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내 고향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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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내 고향 중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 김민남
  • 승인 2019.02.1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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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잊을 수 없는 교훈..."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高貴)한 존재이며, 그래서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된다"/ 김민남

내가 다닌 고향의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던 선생님은 내가 가장 힘들어하던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高貴)한 존재이며 그래서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 60년 전 1958년 여름방학 선생님은 산사(山寺)에서 원고를 쓰시고, 나는 건강이 안좋아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그 절에서 수양(修養) 중이었다. 내 둘도 없는 초중고교 친구의 작은할아버지가 주지(住持)스님으로 계셨고, 나는 그 친구 어머니의 주선으로 '무상'으로 그 절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친구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였다. 지금도 기일을 챙기고 있으니 내게는 평생 어머니가 두 분이시다. 날 낳으신 어머니와 보살펴 주신 어머니시다

은사님의 말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高貴)한 존재이며 그래서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된다." 사진은 카네이션 꽃(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멀리서 '목이 길어 슬픈' 산노루가 그 절의 열 두 살 동자승(童子僧)의 낭랑한 독경(讀經) 목소리 만큼이나 애잔하게 우는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휘영청 보름달이 밝은 고향 남산골 그 신둔사(薪芚寺) 앞 언덕 갈대 밭에서 선생님과 나는 그렇게 만났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에 힘을 얻은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온 산골짜기를 헤매며 약초를 캐고 맑은 물로 냉수마찰을 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산을 오르내리며 매일 운동했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기에 이른 나는 그 후 남들보다 4년이나 늦었지만 대학 문을 열 수 있었다. 선생님은 지금은 그 신둔사 아래 넙적바위를 병풍 삼아 끝없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신 채 그토록 사랑했던 고향마을을 지켜보고 계신다.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사연은 또 있다. 대구의 한 고교 2년을 중퇴하고 고향에서 농사 일을 도우며 4-H 운동과 청소년 야학(夜學)을 하고 있을 때다. 선생님은 사람을 보내 나를 부르셨다. 고등학교 졸업장은 꼭 갖고 있어야 한다면서 선생님이 교장이셨던 고향 중고등학교에 기어이 편입시키고 숙식(宿食)은 읍내 학교 부근 당신의 댁에서 해결해 주셨다. 사모님이 건강이 안좋으신데다 마을 야학을 그만둘 수가 없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사코 버텼지만 선생님을 설득하는 데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야학은 또래 친구들에게 맡기고 틈틈이 마을로 가서 도왔다.

세월이 덧없이 한참도 더 흘러 1997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 연구교수로 1년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이 큰아들 따라 이주(移住)해 계셨던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찾아 뵈었다. 근 20 여 년 만이다. 캘리포니아주(州)가 제공해준 조그만 단칸 방에 사모님과 함께 계셨는데 한사코 우리 내외에게 방을 내주시고 당신들은 거실에 주무셨다. 사흘 동안 선생님 내외분을 모시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비롯해 시내 여러 곳을 관광하면서 나름대로 정성껏 모셨다. 귀국한 다음 해 선생님은 뜻밖에 사모님 영구(靈久)를 모시고 귀국하셨고 당신도 그때 과로로 쓰러지셨다. 작은 아들과 딸이 있는 경기도 부천의 한 병원으로 몇 번 병문안 갔지만 끝내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모님 가신 길 따라 소천(召天)하셨다. 선생님 내외분은 평소 소원대로 고향 남산골 신둔사 아래로 모셔졌다. 그 후 유택(幽宅)을 몇 번 찾았지만 엄하고 자상한 선생님 모습은 영영 뵐 수 없었다. 

인생무상(人生無常), 그렇게 우리 앞에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렀고 또 흐르고 있다. 지금 나는 무엄하게도 그때의 선생님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나서 한 번은 가게 된다. 하지만 나 같은 범인(凡人)은 그 '한 번' 앞에 슬픔도 기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돌이켜 보면, 그런 분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내게는 평생의 행운이다. 하늘이 내린 천복(天福)이요 청복(淸福)이 아닐 수 없다. 고도압축(高度壓縮) 성장과 험산준령(險山俊嶺)의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온 한 '노병'(老兵)의 스승에 대한 회포(懷抱)이자, 속죄(贖罪)요, 또 내 아이와 제자들에게 주고 싶은 가르침을 담아본 것이다. 내년 명절 고향 가는 길에는 꼭 묘소에 들러 흙 한 줌이라도 봉분에 올려야겠다.

2019년 2월 16일, 묵혜(默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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