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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의 생각이 멈추는 곳] 아름다운 들녁의 황혼빛과 제자들, 그리고 새해 덕담/ 김민남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내가 집에서 들 일을 돕고 농사일을 하면서 4-H 구락부를 운영하고 밤에는 청소년 야학을 하고 있을 때다. 해거름이 되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석양(夕陽)이 비칠 때면, 농촌의 산과 들은 온통 검붉은 색으로 물이 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어떤 화가(畵家)도, 어떤 시인(詩人), 또 어떤 작곡가도 그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조선조 불세출(不世出)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산수화>나 밀레의 <만종>도 그걸 따라가지 못한다.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田園)>도, 드보르작의 <신세계>도, 비발디의 <사계(四季)>도 담아내지 못한다. 농사일이 힘들고 고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물론 다를 바 없다.

시골 들판의 황혼은 아름답다. 인생의 황혼에서 제자들과 정담을 나누는 것도 아름답다(사진: pixabay 무료 이미지).

그로부터 60여 년이 훨씬 지난 무서운 세월에도 그 석양의 황혼빛 아름다움이 빛바래지 않고 초등학교 때 그린 한 폭의 수채화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왜 일까. 그 자체가 너무도 맑고 은은하고 아름다워서일 것이다. 또 하나는 등 구부리고 종일 불같은 뙤약볕 들판에서 일하다 잠시 허리 펴서 땀을 씻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채비를 해야하기 때문이리라. 그 순간만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解放)이다.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절한 대가와 보람과 함께 이런 휴식이 있어 견디고 참고 버티고 내일을 바라보고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그냥 습관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고뇌하며 삶의 가치를 찾아가고 또 쉰다. 요즘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하던가.

황혼을 흔히 인생의 마지막 한 장(場)으로 여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달리하면 연붉은 황혼이 한 폭의 수채화도 되고, 때로는 또 다른 내일을 여는 꿈과 휴식을 가져올 수도 있다. 고대 중국 진시왕이 찾아해멘 불노초(不老草) 같은 건 당연히 끼어들 틈이 없다. 그 불노초 자리에는 황혼빛을 아름답게 끌어안는 넓은 가슴과 영원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엊그제 대학 제자 세  친구와 기해년 새해를 맞는 점심을 함께 했다.

"우리가 캠퍼스 30년이 지난 오늘도 이처럼 만나 오손도손 식사하고 내가 너희한테 인생의 한 토막을 얘기할 수 있는 건 내게는 분명 큰 축복이다. 그보다 너희가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일상의 습관을 넘어 더 큰 하늘의 축복이자 아름다운 삶이다."

이는 점심을 끝내고 넉넉히 차 한 잔 하고 일어서면서 내가 그들 제자에게 한 새해 덕담(德談)이자 내게 속삭인 말이기도 하다.

2019년 1월 8일, 묵혜( 默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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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담#황혼##저녁이 있는 삶#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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