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처럼 바다 품은 부산에 영화제 만들자!”
상태바
“칸처럼 바다 품은 부산에 영화제 만들자!”
  • 취재기자 김한솔
  • 승인 2015.10.02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제의 산 증인, 이용관 BIFF 집행위원장 ‘전격’ 인터뷰
▲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과 시빅뉴스 김한솔 기자

20주년을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막을 올렸다. 1996년, 부산의 구도심 남포동에서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중심을 수영만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인 영화의 전당으로 자리를 옮겨 잡았다. 그렇게 많은 변화와 발전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과 같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도약했다.

영화제 개막과 더불어 부산이 붐비기 시작했다. 75개국에서 출품된 304편의 다양한 영화를 비롯해 전 세계 배우, 감독, 영화 관계자들이 부산을 찾았다. 지금 이 시각 그 누구보다 긴장되고 바쁜 이는 이용관(60)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 일 것이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이용관 위원장이 시빅뉴스의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이용관, 영화를 만나다
이용관 위원장과 영화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만남이었다. 어릴 적 그의 큰아버지가 동네에 있던 영화관의 지배인이었는데, 그 덕분에 극장은 그에게 자연스레 편한 놀이터가 됐다.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토토처럼 말이다. 극장 앞에는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어린 이용관은 극장 근처에서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뛰어놀았다. 이 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영화, 극장은 나에게 편한 친구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이용관, 그리고 영화제
그가 사실 처음부터 영화제를 꿈꾸고 인연을 맺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경기도 파주 출생인데, 중앙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부산에 오게 된다. 교수 초기에 그에게 영화제는 그저 막연한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 1992년에 이탈리아의 ‘폐사로 영화제’를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폐사로 영화제는) 영화제의 대한 인식이 머릿속에 박히는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영화제에 다녀온 이후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영화제 개최를 꿈꾸고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에는 경성대 교수인 이용관 위원장과 영화평론가였던 김지석 현 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그리고 현 영화제 부워원장인 전양준 씨 등의 젊은 영화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칸이나 베니스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만들자는 ‘음모’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 나갔다는 게 부산국제영화제 탄생의 정설이다.

사실 초창기에 영화제를 추진할 때, 이 위원장은 많은 장애물과 난관 때문에 이만큼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부산의 문화 예술인들을 설득하고 힘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90년대 당시 부산의 많은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부산이 문화 예술의 볼모지라는 소극적인 생각에 갇혀 있었다. 그는 “영화제라는 걸 하려면 커다란 동력이 필요한데,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는 그 기반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영화제가 성공했다는 것은 모두에게 감사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0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변화를 통해 대단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그에게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더욱더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짐이 주어졌다. 그는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의 뒤를 이어 2010년부터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영화제가 영화의 전당을 중심으로 더욱 더 아시아의 중심이 되길 원한다. 축제기간 동안 그저 영화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전당을 통해 1년 365일 꾸준하게 관객들이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제는 너무 커졌고 너무 유명해졌다. 그만큼 챙길 일도 많아졌고 만날 사람도 많아졌다. 그에게 스트레는 무엇일까? 그는 “영화제 일은 어떨 땐 괴롭고 어떨 땐 즐겁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이 괴로운데 또 매일이 즐겁다. 그 양면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내 인생의 딜레마인가 보다”라고 말했다.

이용관의 삶, 그리고 길
7세 남짓할 때 영화를 만나 평생을 영화와 함께한 그는 어느새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시점에 와있다. 이제 개인 이용관이 꾸는 꿈은 무엇일까? 그는 “영화제를 은퇴하고 나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린 학생들과 워크숍을 하는 할아버지로 남고 싶다. 무엇보다 ‘대안 영화학교’에 대한 꿈이 있다. 소외당하는 어린이들과 함께 대안 학교를 만들어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대다수 관객은 젊은이들이다. 영화제는 그들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용관 위원장은 젊은이들에게 할 말을 잊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주문한다. 그리고 자기의 꿈을 알기 위해서 많이 고민하고 또 많이 질문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요구한다. 그는 “이런 저런 일들도 경험하고 부딪혀 봐야한다. 그러면서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러면 좀 다른 세상이 열린다. 좋아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하게 되고 신도 난다. 한마디로 맷집도 생기고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도 생기는 거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세계적인 K-pop과 한류 붐을 타고 영화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이 위원장은 부산국제영화제가 한국 영화의 저력, 그 중심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이용관 위원장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철학은 마치 영화 한 편을 감상한 것처럼 선명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이용관을 만나고, 이용관이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나 영화제 일을 하게 된 것은 다행이고 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