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가덕도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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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가덕도가 다가온다
  • 김성건
  • 승인 2013.01.1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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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해저 침매터널인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일명 거가대교가 12월 14일 개통된다. 거가대교 개통으로 인해 부산에서 거제까지 과거 2시간 10분 소요되던 이동 시간이 50분으로 단축된다.

 

이런 특혜를 누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섬이 바로 가덕도다. 가덕도는 2년 전까지만 해도 바닷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발디딜 수 없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부산-가덕간 연륙도로’가 연결돼, 누구나 육로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

 

가덕도는 부산시에서 가장 큰 섬이며, 9개 마을에 1천 300여가구만 거주하고 있어, 사람의 때가 거의 묻지 않은 청정섬이기도 하다. 이 청정섬의 남쪽 끝에는 가덕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항마을’이 있다. 대항 마을에는 ‘음달 마을’과 ‘양달 마을’을 비롯해 낚시꾼들의 천국인 ‘새바지 마을’과 일본 제국주의 시절 침략의 아픔이 묻어있는 ‘외양포 마을’이 속해있다.

 

 거가대교가 완공되기 전 대항마을로 향하는 길은 마치 신비의 돌을 찾아 떠나는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길 같다. 부산의 하단오거리에서 출발해 을숙도 하구둑을 지나 30여분을 달리면 녹산산업단지로 들어서게 된다. 산업단지내에서 ‘가덕도임시선착장’이란 이정표를 따라가다보면 가덕해안로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대항마을로 가는 모험이 시작된다.

 

도로는 아스팔트로 잘 닦여 있는 편이지만 중간중간에 포장이 덜된 도로와 50m도 채 안되는 간격마다 설치된 방지턱 때문에, 차가 쉽게 속도를 올리지 못한다. 차량 두 대가 아슬아슬하게 빗겨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도로가 연이어 나오고, 측면에서 몰아치는 파도는 마을로 향하는 차를 집어 삼킬듯한 기세다.

 

해안로를 무사히 통과하면 가파르게 올라가는 언덕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경사와 연이어 굽어지는 S자 급커브 길에 차는 연방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기를 여러번 반복하고 눈앞에 펼쳐지는 대항마을의 절경을 보면, 고된 모험길의 수고는 말끔히 씻겨내린다.

 

 한국 전통의 어촌체험마을

 

 대항마을은 오래전부터 계승되어 온 전통 어법(漁法)과 때묻지 않은 자연 경관 덕분에 ‘한국 전통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돼 있다. ‘육소장망’으로 불리는 숭어잡이 조업 방식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항마을에서만 사용하는 전통 어법이다. 그물망으로 연결된 여섯척의 배가 숭어떼의 이동 골목에 입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다. 어로장이 산위의 망루에서 숭어 떼의 움직임을 눈으로 살핀다. 숭어 떼가 그물망속으로 들어올 때, 어로장은 선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그물은 입을 닫아 숭어 떼를 포위한다. 포위된 숭어 떼가 그물망을 벗어나기 위해 힘차게 뛰어오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절로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210년 전통의 육소장망 조업 현장은 숭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3, 4, 5월에 관찰된다. 또 매년 4월에는 숭어 축제가 열려, 관광객들은 싱싱한 자연산 숭어의 맛을 볼 수 있다.

 

전통이라 하면 100년 동안 외롭게 불을 밝혀 온 ‘가덕도 등대’도 빼놓을 수 없다. 가덕도 등대는 근대 서양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등대 중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 원형이 거의 훼손되어있지 않다. 한국 전통 어촌과 어울리지 않는 웅장함과 이국적인 외형 덕분에 독특한 매력이 있다. 등대의 1, 2층에는 세미나실, 식당, 숙박시설 등을 갖춘 등대 체험관도 마련돼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1박 2일동안 ‘등대지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전통 체험을 비롯해 선상 낚시 체험, 통발 체험, 자연 학습 체험 등 깨끗하게 보존된 해양 생태계 체험도 사람들을 유혹한다. ‘선상 낚시 체험’은 1인당 4만원으로 바다 위에서 낚시를 즐기며 직접 잡은 고기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통발 체험’은 1인당 성인 3만원, 어린이 1만원으로 이틀에 걸쳐 통발 조업을 경험케 한다. 바닷가의 작은 바위나 돌멩이 밑에 서식하는 해양동식물들을 수집ㆍ관찰하는 ‘자연 학습 체험’은 학생들이 해양 생태계를 탐구할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된다.

 

 일제강점기시대 가슴아픈 역사의 마을

 

음달 마을의 남쪽 고개 하나를 넘으면 전형적인 어촌의 한적함이 묻어나는 작은 마을이 보인다. 100여년전, 일본군 제4사단 휘하의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주둔했던 외양포 마을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와의 격전에 대비한 포대 사령부를 주둔시키기 위해 외양포 주민에게 강제 이주를 명령한다.

 

그당시 외양포는 양천 허 씨 집성촌으로 대항마을에서 가구수가 가장 많았던 마을이다. 주민들이 고향을 버릴수 없어 떠나기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마을을 불태우고 총과 칼로 위협하며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대륙 침략의 군사 요충지인 외양포에 일사천리로 포진지 요새가 구축되고, 군 막사와 무기창고, 우물과 수리 시설 등이 완료되면서 1905년 외양포는 '진해만 요새 사령부'의 주둔지가 된다. 요새 사령부의 포진지는 육로와 해로, 어느 곳에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쉽지 않다. 완벽하게 '숨어 있는 요새' 그 자체였다.

 

외양포 바닷가에도 일본군 전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일본군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바닷가에 화약을 뿌려놓았다. 이곳으로 상륙하면 바닷가는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마는 것이다. 화약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갈밭을 파면 아직도 화약 잔재가 보인다. 기자의 어린시절, 명절이 되면 외양포 자갈밭의 화약 잔재를 주워 또래들과 불꽃놀이를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슴아픈 과거의 잔재인지도 모른 채. 지배의 역사든 피지배의 역사든, 역사는 흔적이 남겨져 보존될 때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외양포 마을은 일제강점기시대 역사의 통절한 반성과 교훈의 장소이다.

 

대항마을에서 맞이하는 새해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시기가 왔다. 숨가쁘게 달려온 한해를 돌아보며 차마 반성도 다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또 다른 시작을 서두르게 된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일출의 명소’를 찾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기자는 대항마을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1박 2일의 일정을 미리 체험해 봤다.

 

대항마을에는 250여명 수용 가능한 7개의 민박 시설이 있다. 기자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일출이 보이는 새바지 마을의 한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새바지 마을은 가덕도의 최남단 동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이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어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는 후면의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고,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시원한 해풍이 더위를 쫓아낸다. 하필 바람이 세차게 불어 풍랑주의보가 발령돼 대항마을의 선박 운항이 금지된 날이었지만, 후면의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새바지 마을 앞바다는 평온했다. 민박집 정면에 보이는 방파제에서는 대어를 노리는 낚시꾼들이 물고기의 입질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 생각에 기자는 외양포 마을로 갔다. 어린 시절, 일본군 포진지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었지만, 현재 소의 모습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포진지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외양포 바닷가로 발길을 옮겼다. 자갈밭을 1시간 정도만 파면 화약을 두 손 가득 담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깊이 파내려가야 화약 잔재가 나타난다. 불을 짚이는 순간 화약은 강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마치 짧지만 강렬했던 일본 제국주의 역사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옛 생각에 기자는 외양포 마을로 갔다. 어린 시절, 일본군 포진지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었지만, 현재 소의 모습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포진지 관리가 잘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외양포 바닷가로 발길을 옮겼다. 자갈밭을 1시간 정도만 파면 화약을 두 손 가득 담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제법 깊이 파내려가야 화약 잔재가 나타난다. 불을 짚이는 순간 화약은 강렬한 불꽃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마치 짧지만 강렬했던 일본 제국주의 역사처럼.

 

기자는 외양포 고개를 넘어 음달 마을로 내려왔다. 대항 마을에서 유일한 교육 시설인 천가초등분교를 찾았다. 어린 시절 또래들과 공을 차며 뛰어 놀았던 기억이 나지만,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임시 주차장이 되었다. 부산-가덕간 연륙도로가 연결되면서 하루 평균 600여명으로 늘어난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다.

 

추억을 뒤로 하고 선상 낚시를 하기 위해 낚시점을 찾았지만, 풍랑주의보로 인해 낚시배의 운항이 불가능했다. 기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어촌마을 풍경만이 돌아가는 내 발걸음을 위로했다.

 

 저녁 늦은 시각이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을 때, 민박집 주인장이 손수 밥상을 차려주었다. 자연산 ‘가덕 대구’로 만든 대구탕이었다. 가덕 대구는 원산지인 대항마을의 특어물이며 겨울철에 많이 잡힌다. 기자는 임금님 수라상이라도 받은 듯 황송한 마음에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가덕 대구는 고려시대부터 임금님 수라상에만 올릴 수 있었다고 하니, 황송한 마음이 과하진 않은 것이다. 그 명성만큼이나 쫄깃하고 담백한 맛도 일품이었다. 대구탕 한그릇을 비우고 나니, 장시간 동안 찬바람을 맞아 굳어있던 몸이 녹으면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기자는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 새바지 마을 언덕길에 올라 섰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수평선의 경계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예정 시간이 되어서도 해가 뜨지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예정 시간보다 20여분 지연된 오전 7시 40분경, 구름 사이로 조금씩 얼굴을 내미는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빛 새바지 앞바다에 세수를 한듯, 해는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한 얼굴로 방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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