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5제(題),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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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5제(題), 네 번째
  • 칼럼니스트 박기철
  • 승인 2015.08.1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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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황령산 칼럼에 필자는 쓰레기와 관련된 글을 써왔다. 그 맥락을 이어서 2015년 1월 1일부터 매일 쓰레기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올해 12월 31일까지 쓰려고 한다. 그 중에서 우리 주변의 것과 관련된 최근의 12개 꼭지를 황령산 칼럼으로 갈음한다.

 

▲ 매년 6월 5일은 환경의 날(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인간중심의 환경과 생명보편적 여건

부산. 가는 비가 온다. 2015년 6월 5일 金.

신문을 보고 오늘이 환경의 날인 줄 처음 알았다. 달력을 보니 정말로 그렇다. 환경의 날은 1972년 6월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UNEP)에서 제정, 그 해 UN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우리나라도 1996년부터 6월 5일을 법정기념일인 환경의 날로 정했으며, 1997년엔 서울에서 UNEP 주최로 세계 환경의 날 행사를 개최하였다. 얼마나 좋은 취지인가? 그런데 환경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환경(環境)은 인간을 중심으로 동그란 반지(環)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경치(境)다. 영어로 환경을 번역한 'environment' 역시 가운데에 놓인 나를 둘러싼(environ) 세상 모든 것(ment)이다. 이렇게 환경은 다분히 인간중심주의에서 나온 단어다. 과연 지구에서 인간이 가운데 중심에 있을까?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낱말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도는 천동설과 같은 오해의 산물이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지동설로 우주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천동설과 같은 환경과 달리 지동설과 같은 단어는 여건이다. 생태계가 우리 인간에게도 주는(與) 조건(件)인 여건(與件)은 환경처럼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생명보편주의에서 오는 낱말이다. 인간이 건방지게 어떻게 환경을 자연이라 여기며 지킬 수 있을까? 다만 생태계 자연이 우리 인간도 살 수 있도록 마련해준 여건을 감사히 여길지언정,  자연보호, 환경보호라니? 좋은 말같지만 생태계가 살 수 있도록 마련해준 여건감사가 더 온전한 말이다. 그 은혜로운 여건이 헝클어지며 망가지지 않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중요한 일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일이다. 어려운 일은 쓰레기를 덜 배출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다. 너무도 버리고 사는 게 많은 플라스틱기 인류세에 사는 현대인의 삶이라 그 수준까지는 어렵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며 그리 살려고 조금이나마 힘쓰면 길(吉)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더 흉(凶)한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살아 있는 듯한 김광석(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아름다운 음악처럼 아름다운 거리

대구. 맑은 芒種의 현충일이다. 2015년 6월 6일 土.

외국 뮤지션들 중에 요절(夭折)하여 신화가 된 스타들이 많다. 재니스 조플린(1943~1970), 지미 헨드릭스(1942~1970), 짐 모리슨(1943~1971)은 거의 엇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엄청난 존재감을 불뿜다 약물과용으로 사망했다. 광(狂)팬(fan)의 총을 맞고 즉사한 존 레논(1940~1980)은 두 말 할 나위없는 전설이다. 카리브해의 레게 음악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킨 밥 말리(1945~1981)는 암으로 죽으며 그야말로 레전드가 되었다. 커트 코베인(1967~1994)은 인기 절정일 때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자살했다. 이후 드라마틱한 신화적 전설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인생과 음악이 하나가 되어 휠(feeling)이 넘치도록 충만한 음악을 들려 주었다. 티셔츠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도 요절한 뮤지션들이 많다.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정호(1952~1985)는 70년대 포크 음악의 무늬를 새긴 장본인이었다. 간경화로 사망한 김현식(1958~1990)은 포크락의 교본이자 모범이 되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유재하(1962~1987)는 짧은 음악인생이었지만 큰 족적을 남겼다. 목을 매 자살했다는 김광석(1964~1996)은 자살할 사람이 도저히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음악을 남겼다. 그는 감성적 통기타 음악으로 서정적 시를 읊은 음유시인이었다. 사후에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대구 중구 대봉동 구석진 골목에 김광석길이 2010년에 마련되었다. 정식명칭은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다. 후미지고 지저분하던 350m 어두운 골목길이 밝고 활기찬 아름다운 거리로 태어났다. 칠성시장, 서문시장과 함께 대구의 3대 시장이었지만 몰락하고 있었던 바로 옆의 방천시장이 살아났다. 그 활기 속에서 김광석은 이 거리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인상깊은 점은 많은 관광객이 오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쓰레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한 김광석의 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저승에서 故김광석이 이승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자기를 보고 위로 받으면 좋겠다.

 

▲ 소락도암의 이상적 모델(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이 집의 풍수지리가 좋게 된 연유

부산. 산에 가기 좋은 날이다. 2015년 6월 7일 日.

내 소망 중의 하나는 내 머릿속(spiritual) 주소로만 있는 소락도암(素樂道菴)을 지리적 주소도 있는 소락도암으로 만드는 것이다. 쉬운 말로 부동산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동산이란 수익용 부동산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은 능력이나 의욕이 없다. 그러니 단지 내가 살 하나의 지속가능한 터전을 마련하고 싶을 뿐이다. 쉽게 말해 집이다. 앞으로 소락도암으로 쓸 집을 위해 내 나름대로 정해둔 기준이 있다. 첫 번째, 절대 재개발되지 않을 곳이어야 한다. 재개발될지 모를 곳에서 불안하게 살고 싶지 않다. 두 번째,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너무 한적하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한적한 곳에서 며칠 쉬는 것은 좋지만 평생 살기는 부담스럽다. 세 번째, 산 중턱에 자리한 집이면 좋겠다. 산에 집을 새로 짓지는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를 미감있는 집으로 가꾸고 싶다. 그런 나의 조건에 맞는 이상적 모델이 바로 저 집이다. 사진에서는 큰 집으로 보이지만 집은 작고 앞 마당이 넓다. 이 마당밭에서 온갖 식물들이 자란다. 저 집에 살고 계신 두 어르신 내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집앞에서 안을 기웃거리니 들어오라며 마당에서 금방 딴 오이를 하나 주셨다. 1960년대부터 이 집에서 사셨다고 한다. 여기서 자식들 다 시집장가 보냈다고 한다. 말씀하시는 모습과 내용이 진솔하고 담백하시다. 나는 집에 관한 풍수지리를 믿지도 안믿지도 않지만 집에 사는 사람이 덕(德)을 베풀면 길(吉)하게 되어 복(福)을 받는다는 풍수(風水)의 이치를 믿고 싶다. 풍수가 좋은 집에서 사시는 할아버지는 후져 보이는 나를 맞이하며 복을 베푸셨다. 나도 언젠가 소락도암을 지으며 복을 베풀며 살고 싶다. 오는 손님을 따뜻하게 맞고 동네 쓰레기를 줍고 치우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동네를 가꾸고 싶다. 그 예행연습겸 오늘도 우리 동네에 버려진 쓰레기를 100L 종량제 봉투에 가득 주웠다. 다니는 사람들에게 깨끗한 길을 주어 복 베풀 요량으로.

 

▲ 깎여져 흩어진 내 머리카락(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재활용도 못되고 버려질 잡쓰레기

부산. 살짝 흐리다.가는 비가 온다. 2015년 6월 8일 月.

청나라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은 왜 젊은 사람들도 대머리처럼 보이는 변발(辮髮)을 했을까? 싸울 때 머리채를 붙잡히지 않으려고 했다거나 말을 탈 때 머리가 휘날리지 않으려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와닿지 않는다. 내가 그냥 생각할 때 그 주된 이유는 권력이다. 어느 왕이 대머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변한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자신이 권력자라고 한들 숱많은 부하의 머리를 옮겨 심을 수도 없고 고민만 했다. 이 때 어느 눈치빠른 신하가 그럴 듯한 구실과 명분으로 신하들도 머리를 박박 밀어 모두 대머리가 되도록 했다. 왕은 그제서야 자신의 대머리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서양사람들이 과거에 흰 양털 가발을 썼던 것은 정말로 그런 이유에서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아버지였던 루이 13세는 20세 때부터 머리가 빠졌다. 그래서 머리를 삭발하고 양털 가발을 썼는데 왕에게 잘 보이려고 신하들이 따라 했다. 내가 만일 대머리 왕이라면 나 역시도 신하들이 머리를 박박 밀어 대머리가 되고 양털 가발을 쓰면 위로받을 것같기도 하다. 내가 스무살 때는 머리카락이 굵고 숱이 많아서 고민이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가 부러웠다. 정말 좋은 걸 몰라도 너무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이가 드니 굵고 검은 숱 많았던 머리가 변해간다. 고릴라도 나이들어 가니까 등줄기 털이 희게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 머리를 다 깎고 나니 바닥에 내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졌다.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소설에서 아내 델라가 남편 제임스의 시계줄을 사려고 팔았던 아름다운 갈색 머리카락과 달리 흰 머리가 듬성듬성 박힌 저 짧은 머리카락은 내다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활용 쓰레기 봉투도 아니고 일반 잡쓰레기 봉투인 종량제 봉투에 담겨야 할 쓰레기다. 공자께서는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 했다. 변발도 이에 어긋난다. 부모로부터 받은 것 중에 머리카락(髮)도 있다. 이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저렇게 쓰레기를 만들었다. 오늘 불효했으니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 쓰레기 지구에서 싹튼 사랑

공상적 영화이면서 가장 현실적 영화

부산. 맑게 흐리다. 2015년 6월 9일 火.

<스타워즈>, <아바타>, <터미네이터>, <토탈 리콜>, <제5원소>, <매트릭스>,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엑스맨>, <월E>…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흥행에 성공한 유명한 영화들이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답을 알기 쉽다. 미국에서 만든 미래 공상영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런 영화는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단골 소재다. 그렇다면 이 열 개의 영화들 중에서 다른 것들과 차이가 나는 하나를 고른다면 무엇일까? 답은 맨 마지막 <월E>다.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다. 어린 애들이나 볼 만화영화라니 재미있는 미래 이야기일 것같지만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숱한 미래공상 영화들 중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가장 음산하고 암울하게 표현한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 때문에 지구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Class)다. 이니셜로 Wall E다. 지구 쓰레기 수거 처리용 로봇이다. 움직일 수 없기에 뚱뚱해진 사람들은 이미 대형 우주선을 타고 쓰레기 창고가 된 지구를 탈출하여 은하를 유랑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시 지구로 돌아가 사는 일이다. 그래서 황폐해진 지구에 혹시 식물이 하나라도 있는지 탐사용 로봇인 이브를 보낸다. 월E는 이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브는 월E의 방에서 꽃 한송이를 발견한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그녀는 인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려고 지구를 떠나고 월E도 자신의 임무를 뒤로 한 채 무작정 이브를 뒤따른다. 이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만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에게 해피하지 않는 경종을 준다. 정말로 우리가 지금 방식대로 살며 쓰레기를 내버리고 살면 영화와 같은 비극적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월E는 남녀 로봇끼리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면서 더럽고 지저분해진 지구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까지 나온 미래 공상과학(SF) 영화 중에서 가장 훌륭한 수작이다. 우리 현실의 쓰레기에 포커스를 맞추어 미래에 관해 가장 현실적으로 다루었기에.

 

▲ 조회 때 교장 선생님 훈화 (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바르게 살기 위한 쉬운 실천부터

부산. 화창한 초여름날이다. 2015년 6월 10일 水.

이 빗돌(碑石)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뚱해진다. 뚱하다란 못마땅해 시무룩해진다는 뜻이다. “바르게 살자.” 얼마나 좋고 바람직한 말인가? 그런데도 기분이 뚱해지는 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마치 어릴 때 부모로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라,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부지런하게 살라는 훈계조의 말을 또 듣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강요하는 것처럼 여겨지면 좋은 말도 뻔해서 듣기 싫다. 얼마 전 중국학을 전공하는 지인이 중국인 학자들을 안내할 때 저 비석에 새겨진 문구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난처하고 했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직접적 표현을 꺼리며 뭔가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문화다 보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외국을 방문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속내를 나타낼 때 두보나 이태백 등의 시나 고전 속 고사성어를 인용한다. 그런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저렇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표어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기는 곤란해서 노자도덕경에 있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돌려서 설명한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바르게 살자나 상선약수나 크게 보면 맥락이 비슷하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처럼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물처럼 살자고 하면 웬지 멋스럽고 예스러우며 뒷말이 없는데 바르게 살자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냐는 질문이 튀어나오기 쉽다. 정말로 바르게 살자고 할 때 바른 삶이란 무엇일까? 모호하다. 조폭들이 문신으로 새기는‘차카게 살자’보다도 명확하지 않다. 이 비석을 세운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는 1989년에 창립되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3대 관변단체 중의 하나로 중앙협의회 산하에 17개 시도협의회, 232개 시군구협의회, 3271개 읍면동협의회를 가진 전국적 조직이다. 이 협의회가 하려는 많은 사업 안에 나무심기 및 환경정화운동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회원들이 주도하여 쓰레기를 주우며 마을 청소라도 정기적으로 실천하면 바르게 살자라는 표어의 의미가 그나마 살아날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 쓰레기통이 된 의류수거함 (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사회적 신뢰도가 크게 추락한 결과

부산. 살짝 가는 비가 온다. 2015년 6월 11일 木.

동네마다 저런 의류함이 있다. 입다 버릴 헌 옷을 이 수거함에 넣어 이웃이나 빈곤국의 누군가가 다시 입도록 하려는 것이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요청 당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비치되었을 것같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자는 ‘아나바다’ 중에서 다시 쓰자는 것에 해당한다. 주로 장애인협회 등에서 저 의류함을 운영한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것이니 체계적으로 관리되지는 못하여 문제가 조금 있더라도 잘 운영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몇몇 몰지각한 자들 때문에 잘 운영되지 못하기에 애물단지가 되어 가고 있다. 의류함이 놓인 곳은 저렇게 쓰레기 무단투기 장소가 된다. 최소한 지켜야할 염치(廉恥)를 깨부수는(破) 파렴치(破廉恥)한 작자들은 저 안으로 음식물 쓰레기 등 온갖 쓰레기는 물론 애완동물 사체까지 투하시키기도 한단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분노나 증오가 일어 심성이 뒤틀려 화를 풀려고 그러는 것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개 좋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다. 절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파렴치범이 있다는 사실을 들으면 그들이 강력 범죄자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해 의심하며 절대악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게 된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 의심이고 확신이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 정도는 악하기보다는 못된 것이다. 다행이 못된 사람들은 극소수이기에 세상은 무법천지가 안되고 아직 살 만 하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듯이 극소수의 악이 대다수의 선을 몰아 내기 쉽다. 순하게 사는 대다수의 선은 집요한 극소수의 악을 당해낼 재간(才幹)이 없다. 그래도 도리(道理)는 있다. 도리란 대다수 선이 좋은 관계를 이루며 서로 사이좋게 사는 일이다. 그리 사회적 신뢰망을 촘촘하며 튼튼하게 엮어야 할 텐데 우리의 사회적 신뢰도 점점 떨어진다니 안타깝다. 물질만능주의, 황금지상주의, 인간중심주의에 찌든 경제우선주의에서 벗어나야 극소수 악이 구축(驅逐)되어 사회적 신뢰가 구축(構築)될 것이다.

 

▲ 저 함에 수거될 수 없는 베개 (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아직 운명을 알 수 없는 저 베개

부산. 밝고 화창하다.2015년 6월 12일 金.

이 의류함 주변은 깨끗하다. 바로 옆에 부동산 사무소가 있어서 그렇다. 의류함 겉면에 수거할 수 있는 품목과 아닌 품목이 적혀져 있다. 수거품목은 헌 옷, 신발, 가방, 커텐, 담요, 카페트, 누비이불이다. 수거안되는 품목은 솜, 베개, 여행가방이다. 어떤 기준으로 그리 나뉘는 걸까? 일단 솜으로 된 것은 안된다. 그래서 같은 이불이더라도 솜이 없는 누비 이불은 되고 솜 이불은 안되는 것이다. 아마도 솜 이불을 오래 쓰면 솜 조직이 뭉쳐져 이불의 기능이 떨어지기에 누가 다시 쓸 수 없어서 안되는 것같다. 또 플라스틱 재질로 된 바퀴달린 여행가방 등은 거의 망가져 버려지는 것이기에 다시 쓸 수 없어서 안되는 것같다. 여기 의류 수거함에 버려지는 것은 조금 손을 보아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수거-비수거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명확치 않다. 만일 우리의 물질적 풍요도가 높아지면 수거 되는 품목의 종류가 적어지며 수거 안되는 품목의 종류가 많아질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풍요도가 떨어지면 그 반대의 상황이 될 것이다. 천재지변으로 인해 물건이 귀해지면 저런 수거함 자체가 아예 없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의 물질적 풍요도에 따라 수거 가능 여부가 결정된다. 의류함 옆에 버려진 저 흰 베개는 수거안되는 품목에 들어간다. 하지만 저 베개는 내가 지금 사용하는 베개보다 훨씬 상태가 양호하다. 나보다도 물질적 풍요도가 더한 사람이 버렸나 보다. 멀쩡한데도 버려졌지만 저 수거함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재활용 쓰레기 봉투에도 못들어간다. 생활 잡쓰레기가 들어가는 종량제 봉투에 담겨져 소각되거나 매립될 신세다. 그것도 안되면 쓸어져 담길 쓰레기도 못되고 구천을 맴도는 불쌍한 쓰레기가 된다. 아직 흰 저 자태도 잃고 시커머니 흉물이 될 것이다. 그리 되면 베개의 말로가 최악이다. 저 베개를 베었던 인간의 운세에 좋을 리 없다. 생명없는 물건이더라도 귀하게 여기며 버릴 때 잘 버려야 할 이유다. 누가 가져다 빨아서 다시 쓰면 좋겠다. 나부터 그러고 싶었는데.

 

▲ 비너스 미녀 앞의 야수 고릴라 (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아주 오래 전 옛날에 관한 공상

서울. 좋은 주말이다. 2015년 6월 13일 토.

조각상 상점 밖의 저 고릴라상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포스작렬이다. 마침 지나가던 흑인 여인이 저 상점 안으로 들어 가려고 한다. 고릴라와 흑인 여인! 나는 이 둘의 매치를 눈 앞에 두고 인류의 기원을 생각했다. 이에 대해 창조론자와 진화론자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창조론자들은 바이블 창세기 제1장 27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 여섯 째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단위로 추정할 수 없다지만 창조과학자들은 그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6~8천여년 전으로 추정한다. 진화론자들은 인류의 탄생을 지적 설계자의 창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창발로 여기며 그 시점을 훠~얼씬 더 오래 전 과거로 본다. 우주는 약 138억년 전, 지구는 약 46억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25만년 전에 창발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로부터만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미토콘드리아 이브’라는 여성이다.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과 상반된 설도 있다. 파미르 고원과 바이칼 호수 인근 천산이 인류의 기원이라는 주장이다.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이브처럼 천산에는 5만년 전 인류 최초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나반과 아만이 살았다고 한다. 지적 설계에 의한 창조론, 진화론 관점에서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천산 기원설 중 무엇이 정설인지는 저마다의 세계관과 신앙에 따라 다르다. 생물학자들 분류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보노보와 함께 꼬리 달린 원숭이와 달리 꼬리 없는 유인원이다. 그렇다면 저 고릴라는 원숭이보다 사람에 더 가깝다. 아무리 조각상이지만 저 고릴라 모습이 강한 남자같다. 멋지다. 그 옆의 여인은 인류 최초의 미인인 뷜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시킨다. 아름답다. 비너스와 고릴라! 미녀와 야수다. 아주아주 오래 전 옛날에 이들은 쓰레기를 마구 버리며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보다 훨씬 더 온전히 건강하게 살았을 것같다.

 

▲ 하얀 약처럼 칠해진 페인트(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나무 의사보다 필요한 쓰레기 의사

서울. 좋은 휴일이다. 2015년 6월 14일 日.

세종의 명을 받아 신하들이 지은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개국을 송축하는 가사다.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이성계)․ 태종(이방원) 등 선대의 사적을 찬양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한글 창제 이후 최초의 국문시가이기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국어 시간에 꼭 배우던 고문(古文)이었다. 모두 125장의 장편의 서사시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은 제2장 첫 문장이다. “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l 곶 됴코 여름 하니.”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는 뜻이다. 나무를 600여 년 전에는 남간으로 불렀나 보다. 우리 어릴 적에는 땔감용 나무를 남간과 비슷하게 낭구라 했다. 나무를 뜻하는 한자 목(木)은 땅에 뿌리를 박고 선 나무 모양을 본 뜬 상형문자다. 중국인들은 木을 ‘무’라고 발음하는데 나무라는 순우리말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밑둥에 흰 색으로 칠해져 있는 저 나무(樹木)는 숲에서 자라는 나무와 다르다. 숲의 나무들은 재선충 등 심각한 전염병이 돌면 관리를 받고 잘려지기도 하지만, 공원의 나무들은 별 이상이 없어도 예방 차원에서 저렇게 철저한 관리를 받는다. 나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며 돌보는 직업도 있다. 나무 의사다. 나무를 진찰하며 예방하고 치료하는 나무 병원에서 일한다. 지금 저 나무는 아직 병이 없다. 그런데 여름철에 햇볕이 너무 세면 나무가 갈라져 그 틈으로 벌레들이 들어가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어 나무를 병들게 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수성 페인트를 발라 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하얀 약을 발라 놓은 것인 줄 알았는데 페인트라니 의외다. 비에 씻겨 녹으면 별 문제가 없을까? 아무튼 우리 인간은 저렇게 병이 없는데도 저렇게 먼저 알아서 손을 쓴다. 그런데 쓰레기로 인해 우리 사회가 심각한 병이 들었는데 저렇게 적극 대처하지 않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이제 쓰레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쓰레기 의사와 쓰레기 병원이 있어야 할 시대다. 뿌리깊은 나무처럼 뿌리깊은 나라가 되기 위하여. 깨끗하고 아름다운.

 

▲ 불안정해 보이는 화물차(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플라스틱류 쓰레기 운반시 필요한 점

부산. 조금 더워졌다. 2015년 6월 15일 月.

과적차량 단속의 기준은 총중량, 40톤, 축중량 10톤을 초과한 차량과 적재물을 포함해 길이 16.7m, 폭 2.5m, 높이 4.0m를 초과하는 차량이다. 여기서 총중량이란 화물을 실은 화물차 전체의 무게이며, 축중량이란 화물을 실은 화물차 바퀴(軸) 하나가 지면에 미치는 무게다. 초과 정도와 위반 행위 횟수에 따라 30~3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과적 차량을 단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적 차량이 도로를 파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속할 때 경찰서 만이 아니라 국토청, 도로공사가 합동으로 한다. 그렇다면 지금 저 화물차는 과적차량일까? 비전문가인 내가 판단하기에 중량으로 따지면 아니다. 저렇게 화물을 잔뜩 실었지만 실린 화물이 주로 플라스틱류 재활용 쓰레기들이라 무게가 그리 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이로 따지면 과적차량이 맞을 것같다. 바퀴 위 적재함이 포함된 화물의 높이가 4m를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6m 가까이 되는 것같다. 화물의 높이를 단속하는 이유는 그 높이가 높을수록 화물차 무게 중심이 높아져 전복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차량 전복은 인명피해가 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단속기준에 하나 빠진 것이 있다. 바로 화물의 부피다. 화물을 싣는 적재함 부피보다 어느 기준 이상으로 많이 실을 경우 단속해야 마땅하다. 내가 판단하기에 적재함 전체 부피를 100%로 본다면 20%를 초과해 120% 이상이라면 단속해야 할 것같다. 화물의 부피가 기준을 초과하면 주변 차량 운전자에게 심리적 불안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며 또 실제로 달릴 때 화물이 도로로 떨어지거나 화물차가 뒤집혀서 대형사고를 유발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지금 저 화물차는 그냥 눈으로 보더라도 적재함 부피의 두 배나 실었다. 120%를 초과하면 단속한다고 할 때 200% 가까이 되었으니 초과의 정도가 심하다. 유독 재활용 쓰레기 화물이니 저런 부피 초과가 가능할 것이다. 플라스틱 재활용 쓰레기의 부피를 줄이도록 압축하여 버리고 나르는 일이 가급적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 상표가 붙은 프리미엄 달걀들(사진: 박기철 객원 칼럼리스트).

달걀의 존재의미가 사라진 무정란

부산. 살짝 흐리기도 하다. 2015년 6월 16일 火.

닭의 알이라 달걀이다. 한자어 계란(鷄卵) 역시 닭(鷄)의 알(卵)이다. 영어로 계란인 에그와 관련된 표현이 많다. egghead(대머리, 지식인), bad egg(불량배), good egg(좋은 사람) 등. 그런데 egg와 관련된 새로운 뜻이 생겨나야 할 것같다. egg life(생명력 없는 삶). 왜 그럴까? 나 어릴 적에 계란은 귀한 식품이었다. 계란부침이나 계란말이는 나름 부잣집 애들이 싸오던 도시락 반찬이었다. 언제부턴가 하얀 계란이 누렇게 바뀌며 계란이 흔해졌다. 또 언제부턴가 계란에 상표가 붙어서 포장되어 팔린다. 그냥 낱알을 쌓아놓고 파는 벌크 계란과 달리 브랜드, 프리미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웰빙, 유기농, 신선한 달걀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패키징이 따르며 비싸게 팔렸다. 그런데 저 달걀들은 거의 온전한 달걀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짜도 아니다. 달걀은 달걀인데 달걀의 기능을 못한다. 우리나라에서만도 하루에 수천만 개가 팔리는 달걀의 99%에 해당된다. 병아리로 부화될 수 있어야 달걀의 존재의미가 있지만 저 달걀들은 그럴 수 없다. 암탉과 교배한 수탉의 정자를 품은 유정란이 아니라 암탉이 지혼자 배출한 무정란이기 때문이다. 포유류 암컷도 주기적으로 난자를 품어 수컷의 정자를 만나지 못하면 난자를 자궁 속 피와 함께 몸밖으로 배출하듯이 조류인 암탉도 알로 배출한다. 생명체가 나은 달걀이지만 생명력 없는 달걀이다. 저 달걀을 낳기보다 배출한 암컷들의 삶은 참혹하며 피폐하다. 양계장이기보다 계란공장의 좁은 우리(battery cage)에 갇혀 오로지 알을 생산하기 위해 꼼짝도 못하고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알을 못날 때까지 살다 폐계(廢鷄)로 처리된다. 나 어릴 적 볏집 꾸러미에 열 개씩 담겼던 하얀 달걀이 생각난다. 방사(放飼)하며 키운 암수 닭들이 서로 방사(房事)하여 나은 진짜 달걀이었다. 그 계란을 사 먹으면 쓰레기 하나 나오지 않았다. 볏집 꾸러미와 껍질은 그냥 흙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 시절로 절대 돌아갈 수 없으니 착잡해진다. 오래된 미래가 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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