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든 여자 독립군 박차정 의사(義士)의 생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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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여자 독립군 박차정 의사(義士)의 생가를 가다
  • 취재기자 김승수
  • 승인 2015.08.12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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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속 저격수 모티프...동상 발밑에서 고추 말리는 무심함에 가슴 아릿

<암살>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상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와 일본 요인들을 암살하는 독립군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8월12일 현재 개봉 3주만에 누적 관객 930만명을 돌파, 1000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 속 전지현은 매력적인 여자 독립군 저격수로 나와 관객들의 시선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인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군에 여자 저격수가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상상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총칼을 들고 온몸으로 싸운 여성 의사(義士)들은 여러명 있었다. 그 중 전설적인 여자 독립군 중 한 명이 부산 출신 박차정(朴次貞) 의사다.

박차정을 영화 <암살>과 연결시킬 수 있는 꼬투리는 있다. 영화 속에서 상해 임시정부 수반 김구 선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위급 지도자로 약산 김원봉(조승우 扮)이 등장하는데 그는 실제 인물이었고, 박차정은 그의 부인이었다. 김원봉은 독립투쟁 자금을 마련하고, 친일파 강원국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사키를 표적으로 하는 암살단을 조직, 파견하는 역할을 맡는다. 물론 영화속 박차정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없다.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扮)은 만주에서 가족을 잃고 일본에 극한의 증오심을 가진 여자 독립군으로, 별도의 미션을 가진 저격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扮)과 짧은 연심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나 박차정이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로 활약했고, 실제 전투에도 여러번 참여했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박차정의 삶의 기록에서 여자 저격수의 모티프를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런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바로 부산 동래구에 있다. 부산 도시철도 동래구 수안역 7번 출구로 나와 낙민역 방향으로 10여분 남짓 걷다보면, 동래고등학교 옆 작은 길 따라 박차정 의사의 생가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나온다.

지난 10일 영화 암살을 보고 난뒤 감흥에 젖어 박 의사의 생가를 찾았다. 표지판을 따라 40m를 걸어가니, 독립군의 생가 입구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좁은 길이 나왔다. 이곳이 생가로 가는 길이 맞나 싶어 멈칫했지만, 다른 곳엔 길이 없어 그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이 꽤 됐는지, 좁은 골목길을 지날 때는 거미줄 몇 개가 기자의 팔을 감싸기도 했다.

골목길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이 부근에 있다고 하는데 어디냐"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차정이 누구냐"고 되둘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는 반응이다.

▲ 박차정 의사 생가를 가기 위해 지나가야하는 입구.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다. 독립군 생가 입구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감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그 무심한 여대생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뒤로 하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아담한 단층 기와집이 나타났다. 문 앞에 '박차정 의사 생가'라는 작은 푯말이 보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내 데스크에 있는 사람이 “그냥 둘러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생가는 푸른 잔디밭과 기와집, 그리고 박차정 의사의 인생를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몇 개 서 있었다.

사학자 이송희 씨가 쓴 자료에 따르면, 박차정 의사는 1910년 5월 7일 경남 동래 복천동 417번지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조국을 잃은 비통함에 못이겨 일제에 항거하다 결국 자결했다. 어머니 김맹련은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었던 김두전(金枓全)과 육촌 사이였고 같은 집안의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과는 사촌 사이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차정 의사는 어릴때 부터 식민지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박차정은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동래일신여학교에 진학했다. 일신여학교는 미션계 사립학교로,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주력했다. 이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를 키워내 부산의 3.1만세운동 전개에 크게 공헌한 학교이기도 하다. 학창시절부터 박차정 의사는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독립이라며 독립운동에 동참해야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고 한다.

▲ 박차정 의사의 약력과 동래일신여학교 학창시절을 설명하는 안내판. 당시 박차정 의사는 <개구리 노래>라는 글을 교지에 실었는데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1927년부터 근우회(항일 여성운동 단체) 핵심 간부였던 박차정 의사는 1929년 12월 서울에서 여학생 시위사건이 있었을 때 배후세력으로 지목받아 신간회(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들이 합작해서 만든 항일단체) 인사들과 같이 검거됐다. 박차정 의사는 서대문 경찰서에서 고초를 겪다가 일시 석방됐지만, 1930년 2월 동래에서 다시 검거되는 등 검거와 석방을 반복했다.

▲ 박차정 의사의 근우회 활동을 보여주는 설명판. 당시 박차정 의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이어 1930년 1월에 전개된 서울 여학생 시위사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이 당시 모진 고문으로 몸을 상해 박차정은 한 달간 꼬박 치료를 받았다. 1930년 3월 쯤 중국으로 망명해,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했으며,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체였다. 박차정 의사는 의열단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 교관으로 여자 독립군의 교양과 훈련을 담당했다. 약력 자료에 따르면, 이 학교의 교가도 박 의사가 작사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박차정 의사는 1939년 2월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여하여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박차정은 남편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했던 1944년 5월 27일에 조국의 독립을 미처 보지 못한채 순국했다.

박차정 의사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당초 남한 정부에서 외면당했다. 그의 사상과 노선 때문이다. 반공에 초점이 맞춰진 당시 시대상황에서 사회주의자 박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박 의사의 남편인 김원봉도 자진 월북해서 북한 공산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까지 역임했다. 박 의사는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하지만, 남편 김원봉은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경성대 사학과 강대민 교수는" 박차정 의사는 사회주의 사상이 독립운동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인정된다"면서 "그런 실용적 사회주의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을 수 있었고, 반면 김원봉은 김구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독립운동가지만 자진 월북하고 북한 정권 고위직에 오른 전력 때문에 대한민국 훈장을 받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전 신라대 사학과 이송희 교수도 "박차정 의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힘쓴 박차정 여사의 생가는 현재 찾는 이가 거의 없다. 박차정 의사 생가를 관리하는 문화시설사업소의 한 직원은 박차정 의사 생가에 하루 세 명 정도 방문한다고 했다. 그는 박차정 의사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도 아니라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했다. 직원은 박차정 의사 기념관 건립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건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박차정 의사 숭모회(박차정 의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단체) 사무총장이기도 한 강대민 교수는 박차정 의사 생가를 필두로 해서 부산의 독립운동 기념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강 교수는 “부산보다 작은 도시에도 독립기념관이 있는데 제2의 도시 부산에도 제대로 된 독립기념관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 박차정 의사의 생가 전체모습. 푸른 잔디와 기와가 멋들어지게 어울리고 있다. 생가 안에는 안방과 부엌, 건넌방 등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 박차정 의사 생가 안방에는 박차정 의사 사진과 훈장증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박차정 의사 생가의 안방에는 박 여사의 사진과 연혁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안방에서는 박차정 의사의 사진과 부모 사진, 독립군으로서 활동 내역이 소개되어 있었다.

30도를 웃도는 폭염이었지만 박차정 의사의 생가를 둘러보고 난뒤 돌아오는 기자의 이마에선 땀 한방울 나지도 않았다. 박의사의 애국심에 대한 감동은 삼복의 무더위 조차 잊게 만들었다.

▲ 박차정 의사 생가의 대문 사진. 안내도가 곳곳에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안내도를 보기 위해서는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생가를 나온 뒤, 부산시 금정구 구서동에 있는 금정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 박차정 의사의 동상이 있다고 해 그곳을 찾아갔다. 광장은 썰렁했다. 화물 트럭들 사이로 솟아있는 박차정 의사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동상 밑에는 어느 무심한 사람이 그랬는지, 쌀, 콩, 고추를 말리는 널판이 널부러져 있었다. 유관순 열사 동상 앞에서 콩을 말리고 있을 사람이 있을까?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주민은 박 의사 동상을 가리키며 "저게 누구 동상이냐"고 묻자 "독립운동한 사람이지 않겠냐"고 말한 뒤 "그런데 박차정 의사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 금정구 구서동에 있는 박차정 의사 동상. 동상 앞에 쌀, 고추, 콩이 널부러져 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승수).

박차정 의사 동상은 박차정 의사 숭모회에서 세우고 현재 동래여자고등학교에서 동상을 관리를 하고 있다. 개보수가 필요할 땐 국가보훈처에서 지원금이 나온다. 박차정 의사 생가와 동상은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딸 박차정은 <암살>의 여주인공 여자 저격수처럼 목숨을 바쳐 항일운동을 벌였다. <암살>에 나온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의사의 생가가 부산에 있어도 여전히 박차정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역사를 잊은 나라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광복 70주년에 우리에게는 역사 교육이 필요한 곳, 박차정 의사 생가를 찾을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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