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우월 본능과 자기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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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우월 본능과 자기 분수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5.06.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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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와 스탠포드라는 미국의 두 명문대학에 동시 합격했다는 천재 교포 소녀 뉴스가 소녀의 망상에 의한 조작극으로 드러났다. 소녀 아버지는 자신마저 딸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딸에게 정신병 치료를 받게 하겠다고 한국 언론에 알렸다. 진위 확인을 소홀이 하고 무조건 말한 사람의 말을 옮기면 그만이라는 국내 언론의 나태함도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언론은 일제히 “일류병이 낳은 한국 교육의 병폐,” “지나친 학벌 경쟁이 부른 비극”이라는 평을 쏟아냈다. 한국 자식치고 부모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과도한 기대에 갇혀 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은 결국 우리 한국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대기업 오너 반열에 오른 성완종 씨는 학력 콤플렉스를 돈으로 넘어서려고 한 듯하다. 그는 돈으로 권력도 샀고 사람도 샀다. 장학회도 만들고 정치 단체도 조직했다. 그러다 결국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예는 얻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간의 자존심은 과도한 권력 집착을 낳기도 하는가 보다.

지난주에는 세계 재난로봇대회에서 카이스트 로봇 팀이 1등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런데 이 뉴스는 첨단 로봇 기술의 진검 승부에서 한국 대학이 로봇 강국인 일본 대학들이나 MIT나 카네기멜론과 같은 미국 대학 팀들을 눌렀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일본의 <아톰> 만화를 보고 막연하게 로봇 꿈을 꾸던 한국의 청소년들이 <로봇 태권브이>로 희망을 키우고 열심히 노력해서 드디어 감격스럽게 일본을 추월했다는 민족적 스토리가 뉴스에 들어 있었다. 자존심이나 공명심(功名心)은 개인 문제를 넘어 국가 문제이기도 한 모양이다.

메르스 공포 뉴스도 우리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다. 홍콩, 중국 등지의 한국 관광객이 끊기고, 한국 사람이 외국 공항에 도착하면 보균자 의심을 받으며 정밀 체크를 당하고 있다는 뉴스가 올라오고 있다. 의료 선진국인 한국의 체면이 국제적으로 구겨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속일 수 없는 한국인의 ‘핵존심’이다.

인간의 자존심은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피파 회장 제프 블래터는 2002년부터 무려 17년 간 장기 집권한 전력을 가졌고, 월드컵 개최지 선정을 둘러싼 추문이 주변에서 들끓고 있었으며, 미국 FBI 수사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다가왔음에도, 79세의 나이에 회장에 다시 당선되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레츠 고, 피파!”를 TV 뉴스에서 외쳤다.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노회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그는 당선 4일 만에 전격 사퇴했다. 인간의 권력욕은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정치철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헤겔이 던진 유명한 질문으로부터 인류 역사를 풀이했다. 헤겔은 원시 시대에 한 명의 최초 인류가 다른 지역에서 진화한 또 다른 최초 인류와 조우했다면, 그 둘은 싸웠겠는가, 아니면 웃었겠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헤겔의 대답은 단연코 싸웠다는 것이란다. 그것도 피투성이가 돼서,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복종하게 되고, 다른 하나가 진 자를 지배하게 될 때까지 싸웠을 것이라는 게 헤겔의 역사적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헤겔의 역사관을 기반으로 후쿠야마는 인간은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고 했다. 이게 인류 역사상 추장, 부족장, 호족, 귀족, 왕이란 지배계층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이들 지배계층에 지배당하는 굴욕과 수모를 못 참은 피지배 계층의 우월본능에 따른 자각이 불붙어, 노예반란, 농민폭동, 시민혁명, 식민지 저항운동, 민주화 시위를 가져왔고, 그게 바로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도전이란 인류 역사로 나타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인간의 우월본능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 즉 역사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이 인간의 우월 본능이 명예욕, 공명심, 자존심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피지배계층을 자극했고, 피지배계층이 우월본능에 충실하기 위해 벌인 투쟁의 전리품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라고 했다.

이 이론은 왜 한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유독 빨리 성취됐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국은 좁은 땅에서 수많은 가족, 친구, 친척, 지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부대끼며 산다. 옆 동네 사촌이 땅을 사면, 즉각 내 배가 아프다. 친구 아들이 서울대에 가면, 즉각 내 자신의 자녀를 째려보게 된다. 추신수가 부진하고, 43세이면서 아직도 현역인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통산 2877 안타를 쳐 메이저 리그 역대 40위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그냥 나쁘다. 영업실적 부진, 승진탈락, 좌천, 낙방, 외모 콤플렉스, 가난을 겪고 있거나, 명품, 골프, 해외여행, 스키, 엄친아, 외제차가 자신과 거리가 먼 한국인들은 늘 좌절감, 우울증,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OECD 국가 중 자살 사망률 1위가 한국인 이유도 아마 남에게 지면 창피하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우리 땅에서는 기가 죽으면 어깨 펴고 살기 어렵다. 이게 성취 동기가 되어, 한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간 모질게 투쟁적으로 살았다. 그러다 민주화란 권리도 찾았고, 산업화란 부도 얻었다. 비록 삶의 질은 잃었다고 해도.  

우리는 자존심을 상하면 살기 힘든 사회에서 어찌 살아야 할까? 역시 공자께서 일찌감치 우리에게 군자의 길을 알려주었다. 공자는 부지불온(不知不慍)이라고 했다. 이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 사람들보다 공자님 말씀을 더 외우고 써먹는 한국 사람들이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를 삭이지 못한다. 말인즉슨 옳지만, 좀처럼 우리 몸과 마음은 자존심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명예롭지 못한 성공은 양념하지 않은 요리와 같아서 배고픔은 면하게 해주지만 맛은 없다”고 했다. 이는 남이 나를 알아주는 성공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성공이냐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에 올라 자존심을 살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쇼의 교훈이 인간에게는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이 교훈을 미리 깨달았다면, 성완종 씨는 기업인으로 충실했을 것이고, 블래터는 아예 복마전 피파 회장선거에 출마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길게 보면 더 인간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일 수도 있는 데 말이다.

일전에 우리 신방과를 대학 체험 프로그램으로 찾아온 한 고등학생이 검사가 장래 희망이라고 답해서 이유를 물으니, 그의 대답은 “폼나잖아요!”였다. 그 학생은 직업의 겉멋이 곧 인간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 직업에 대한 숭고한 철학과 가치관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6월 2일 SBS 뉴스에서는 한국과 서양의 청소년에 대한 직업인식 차이를 조사한 결과를 보도했다. 이 조사에서, 한국 청소년들은 자신의 몸을 화마 속으로 날려 인명을 구하는 소방관을 영웅으로 보는 경향이 서양보다 낮았다. 이는 미국이나 유럽의 청소년들에게 소방관이 꽤 존경 받는 직업군 중 하나라는 점과는 상당히 다른 결과다. 한국 청소년들의 연예인 선호도도 서양 청소년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조사 결과도 소개됐다.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직업보다는 명성과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 쉽게 얘기하면 폼나는 직업을 가져야 남보다 우월하다는 만족감을 갖는가 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학교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 분위기도 ‘그딴 것’을 배우거나 가르치라고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거창한 직업인과 이름이 유명한 명망가가 되어야 어디에 명함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그의 저서 <이미지와 환상>에서 영웅과 유명인사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영웅은 업적이 훌륭한 사람이고 유명인사(celebrity)는 이름만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 부어스틴은 영웅은 스스로의 업적으로 영웅이 된 사람이고, 유명인사는 미디어가 만든 인물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과거의 영웅은 풍모가 있었다. 과거의 영웅은 자신의 업적에 긍지를 지녔을지언정 이름 알리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우리 청소년들의 선호 직업들은 영웅 지향적이 아니라 유명인사 지향적인 것이다. 제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음 에피소드에서 진정한 영웅이 누구인지를 배웠으면 한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사령관이던 로보트 리 장군에게, 전쟁 후 한 보험회사가 사장으로 모실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리 장군은 고액 연봉을 받게 되지만 특별히 할 일은 없다는 조건이었으니, 이는 저명한 장군의 이름만 빌리자는 보험회사의 속셈이었다. 리 장군은 단 한마디로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내 이름은 파는 물건이 아니오(My name is not for sale)”라고.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들은 말 많은 국회의원들, 상속 재벌가들, 이름과 이미지로 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아닐 듯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그저 소박하게 자기 직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그들로부터 배울 게 많다고 느꼈을 때, 우리 자존심의 기준은 바뀌고, 우리 우월본능은 그리 중요한 삶의 목적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이 시대 전정한 영웅으로 존경해야할 사람들은 자식에게 희생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산업역군, 인명을 구하는 119 구조대, 몇 밤을 잠복근무해서 범인 잡는 형사, 낙도 교사, 소박하게 사는 착한 시민, 그리고 메르스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이 아닐까?

그들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수긍이 가긴 해도. 사람은 우월 본능에 의해 남을 지배하는 높은 데를 올라가고 싶은 원초적 꿈을 접기가 쉽지 않다. 나는 대학 때 영국 소설가 서머셋 모옴의 <받아들이는 길(The Way of Acceptance)>이란 수필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수필에서, 나는 인간에게는 못오를 환상과 삶의 길잡이가 되는 이상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혜를 배웠다. 모옴은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성공하려 할 때 인간에게 불행이 온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능력 한계를 너무 빨리 받아들이면 발전이 없고, 너무 늦게 인정하면 삶에 무리가 오고 주위를 힘들게 한다고 했다. 자신의 능력을 끝가지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9수, 10수에 도전하는 한국의 ‘고시 낭인’들이 생각난다. 고등학생 모두가 서울대를 쳐다보고, 취업준비생 모두가 삼성전자를 흠모하는 게 우리나라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지,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젖어 있는지 돌이켜 볼 여지가 있다. 그는 이 수필에서 교통사고로 두 발이 잘린 환자가 그 병원에서 가장 명랑하게 웃고 돌아다니는 환자였다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명랑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발이 잘린 자신의 단점을 즉각 인정하고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병원 내를 휠체어를 타고 웃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내 결점은 두 발이 없는 거야. 근데, 네 결점은 뭐냐?”라고 말이다.

이 환자 같이, 나도 세상을 초월하여 내 한계를 일찍 받아들이고 ‘허허’ 웃고 살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남과 비교하고 남을 이기는 게 일상인 한국에서는 더 힘들다. 못나도 끝까지 큰소리를 쳐야 한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은 10세에는 과자에, 20세에는 연인에, 30세에는 쾌락에, 40세에는 야심에, 50세에는 탐욕에 움직인다”고 했다. 언제 인간은 우월본능이란 탐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인생 칠십, 팔십이 되어 늙고 힘이 빠지고서야, 인간은 쟁취와 체면이란 인생의 족쇄를 벗고 각자의 분수에 순응하게 될까? TV 사극 <정도전>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권력 없이 단 하루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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