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뭘 공부하냐꼬? 대학교 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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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뭘 공부하냐꼬? 대학교 갈끼다"
  • 취재기자 이정은
  • 승인 2015.09.2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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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만학 열정 뜨거운 부산 사하구 '형설야학교'를 가다

“선생님! 시각이랑 시간이랑 다시 설명해주면 안 돼요? 내는 아직 이해가 안 가는데...”

“선생님! 이렇게 적는 거 맞아요? 이거 와 이리 어렵노?”

피부에 검버섯이 듬성듬성, 주름도 자글자글.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손으로 연필을 잡고 꾹꾹 눌러가며 연습장에 한 자씩 정성스럽게 답을 적는 한 학생이 있다.

“어머니, 이건 이렇게 적으시면 되세요”하며 아직 앳된 목소리를 가진 젊은 선생님은 질문을 한 학생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질문하는 사람은 70대 할머니고,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은 20대 대학생이다. 밤 늦은 시각 이 할머니들은 순주뻘 되는 대학생들에게 야단까지 맞아가며 글을 배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내년 4월에 있는 고등 검정고시를 준비를 위해 문제를 푸는 학생의 손(왼쪽). 학생의 질문에 열심히 설명해주는 젊은 선생님(오른쪽) (사진: 취재기자 이정은).

‘형설지공(螢雪之功)’은 반딧불과 쌓인 눈빛으로 밤에 책을 보며 공부한다는 뜻으로 부지런하고 꾸준히 공부하는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반딧불과 눈빛에 비추어 공부하지는 않지만, 밤늦은 시각 그들만의 보금자리에서 ‘특별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형설지공의 뜻을 빌려와 배움의 때를 놓친 사람들에게 공부의 기회를 제공하는 곳, 그곳은 바로 ‘형설 야학교’다.

형설 야학교는 부산시 사하구 괴정 3동 새마을금고 건물 3층에 있다. 형설 야학교는 부산지하철 1호선 괴정역 10번 출구로 나와 괴정 골목시장에서 100m쯤 벗어난 곳에 있다. 낮이야 시장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북적하지만, 밤이면 가로등 불빛만 거리를 비추고, 주변 주택가는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없이 조용했다. 기자가 형설 야학교를 방문했을 때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가로등 불빛조차 어둡게 느껴졌다.

▲ 새마을금고 건물 3층 형설 야학교는 주중 늦은 밤 7시부터 10시까지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사진: 취재기자 이정은).

조용하고 어둑했던 밖과는 달리 형설 야학교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끊임없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수업하는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수업 듣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수업하는 선생님들이 웃음소리가 교실 바깥까지 전해져왔다. 형설 야학교 입구 첫방은 교무실이다. 수업하는 교실은 총 4개로 칸막이로 나뉘어 공간을 따로 분리해놓았지만, 선생님들이 자료를 준비하고 회의하는 교무실은 따로 칸막이가 없이 개방되어있었다. 마치 학생들이 교실을 오며 가며, 선생님들과 마주쳐 자연스레 질문이나 담소 등이 오갈 수 있게 되어있는 듯했다.

▲ 형설야학교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야학교 교무실 풍경이다 (사진: 취재기자 이정은).

형설 야학교는 비영리법인으로 1980년 10월 3일에 개교했다. 설립 초기 형설 야학교는 어려웠던 환경 때문에 공부를 포기한 청소년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의무교육이 시행됨에 따라, 이제는 청소년이 아닌 만학도(晩學徒)를 위한 배움의 터가 되었다. 올해로 설립 35년이 되는 형설 야학교는 현재 배움의 기회를 놓친 40대에서 70대 성인들이 20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만의 목표를 위해 공부하는 곳이 되었다.

형설 야학교에서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늦은 밤 7시부터 10시까지 수업이 진행된다. 직장을 다니는 학생들과 아직 대학생 신분으로 대학교를 다니는 선생님들의 편의를 위해 시간을 늦게 잡게 된 것이다. 형설 야학교 수업과목으로는 만학도를 위한 한글반과 검정고시 초·중·고급반이 있다. 올해부터 한자반, 한국사반, 기초 영어반까지 신설되어, 들을 수 있는 과목은 총 7과목으로 다양하게 늘었다. 형설 야학교 35기 교장 은현범(28, 동아대 산업경영공학과) 씨는 “검정고시를 친 어머님들께서 다양한 과목을 더 공부하기 원하셔서 이번에 새로 (여러 과목반을)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형설 야학교를 찾아오는 걸까? 형설 야학교는 활동 지역을 한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하구를 중심으로 두고 활동한다. 또 언제나 입학이 가능한 상시 모집이지만, 주로 검정고시가 끝나는 4월과 8월에 학교 홍보에 주력한다. 교장 은 씨는 “어르신 분들은 아날로그 세대기 때문에 자원봉사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사하구의 모든 동, 모든 가구에 직접 학생 모집 전단지를 돌립니다”라고 말했다. 교장 은 씨는 “자녀의 소개, 지인의 소개로 오신 분들도 있지만 저희가 돌린 전단지를 보고 오신 어머님들도 꽤 있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모집되어 형설 야학교에 등록한 학생 수는 올해만 70명가량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 약 730명의 학생이 형설 야학교와 함께 공부했다. 오프라인으로 학생들을 모집하는 반면 선생님들은 각 학교 홈페이지, SNS 및 여러 온라인 사이트에 광고를 내어 모집한다.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형설 야학교를 알게 되어 현재 1년 넘게 사회 과목 선생님으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진보경(21, 신라대 간호학과) 씨는 야학교에 처음 왔을 때 신기한 기분에 어리둥절했다. 진 씨는 사실 야학이라는 것은 책이나 영화에서만 봤는데,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운영되는 곳을 직접 보고 놀라웠다. 이미 다른 곳에서 교육봉사를 하던 진 씨는 "형설 야학교 선생님들의 학교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남달라 보였다"며 “다른 선생님들의 남다른 애정과 책임감을 보고 저도 여기서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형설 야학교의 선생님 지원 자격 조건은 없다. 학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어도, 또 교육학과 학생이 아니어도 된다. 은 교장은 “굳이 조건을 말하자면 최소 6개월 동안 해야 하는 정도가 조건"이라며 “학생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형설 야학교에 자원봉사를 하는 선생님은 총 33명. 은 교장에 따르면, 예전에는 모집된 선생님들의 수가 적어 일주일에 맡는 수업 시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선생님들은 한 명 당 한 과목을 맡아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한다.

형설 야학교에서 검정고시 중급 국사 과목을 담당하는 신라대 경영학과 송다영(24) 씨는 친구 소개로 선생님이 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이제 겨우 네 번의 수업을 했지만, 송 씨는 야학교에 오는 길도,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도, 모두 행복하다. 수업자료 준비로 바쁠 때마다, 그녀는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을 생각한다. 때로는 그녀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부분을 한 학생이 기습적으로 질문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다음 시간에 알려드리겠다고 말한 뒤 다음 수업시간에 꼭 알려주고 수업을 시작한다.송 씨는 “어머님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드려야지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형설 야학교는 번듯한 지상 건물 3층에 화장실과 에어컨, 또 수업자료를 준비할 수 있는 여러 컴퓨터와 복사기도 있다. 하지만 형설 야학교가 단숨에 교육장 환경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원래 올해 2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괴정1동 한 건물의 지하에 학교가 있었다. 건물 지하여서 여러 위험한 사고로부터 안전한 장소도 아니었고, 환기가 되지 않아 공기도 매우 나빠 공부하기에는 매우 열악했다. 그러다 지난해 우연한 경로로 익명의 독지가(篤志家)로부터 건물 임대 보증금이라는 큰 후원을 받았다.

이렇듯 형설 야학교가 비영리단체다 보니 일정한 수입 없이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그 점이 유일하게 힘든 점이라고 교장 은 씨는 말했다. 그는 학교 교장으로서 학교를 원만히 운영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투고한 적도 있다. 그는 “손을 놓고 누군가 우리는 알아보고 도와주겠지 생각한 적 없이 발로 열심히 뛰어다녔다”며 “물질적인 도움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정신적인 멘토가 있었으면 한다고 청와대 투고에 적었다”고 말했다. 투고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하구청 직원들이 형설 야학교로 와서 여러 협의가 지금까지 잘 진행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사하구청의 도움 외에도 형설 야학교는 교육부 주관의 ‘성인 문해교육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교육부로부터 여러 차례 금전적인 도움을 받았다. 성인 문해교육 지원사업은 저학년 성인에게 제2의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교육부에서 추진 중인 사업 중 하나다. 야학교는 2007년에 처음 선정되고 난 뒤에도 8차례나 더 선정되었고, 올해도 6월부터 12월까지 총 6개월간 590만 원을 교육부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형설 야학교가 건물 월세 및 기타 운영비로 지출하는 액수는 한 달에 대략 100만 원이니, 교육부에서 지원받는 돈은 학교 운영에 가장 큰 도움이 되고 매우 절실하다. 은 교장은 “하지만 교육부가 지원하기로 한 6개월이 지나면 다음 사업 모집 공고 때까지 추가적인 지원이 없어서 나머지 6개월을 학교 자체 내에서 운영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형설 야학교는 교육부 산하 문해사업 외에도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해피빈’과 다음의 ‘희망해’와 같은 모금참여 서비스를 통해 후원을 조금씩 받고 있다. 교장 은 씨가 여기저기 발품을 판 덕에 사하구에 있는 여러 기업이 대학생들끼리 비영리로 야학교를 열심히 꾸려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책상, 사물함 등 여러 기자재 지원을 아낌없이 하고 있다.

형설 야학교는 선생님의 자세로는 ‘강학(講學)’을, 학생의 자세로는 ‘학강(學講)’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수업을 진행한다. 한자 그대로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고 배우며, 학생은 선생님에게 배우고 가르친다는 뜻이다. 제3자가 형설 야학교를 본다면 젊디젊은 20대 학생들이 나이가 지긋한 60대, 70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가르침으로써 일방적인 봉사를 한다고 보일 것이다. 하지만 형설 야학교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고, 또 가르친다. 교장 은 씨는 “야학교의 학생들은 단지 젊은 세대보다 시험지를 못 풀 뿐이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신 분들”이라며 “그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커졌다”고 웃으며 말했다.

▲ 학생들을 위해 수업자료의 글자크기를 일일이 수정하고 있다. 또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판서를 잘 알아보도록 빨간색 펜을 이용해 큼직큼직하게 적으며 설명하고 있다 (사진: 취재기자 이정은)

강학과 학강의 관계에서 오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배려는 수업시간뿐만이 아니었다. 2교시 수업 준비를 위해 수업자료를 준비하는 한 선생님은 일반 교재에 있는 작은 글씨들을 학생들이 보기 힘들까 일부러 유인물 자료의 글씨를 크게 만든다. 일일이 타자를 치며 크기를 조절하는 수고스러움에도 선생님들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또 빨간색 보드 마커를 이용해 판서를 눈에 띄고 크게 적는 게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선생님들끼리 서로의 수업 노하우를 주고받기도 한다. “내가 (검정고시)합격한 게 다 이 선생님들 덕분이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떡도 돌렸다”고 말하며 검정고시를 합격한 기쁨을 선생님들과 나누는 학생도 있었다. 또 교장 은 씨는 학창시절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최대한 학창시절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 봄과 가을에는 소풍을, 겨울에는 학생을 위해 준비한 선생님들의 재롱잔치 학예회도 매년 한다고 말했다.

▲ 소풍, 학예회 외에도 매년 말에는 졸업식도 한다. 위 사진은 형설 야학교 선생님들이 따로 제작한 졸업증(사진: 형설 야학교 제공).

20년 넘게 손뜨개 장사를 했던 신모(61, 사하구 당리동) 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장사를 그만둔 뒤 지인의 소개로 야학교를 알게 되어 검정고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끼니를 거르고 헐레벌떡 오는 선생님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라면 몇 상자를 사 들고 온 적도 있다.신 씨는 “아직도 선생님들 얘기하면 고마움에 마음이 먹먹하다”며 “내 아들보다 어린 학생들이 무료로 이렇게 봉사하는 것이 너무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다. 

신 씨는 왜 야학교를 더 젊었을 적에는 알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수업을 듣고 새벽까지 공부해도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단다. 그녀는 집에서 야학교까지 걸어오는 길에 혼자 중얼중얼 영어단어를 외면서 온다. 그녀는 내년 4월 검정고시 합격을 목표로 잡고 공부하고 있다. “내가 좀 신뢰 있는 여자라, 부동산학과에 들어가서 손님이 믿고 찾는 부동산 일을 하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에게 봉사하자"는 형설 야학교의 교훈(校訓)대로 이곳의 선생님과 학생은 서로에게 아낌없이 나눠준다. 모든 세대가 꿈을 공유하고,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며 세상을 알아가는 이곳은 세상에서 제일 큰 학교, 형설 야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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