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 세대, 뿔난 세대, 쿨한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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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 세대, 뿔난 세대, 쿨한 세대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5.08.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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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지난 달 향년 94세로 세상을 뜨셨다. 4년 전에는 어머니를, 이번에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두 분 다 천수를 누렸으니 호상이라 위로해 주지만, 정작 나는 슬프고, 외롭고, 허전하다. 부모 잃은 자식을 예부터 고애자(孤哀子)라 부른 연유를 이제야 실감한다.

딸아이가 소셜 미디어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우리 집 ‘덕수’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적었다. 자기 눈에는 할아버지 생애가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주인공 덕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 아버지는 1922년 생으로 일제강점기에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고, 1945년 해방, 1950년 6.25, 1960년 4.19, 그리고 1970년대의 고도성장 시기를 고스란히 겪었다. 아버지는 <국제시장>의 덕수보다 연배는 조금 많으나, 그 당시 가장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멍에처럼 지고 살았으니,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저 개발 연대의 전형적인 산 증인 중 한 명이었다.

영화 속에 그려진 덕수는 해방 직전에 태어나 한국전, 파독 광부, 월남전 등의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거치면서 자식을 키워내고 일가를 구축했던 인물이었다. 오늘날 70대 중후반을 넘는 노인들이 바로 ‘덕수 세대’다.

덕수 세대들은 한결같이 자수성가했다. 부모들로부터 가난을 빼고는 별로 물려받은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었다. 내 아버지는 국민학교 때 어머니, 즉 내 할머니를 잃었고, 스물 즈음에 할아버지도 여의었다. 아버지 표현에 의하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독자(獨子)에, 인근에 친척도 없고, 부모가 남겨 놓은 재산도 없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어떻게 앞날을 영위할지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자녀 교육에 집착했다. 아무리 집안에 돈이 궁해도 자식이 책 산다고 하면 어떻게든 돈을 구해 주셨다. 우리 형제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는 3월 신학기가 되면 5남매를 나란히 앉히고 손수 깎은 연필 몇 자루와 노트 몇 권을 골고루 나눠 주셨다. 그리고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무거운 말씀 한마디를 던지시는 게 내 어린 시절의 연례행사였다.

내 아버지는 특히 자녀에게 짐이 되는 것을 극도로 삼갔다. 은퇴 후에도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대부분 사양하셨다. 그것은 당신은 연금으로 사니 부모 걱정 말고 그 돈을 보태서 각자의 자녀에게 책이라도 한 권 더 사주라는 취지였다. 특히 돌아가시기 20여 년 전, 시골에 작은 묫자리를 하나 장만하고, 조부모 묘를 이장했으며, 그 아래에 자신의 가묘(假墓)를 조성해서 “내가 죽으면 바로 여기다 묻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을 성묘 갈 때마다 역설하셨다. 그 때마다 나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례 치르는 일은 물론 어디에 매장할지조차 막막했다는 아버지의 평소 한 맺힌 말씀이 떠오르곤 했다.

우리나라 가족들은 <국제시장>의 덕수 이상으로 부모 희생이 점철된 애틋한 가족사를 저마다 안고 산다. 우리 자식들은 덕수 세대 아버지가 배부르다며 맛난 음식을 자식에게 내밀면 그 게 참말인 줄 알았다. 엄마가 안 춥다고 엄마 옷을 자식에게 건네면, 우리 자식들은 정말 엄마는 안 추운 줄 알고 덥석 엄마 외투를 받아 입었다. 우리 덕수 세대 부모들은 자식들이 어찌 그리 부모 마음을 모를까 하고 속으로 눈물지었을지언정 겉으로는 철없는 자식들을 탓하지 않았다. 특별히 무엇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들 일생에서 그들 스스로의 인생은 없었고, 오로지 죽을 때까지 자식에 대한 헌신과 양보뿐이었다.

2008년에 <엄마가 뿔났다>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변호사가 된 자식을 둔, 아이 잘 키운 엄마가 주인공인데, 그 엄마가 어느 날 자유를 선언하고 집을 나와 방을 얻어 독립생활을 시작한다. 그 동안 자식 키우느라 존재하지 않았던 개인의 삶을 찾겠다는 게 엄마의 변이었다. 이 드라마의 엄마는 덕수 세대의 엄마와 다르다. 젊었을 때 자식 양육에 육탄으로 봉사한 것은 덕수 세대와 동일하다. 그러나 드라마 속 엄마는 자식이 크고 출세했으니 자신도 이제는 가족 부양 의무의 짐에서 벗어나 응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외치는 점이 덕수 세대와 전혀 같지 않다.

오늘 날, 아래로는 30대부터 위로는 60대 정도의 부모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 보여준 엄마처럼 덕수 세대와는 다른 부모상을 가졌다. 그들도 자식과 가족에게 희생하지만 나중에는 그 반대급부를 원하는 일종의 한시적 희생과 유한 의무를 주장한다. 덕수 세대와 다른 오늘날의 부모 세대는 일종의 ‘뿔난 세대’다.

뿔난 세대 부모들은 최소한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기 때문에 자녀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나름대로 알고 있다. 그들은 비록 자신은 그렇게 되지는 못했지만 자녀는 그 성공의 길을 가게 하겠다는 자녀 교육열에 불탄다. 그래서 아이를 조기 유학 보내서 기러기 생활도 마다 않고 빚을 내서라도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낸다. 대학을 기웃거리며 대학생 자녀에게 선택과목을 골라 주기도 하고, 자녀가 대학 졸업하면 성형을 시켜서라도 회사에 취직시킨다.

이런 뿔난 세대 부모는 타이거 맘, 또는 헬리콥터 맘이라 불린다. 적극적으로 아이를 조련하는 이들 뿔난 세대 부모들은 말년에 남 앞에서 자식 자랑에 밀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식 덕에 해외 여행하는 호사를 누리고 싶은 자기만족적 욕심을 위해, 자녀에게 희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잘 키운 자식에게 용돈을 당당히 요구하기도 하고, 손주를 봐 달라고 자식이 말하면, 월급 달라고 응수하기도 한다. 만약에 고약한 며느리나 사위가 나타나, 그들의 자녀들을 불효자로 몰고 가면, 뿔난 세대 부모는 가차 없이 뿔낸다. 이게 뿔난 세대의 진면목이다.

최근 고등학교 동창이 카톡으로 보내온 글에서 왕년의 최고 여배우 최은희 씨가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적었다. 김정일에게 납치됐다가 탈출했던 최은희 씨는 만인이 사랑하던 연인이었지만 친 자식은 없고, 입양해서 키운 자식들이 있다는데, 모두들 최은희 씨를 모시지 않아 요양병원에 남겨졌단다. 친구 왈, “자식들 다 소용없다. 자식 위해 고생하지 말자. 남은 인생 우리를 위해 즐겁게 살자!”란다. 친구도 뿔난 세대 애비였다.

그럼 지금 아장아장 걷는 영유아들, 그리고 10대와 20대들이 부모가 된다면, 이들의 자녀사랑은 어찌 변할까? 차세대들은 자신들의 할아버지 격인 덕수 세대처럼 희생이란 의무만 다할까? 그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럼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격인 뿔난 세대처럼 의무도 다하고 동시에 권리도 요구할까? 이것도 아닐 듯하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전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환영받는 이유는 가족애라는 동서고금의 영원한 공통 가치를 다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차세대 부모와 자식 간의 가족애, 모성, 효도는 그리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양상은 변할 가능성이 크다.

뿔난 세대가 덕수 세대로부터 자녀에게 희생만 하지 말고 나중에는 누릴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듯이, 차세대는 뿔난 세대로부터 자식 잘 키워 놓아도 나중에 자식만 좋을지 부모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올지는 미지수라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그래서 차세대 부모들은 애초부터 의무도 적당히 하고 권리도 적당히 요구하지 않을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도 부모에게 적당히 의존하고 효도도 적당히 하지 않을까? 차세대 부모와 자식은 이런 형태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를 상호 인정하는 관계를 만들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게 바로 현실의 미국식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처럼 보인다. 나는 미국에서 이런 실화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인 사위를 보게 된 한인 재미 교포가 가구 등 혼수 풀세트를 한국식으로 딸에게 장만해 주었더니, 미국 사위가 “살림을 하나씩 장만하면서 보람을 느낄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았다”고 화를 내며 혼수 가구를 모조리 되돌려 보냈단다. 미래의 한국 가족애가 이런 미국식을 닮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결혼한 아들 집 현관문 비번을 누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시어머니, 사생활을 침해당했다고 수시로 현관문 비번을 바꾸는 며느리, 그 바뀐 번호를 다시 알려달라고 다그치는 엄마와 절대 안 된다는 아내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들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뿔난 세대도 덕수 세대처럼 설 자리를 잃고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부모와 자식 관계는 시쳇말로 점점 ‘쿨’한 관계로 변할 것이다. 새로운 ‘쿨한 세대’의 부모와 자식이 우리 미래에 탄생하려고 여기저기서 꿈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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