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공부하나?"...서울대생에게 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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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공부하나?"...서울대생에게 물었더니
  • 취재기자 정혜리
  • 승인 2015.11.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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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라," "잘하는 게 이것 뿐" 등 각양각색, "못생겨서" 이색 응답도
▲ 서울대 중앙도서관 로비에 붙은 벽보에 "당신은 왜 공부를 하시나요?"에 대한 답변이 빼곡하게 달려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공부는 제 인생의 낙입니다.”
“공부할 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제 유일한 ‘장점’이었으니까요.”

이 대답들은 "당신은 왜 공부를 하시나요?" 라는 질문에 서울대 학생들이 내놓은 대답들이다. 역시 '공부벌레'다운 대답들이다.

지난 달 24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벽보가 하나 붙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쓰인 문장 하나는 “당신은 왜 공부를 하시나요?”였다. 이 벽보를 붙인 이는 이 대학 대학원생인 최영환(미술학과 서양화·판화전공) 씨와 신혜원(서양화과 판화전공) 씨였다. 이들은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감, 타인보다 뒤처지는 기분의 조바심에 대한 고민을 학우들과 나눠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 벽보는 이들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벽보를 본 서울대생들은 4일까지 약 열흘 간 점착 메모지(일명 포스트 잇)에 답변을 써 흰 종이 위에 붙였다. 중앙도서관 로비와 관정관 2층에 붙은 벽보 두 곳에 총 500여 개의 답변이 달렸다. “못생겨서” 공부한다는 장난스러운 답변부터 점착 메모지 5장을 이어붙여 길게 적은 진지한 글까지, 학생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공부하고 있다고 적었다.

대한민국 최고 대학 학생들의 대답인 만큼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들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공부에 대한 이런 '자기 과시형' 대답 중에는 “제일 잘하는 게 공부라 한다”거나 “공부보다 더 잘하는 것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그냥 둘 수 있나요?"와 같은 대답도 있었다.

공부가 습관이고 취미라는 대답도 있었다. 한 학생은 “우연히 남보다 잘해서 시작했고, 관성으로 계속해왔고, 그래도 아직은 재밌어서 지금도 하고 있고, 할 줄 아는 게 이뿐이라 앞으로도 할 듯”이라고 적었고, 다른 학생들은 “할 수 있는 게 이것 뿐이라 한다," '관성 때문에 몸이 한다," "공부의 본질은 '덕질'"이라고 적었다.

▲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위해," "최악이지만 끝장내지 않기 위해" 등 여러 가지의 공부 이유가 적혀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벽보의 답변 중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공부 이유는 역시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생계형' 답변이었다. 여기에는 "그래야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공부 안 하면 내 미래가 불안해서,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한다,” “공부라도 열심히 안 하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요. ㅠㅠ 열공합시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서,” "알 수 없는 불안감, 달려야 한다는 압박감" 등과 같은 대답들이 있었다. 한 학생은 “어렸을 땐 재밌어서, 고딩 땐 잘하는 거라서, 대학 저학년 땐 나와 세상을 알고 싶어서, 예비 사회인인 지금은 ‘생존’코자 합니다. 힘드네요”라고 대답해서 서울대 출신 취준생들도 생계를 위해 절박하게 생존해야 하는 현실을 표현하기도 했다.

행복한 가정과 물질적 부귀를 위해 공부한다는 '소시민적  답변'도 있었다. 여기에는 “화목한 가정 만들기,”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제 여자 친구를 먹여 살리려구요!” 등의 소박한 행복부터 "요트 사서 선상파티 해야죠,” “부자 되고, 행복하고, 돈 막 쓰고, 좋은 옷 입고”라는 구체적 물질적 목표를 공부 사유로 적은 학생들도 보였다.

직업이나 부를 통해서 신분이나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성공지향형' 답변들도 빠지지 않았다. 요새 유행하는 “똥수저에서 은수저로”를 공부의 목적으로 적은 학생도 있었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어서,” “장관 할건데요,” “봉황이 되어 승천하기 위해” 등 제법 구체적인 신분 상승의 목표를 제시한 답변들도 눈에 띄었다.

대한민국 1%의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지만 현재 공부를 왜 하는지 답을 잃은 '방향상실형' 답변도 많았다. "하다보니 계속 하는 거지,"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려고 공부했고, 꿈을 이뤄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 지금, 이 질문에 답할 게 없다," “그러게요... 왜 하고 있을까요....”라며 방황하는 심정을 담은 글도 있고, “크게 보면 삶 자체가 공부다. 왜 공부하냐 묻는 것은 왜 사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난 왜 살고 있는가 나도 몰라...”라며 철학적 방황 상태를 토로한 글도 보였다. 방향상실을 넘어 '초월형' 답변도 있었다. “그냥 해야 마음이 편하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 여기 있네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 서울대 관정관 내 벽보에 한 서울대생이 답변을 붙이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정혜리).

이타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진지한 답변도 있었다. “내 일생, 조국을 위해,”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존을 찾기 위하여,” "세상의 빛이 되어 따뜻하고 환히 밝히기 위해," "나 자신이 쓰일 곳에 제대로 쓰여지기 위해," "공부란 도구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기 때문에"라는 답변들이 여기에 속한다.

'진리와 지식 추구형' 같은 학구파적 답변도 있었다. 여기에는 “공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허위와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공부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해, 오늘도 나는 쉬지 않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공부가 제일 정직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났을 때의 뿌듯함과 성취감이 행복해서" 등과 같은 답변들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공부입니다. 전공과목 배우는 것도, 게임을 하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공부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백사장에서만 놀다가 수영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나요?”라는 답변에서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같은 공자 사상이 엿보이기도 한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이 벽보가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왜 공부해 왔을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에 의미가 있다"며 “'못 생겨서 공부한다'는 학생의 대답은 우리나라가 하도 외모 지상주의 세상인지라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장난같기도 해서, 나도 그 진의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학생들의 ‘공부를 하는 이유’ 답변을 모은 이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는 4일부터 14일까지 서울대 중앙도서관과 74동 예술복합연구동 내 우석갤러리에서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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