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기념관에서 참다운 의술, 진정한 인도주의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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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기념관에서 참다운 의술, 진정한 인도주의 배운다
  • 취재기자 이종재
  • 승인 2019.01.2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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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국내 최초 민간 의료보험 실행...가난한 환자들의 성자, 위대한 휴머니즘의 흔적 곳곳에 / 이종재 기자

장기려 박사는 돈이 없는 입원 환자에게 "오늘 밤 내가 병원 뒷문을 열어 놓겠으니 도망쳐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가난한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는 "이 환자의 병은 먹어야 낫는 병이다. 그러니 닭 두 마리 값의 돈을 처방하라"고 말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돈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남긴 ‘장기려’라는 이름 석자는 젊은 세대에게 낯설기만 하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성인’,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는 장기려 기념관이 있다. 일평생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의사인 장기려의 삶이 그곳에 있다. 

장기려 기념관은 부산시 동구 초량동의 장기려 더 나눔 센터 2층에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장기려 기념관은 '장기려 더 나눔 센터'의 2층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념관의 입구로 들어서자, 보통의 기념관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반적인 기념관이라면 화려함이 관객을 압도한다. 하지만 장기려 기념관은 소박함을 품고 있었다

소박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는 여러 요소가 기여했다. 조명은 관람이 불편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음악이었다. 기념관 내부에 어떤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기념관이 보여주는 것은 오직 그의 삶을 보여주는 진열품이었으며 그외에는 최소한의 조명 그것 뿐이었다. 

장기려 기념관의 내부에는 의사 장기려의 인생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차분히 사람들을 맞이 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기념관에는 장기려 박사의 인생 면면을 보여주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의사로서 그의 모습이었다. 그는 인술을 베풀던 의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최고의 외과의사이기도 했다. 특히 간 외과 부분에서 그의 의술은 더욱 빛났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냈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을 시술해서 국내에서 최초로 성공한 의사로 남아있다.

장기려 박사의 외과학 연구 친필노트 및 외과학회 초록집(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장기려 박사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개척자적인 '의료 행정가'였다. 그는 196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민간 의료보험을 창설했다. 이 청십자 의료보험은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토대가 될 만큼 당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가난한 환자들을 도우려했던 인술의 의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장기려 박사가 생전 사용했던 여러 물품도 기념관에 있었다. 그가 입었던 의사 가운과 사용했던 청진기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그가 외과의로서 사용했던 수술대였다. 여기에서 그가 수많은 목숨을 건져냈다는 생각을 하니 절로 경외스러움이 밀려왔다.

생전 장기려 박사가 사용했던 수술대. 여기에서 그는 수많은 생명의 목숨을 살려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장기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물품. 일본 대학에서 받은 의학박사 학위증 등이 보인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작은 기념관의 구석에는 장기려 박사의 인생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북한에서 의사로 살던 장기려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둘째 아들만을 데리고 남한으로 넘어왔다. 당시 북에는 자신의 아내, 다섯 명의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장기려 박사에게 북한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의헸지만, 그는 "내가 내 가족을 만나게 되면 다른 이산가족이 그 대신 북한의 가족을 만날 수 없지 않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두 아들과 기념관을 찾은 한 관람객은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장기려 박사님과 이 기념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내 아들들도 이분만큼 훌륭한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 기념관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기념관 내부에는 평소 장기려 박사가 한 각종 명언이 걸려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종재).

기념관이 산복도로에 자리잡고 있어 찾아 오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유행하는 요즘 이타적인 삶을 산 장기려 박사를 공부하려면 그만한 수고는 해야 한다. ‘나’를 찾고 알아가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공동체 역시 중요하다. 타인을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그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닮으려고만 해도 우리나라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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