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관계의 흔적'서 부산문화의 미래를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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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관계의 흔적'서 부산문화의 미래를 모색하다
  • 취재기자 이종재
  • 승인 2019.01.2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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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대 글로컬 문화학부 학생들, 예술지구p서 한마음으로 준비한 전시회 / 이종재 기자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는 자신의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9>를 통해 올해를 관통할 트렌드 중에 하나로 ‘뉴트로’를 꼽았다. 뉴트로란 신세대가 재해석하는 복고라는 뜻의 단어로 새로움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뉴(new)와 복고를 의미하는 레트로(retrospect)의 합성어다.

현재 부산에서도 젊은 문화인력들이 이전 세대의 문화 예술을 새롭게 해석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학생들이 한 마음으로 준비한 ‘관계의 흔적’이라는 전시다. 부산문화의 미래가 바라본 그 시절은 어떤 이미지일까? 

부산 금정구 금사공단에 위치한 예술지구p에서 ‘관계의 흔적’ 전시회가 진행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예술지구p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에 있던 공장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전시공간이다. 공간 자체가 금사공단에 위치하고 있어 공단 특유의 날카로운 소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전시관은 버스정류장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예술지구p의 외관은 예전 공장창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날카롭게만 들렸던 공장 소음이 전시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관계의 흔적’은 전시관 입구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시관을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탄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입구부터 60~70년대 다방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앞에는 그 시절에나 사용했을 법한 커피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주판, 성냥, 만년필 등 옛날 물건들이 두런두런 놓여 있었다.

바로 옆에는 옛날 다방에서 사용했던 게시판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그곳에는 "비원다방 벽화 그린 人 찾슴", "부두일 구하는 자 카운터에 전화번호 남겨둠" 같은 일부터 "주인장 팝-쏭도 틀면 안되오?"처럼 소소한 메모도 있었다. 팝송을 ‘팝-쏭’으로 적는 특유의 표현은 요즘엔 거의 보기 힘든 고어(古語)처럼 보여 흥미로웠다.

글로컬문화학부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다방은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곳 이상의 기능을 했다고 한다. 게시판을 이용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방이기도 했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군부 독재가 심하던 시절에는 깨어 있는 이들의 아지트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됐던 소통 공간 '커피하우스'가 떠올랐다.

'관계의 흔적' 전시회에서 재현한 60~70년대 다방 모습. 요새 보기 힘든 테이블과 테이블보가 신기하게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관계의 흔적' 전시회에서 재현한 60~70년대 다방 모습. 다방 한쪽에 자리 잡은 게시판에는 각종 연락 관계 메모가 적혀 있다. 다방은 옛날의 소통 공간이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다방 전시공간을 지나면 몇 점의 그림이 있다.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60~70년대 전시회에서 자주 걸렸던 그림 중에서 선별해서 전시한 것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는 해방 이후 부산에서 있었던 전시회 역사를 알아보기 쉽게 정리한 연표가 있었다. 연표 옆에는 전시공간이 많았던 옛날 부산 남포동 지도가 걸려있었는데, 현재 남포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시절 부산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를 재해석한 회화 작품도 있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예술가들이 장발 단속을 피하는 등 실제 겪었던 사실을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이다. 과거의 예술가들 작품에서 당시의 이야기와 당시의 사회상이 담겨 있었다. 

다음 전시 공간에는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직업군이 묘사되어 있었다. 먼저 표구상이란 직업이 눈에 들어 왔다. 그림 등 작품에 표구라는 작업이 가미되어야 전시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구상이란 직업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화공과 상수영감이라는 독특한 직업도 소개도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화공은 그래픽 디자이너, 상수영감은 SNS 마케터 같은 역할과 유사하다고 한다.

부산 지역 전시공간 연표와 옛날 부산 도심의 지도가 걸려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60~70년대 부산 예술가들을 재해석한 그림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관계의 흔적’의 하이라이트는 부산의 1세대 판화가이자 미술이론가인 이용길(1938~2013)을 아키비스트(기록물 보존 전문가)로 재조명한 곳이다. 글로컬문화학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용길 씨는 일생에 걸쳐 부산 미술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했다고 한다.

특히 전시장에는 그의 서재가 실물 사이즈 사진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모든 부산 미술사를 정리했다는 그의 헌신이 잘 드러나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재현되어 있는 그의 서재도 이미 오래 전에 부산 시립미술관에 상당 부분 기증됐다는 사실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기증한 사료가 10톤 트럭 분량에 달한다고 한다.

역사는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진다. 부산의 미술 역사가 남을 수 있게 노력한 이용길 씨의 헌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 지금 세대가 과거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용길 씨의 헌신 그 자체가 세대와 세대를 잇는 흔적 그 자체였다.

부산 1세대 판화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이용길 씨의 서재가 재현되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관계의 흔적’은 본 전시실을 벗어나 옆 건물에서도 이어졌다. 새로운 공간의 전시품은 2019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경성대학교 글로컬문화학부 학생들의 작품이었다.

이곳은 앞선 60~70년대를 보여주는 전시물과는 색다른 느낌을 전해줬다. 복고 분위기가 가득했던 앞선 전시에 비해 이곳에서는 한껏 젊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학생들의 꿈과 목표가 담긴 작품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청년들의 당찬 꿈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생들이 각자의 목표가 적힌 내용이 작품으로 걸려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전시물 하나에 한 주제를 온전히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시의 주제를 '관계'로 설정하는 건 모험과도 같다. 자칫하면 그 관계가 추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과거 세대와 지금 세대의 관계가 아주 구체적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계의 흔적' 전시회가 지금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세대가 다르다는 이유로 관계가 단절되고 신구 세대가 무관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번 전시회가 보여줬다. 이전 세대 예술인들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토대 위에 지금 세대의 헌신이 더해져 만들어진 작품이 서로 어울려 ‘관계의 흔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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