글을 시작하면서, 계약직 아나운서들을 향해 ‘애들아’라고 했고, 중간중간에 ‘너희들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저도 이 단어들이 고압적으로 들려서 언짢았습니다. 처음에는, 한 서른 살쯤 차이가 나나? 임원과 수습 아나운서 정도의 차이가 있나? 그 정도로 친한 사이인가? 라는 의문을 가졌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러는 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MBC노조(전국언론노조 MBC본부와는 다른 노조입니다.)는 성명을 통해 “손정은 씨도 본래는 착한 심성을 가졌으리라 믿는다. 다만 평범한 사람도 약자를 공격할 작은 정당성만 부여받으면 한없이 잔인해진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의 잘못이라고 믿는다”고 했는데, ‘악’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손 아나운서의 고압적인 하대(下待)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TV 광고에서도 한 적이 있습니다. 소주 광고였습니다. 치어리더로 보이는 젊은 여성 몇 명이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고참 선배로 보이는 여성이 탁자를 탁, 치면서 일어나더니 ‘야! 너 막 들어온 신입이’ 어쩌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칭찬이란 반전이 있긴 했습니다만, 신참이면 저렇게 막 대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80년대 후반에 서강대 국문과 김열규 교수님(작고)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교수님은 당시 학기 초 학과 MT에 참여했는데, 술이 떨어지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야, 가서 술 더 사와’라고 했고, 그 학생은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내심 놀라서 학생들의 관계를 물었는데, 심부름을 시킨 학생은 군대를 안 갔다 온 2학년이었고, 심부름을 간 학생은 신입생이었습니다. 교수님이 “1년 차인데 심부름을, 게다가 그런 식으로 시켜요?”라고 물었더니, 그 학생은 의아해하면서 뭐가 잘못됐냐고 되물었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의 판단은 이러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군사문화와 권위주의 척결을 외치는 와중에 오히려 그런 문화를 습득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교수님 세대나 70학번 세대만 해도, 고교 시절은 무지막지했을지언정, 대학에서는 4학년도 1학년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교수들도 학생들을 하대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일단 성인인데다, 나아가 지성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직장에서도 이런 문화가 팽배해 있는 것 같은데, ‘갑질’ ‘을질’ 운운하면서 갑론을박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님의 말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교수님은 존댓말과 반말로 이루어진 ‘존비어(尊卑語) 체계’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차별과 억압의 근본 원인이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존비어 체계를 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는데, 이 체계를 그대로 두고서는 진정한 민주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기업 등에서는 근래 들어 상호 호칭을 ‘님’으로 통일했다고 하는 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내의 호칭과 분위기가 그러했다면, 양진호 회장이 직원의 뺨을 후려갈기기 전에 “00님의 얼굴을 후려갈기려 하는데, 양해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하면서까지 뺨을 후려갈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한번쯤 존비어 체계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해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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