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손입분, 김길천, 손응교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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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손입분, 김길천, 손응교를 아십니까
  • 취재기자 안나영
  • 승인 2019.05.2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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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 맞고 옥살이에도 국가유공자 서훈 받지 못해
울산박물관, 3·1운동 100주년 기념 특별전 개최

손후익은 외출할 때면 주위를 신경썼다. 일제 경찰의 감시 때문이었다. 후익의 아버지 손진인 역시 일찍부터 항일운동을 펼쳐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또 후익의 삼촌 손진형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동생 학익도 1927년 방어진에서 항일 격문을 뿌리다가 옥살이를 했다. 1905년 영남 유림의 을사조약 폐기 운동에 연명하면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 후익은 유림의 거유, 심산 김창숙을 만나면서 군자금 모금에 뛰어들게 된다.

후익과 심산 김창숙 집안은 서로 깊은 인연이 있다. 심산이 군자금 모금을 위해 만주에서 국내로 잠입했을 때다. 심산이 양산에서 울산으로 향하고 있던 중, 언양에서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그 바람에 심산은 허리를 크게 다친다. 이때 그를 울산 범서읍 입암으로 데리고 와 간호를 했던 사람이 바로 손진수 부자였다. 심산은 아무리 친한 가족이나 처자식이라도 이렇게 성의껏 간호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심산은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갖고 다시 만주로 향했다. 하지만 1927년 상해에서 왜경에 체포돼 국내로 호송됐다. 그는 재판에서 14년 형을 받고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무렵 손진수도 왜경에 붙잡혀 형을 살았다. 후익 역시 상해로 가려다 붙잡혀 옥살이를 하게 된다.

손후익의 딸 손응교가 심산의 둘째 아들 찬기에게 시집을 갔던 때가 이 무렵이다. 응교가 시집을 갈 때 심산은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신랑 찬기 역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붙잡혀 심한 감시 속에 있었다. 응교가 시집을 갈 때 조선의 대 유학자였던 심산 집안은 독립운동을 하느라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늘 감옥에 가 있어 그녀의 시집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이후 심산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일제의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돼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이때 심산을 돌본 이가 며느리 응교였다. 1939년 심산은 울산의 백양사에서 요양을 했다. 응교는 이때도 남편 찬기가 옥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양사까지 와 심산을 돌봤다.

이때 심산이 응교에게 비밀문서를 건네며 이 비밀문서를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해주게나라고 부탁을 했다. 응교는 심산의 건강을 돌보면서 비밀문서를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다. 이때 응교는 아들 위()를 낳아 이 아들을 업고 다니며 비밀문서를 전했다. 독립운동가를 만날 때마다 아이 포대기 안에 숨겨 놓은 비밀문서를 꺼내 은밀하게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응교가 이런 일을 하다 보니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애국자들은 모두 만났다. 그녀는 몽양 여운형, 만해 한용운, 벽초 홍명희, 나중에는 만주에서 이시영을 만나기도 했다.

1943년 심산은 아들 찬기를 상해임시정부가 있던 중경으로 밀파했다. 찬기는 응교에게 내가 늦으면 3년 뒤, 잘 되면 2년 반 뒤에 돌아올 수도 있으니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그녀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이 응교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찬기는 왜경의 눈을 피해 국내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망명생활을 하던 중 중국에서 사망했다.

이후 응교는 남편을 찾아 만주를 헤맸지만 결국 해방이 돼 중국에서 돌아온 임시정부 사람들을 통해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응교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당시 시아버지는 징역을 살고 남편은 집행유예를 받은 죄수라 내가 이 집에 시집오면 고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집에 시집을 보낸 우리 부모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면서 내가 비록 시집생활은 어려웠지만 이 모두가 자식이 잘 되라고 한 것이지 못되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부모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혁신유림 독립운동의 연락망이었던 손응교는 오랫동안 독립운동가의 딸, 아내, 그리고 며느리로 불리는 삶을 살았다. 친가의 손진인(조부), 손후익(부친), 손학익(삼촌) 등이 모두 독립운동가다. 그리고 혁신유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심산 김창숙이 시아버지다. 남편 김찬기도 남경 임시정부에서 순국했다. 손응교는 독립운동을 묵묵히 조력했고, 특히 혁신유림계의 가장 중요한 연락망이었다. 그러나 손응교는 가족들 모두 국가 유공자인데 본인까지 내세울 필요 없다며 서훈 신청을 아예 하지 않았다.

울산의 윤은숙, 이상열 작가가 그린 손응교의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울산의 윤은숙, 이상열 작가가 그린 손응교의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서훈을 받지 못해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가 아직 많다. 대표적으로 191942, 울산의 첫 의거였던 언양 만세 운동 때 일본 헌병과 경찰의 흉탄에 맞고 순국한 손입분과 같은 장소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당한 김길천이 있다. 이 두 분은 옥고와 태형을 당한 언양 만세운동 참가자들 모두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것과 비교가 된다. 여러 자료에서 사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 미 서훈으로 남아있다.

언양 만세운동 당시 흉탄을 맞은 손입분과 김길천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울산 박물관 기획전시실 2에서 전시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언양 만세운동 당시 흉탄을 맞은 손입분과 김길천의 모습을 담은 그림(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그리고 1930년대 학생 만세운동과 적색노조를 중심으로 항일에 앞장선 이순금이 있다. 일제 감시 인물카드가 여성 중 가장 많듯이 일제강점기 후반 가장 주목받는 여성독립운동가였다. 해방 후에는 이념 갈등 냉전시대를 맞게 됐고 월북을 한 후 북에서 여성 고위직을 맡았다. 그래서 지금의 서훈 기준에 맞춰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

울산의 윤은숙, 이상열 작가가 직접 그린 이순금의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울산의 윤은숙, 이상열 작가가 직접 그린 이순금의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이 밖에도 신간회와 마찬가지로 1920~30년대에 좌우가 모여 단일한 독립운동을 펼치려고 결성한 여성독립운동 단체 근우회 울산지회를 꼽을 수 있다. 김수봉, 김지순, 이말선, 정립분, 그리고 울산과 언양의 여자 청년회에 참여한 김복순, 박소선, 김명주는 연구 자료에서만 언급할 뿐 단 한 차례 제대로 챙긴 적이 없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는 3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이중 국가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15511명이다. 남성이 15079명이고 여성은 432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울산 본적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은 분은 모두 96명이다. 그중 여성은 단 2. 송명진과 이갑술이다. 송명진은 1919년 부산의 일신여학교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10일 태극기 50여 개를 학우들과 함께 만들어 11일 거리에 나가 만세를 부르다 잡혀 징역 5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이갑술은 학생운동 계열로 2019년 삼일절에 서훈을 받았다.

태어난 곳은 경북 봉화지만 울산에 와서 활동한 이효정도 서훈을 받은 국가유공자다. 민족 사립학교였던 보성학교 교사로 항일 교육을 했고, 서울에서 학생 만세운동과 적색 노조 사건으로 수차례 옥고를 겪었다. 그녀는 193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동구의 독립운동가 박두복과 결혼해 울산에 정착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여운형이 주도한 비밀결사 건국동맹의 울산 연락책을 맡기도 했다.

사) 항일여성독립운동 기념사업회가 의뢰해 김주영 작가가 제작한 작품인 이효정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사) 항일여성독립운동 기념사업회가 의뢰해 김주영 작가가 제작한 작품인 이효정 초상화(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올해 2019년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매우 뜻 깊은 해이다. 1919년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전 국민이 간절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됐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핍박은 자발적으로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그 불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은 191931일 시작돼 5월경까지 전국에서 지속됐기 때문에 각 도시마다, 지역마다 관련 사건과 인물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울산도 예외는 아니다. 울산에서도 19194월 초에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울산의 만세운동은 42일 언양에서 시작됐다. 그 뒤 병영에서 44일과 5, 그리고 남창에서 48일에 일어났다. 세 곳의 만세 운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이나 학교에서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준비한 사람들은 세 곳 모두 달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각 지역의 지리적·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각 만세운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울산의 만세운동과 그 밖에 항일운동의 역사에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들이 많다.

울산 박물관 입구에 특별전과 초상화 전시회가 진행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울산 박물관 입구에 특별전과 초상화 전시회가 진행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울산 박물관에서는 일제강점기 울산의 항일 운동의 역사를 소개하고자 201942일부터 818일까지 기획전시실 1에서 '울산의 만세운동_봄날의 뜨거운 함성' 특별 기획전을 개최한다. 울산의 첫 만세운동인 언양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서 42일을 개막일로 정했다. 그리고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 전시회 '오늘 그들 여기에'512일까지 기획전시실 2에서 함께 진행했다. 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는 전국 56명 작가와 울산 3명의 작가가 참여해 그렸다.

울산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기획전시실 2에서 초상화 전시회 ‘오늘 그들 여기에’를 관람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울산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기획전시실 2에서 초상화 전시회 ‘오늘 그들 여기에’를 관람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나영).

특별전과 초상화 전시회는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 흐름 속에서 울산의 만세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울산 박물관 관계자는 울산 사람들이 어떻게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위해 힘썼는지 재조명해 보고자 했다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치열한 독립투쟁에서 항일과 독립에 헌신한 여성의 역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전했다.

울산 남창고등학교 학생 김일중(19) 군은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울산의 독립운동과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됐고 그들의 희생에 무거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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