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다 익사한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도 봤지요" 군함도 강제징용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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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하다 익사한 시신을 소각하는 연기도 봤지요" 군함도 강제징용 증언
  • 취재기자 백창훈
  • 승인 2018.12.04 23: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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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주 구연철 선생, "이주노동자 아버지 따라 군함도에서 어린 시절 보내며 징용노동자 참상 목격" / 백창훈 기자

“민족의 적과 내통한 죄, 인민들의 피를 빨아 사리사욕을 채운 죄, 지도자 행세를 하며 민중을 기만한 죄를 물어 조선의 이름으로 처단한다.”

작년 7월 개봉한 영화 <군함도>에서 박무영 역할을 맡은 송중기의 피끓는 대사 일부다. 이 영화는 군함도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들의 처절하고 치욕적인 삶, 그 안에서 일어나는 조선인들 간의 갈등과 모순을 보여준다. 후반부로 갈수록 실제 역사와는 다른 탈출극을 선보여 신파극이라는 평을 낳았지만, 일제 강제 징용의 상징인 군함도를 최초로 묘사한 영화로 기록됐다.

작년 7월에 개봉한 영화 <군함도>. 소지섭, 황정민, 송중기, 이정현 등 화려한 배우진의 출연과 최초의 강제징용 영화에 개봉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스크린 독점, 실제 역사와는 다른 영화의 내용으로 흥행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사진: 네이버 무료 이미지).

실제로 군함도 탄광에서 학교를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낸 이가 있다. 바로 올해 87세를 맞은 구연철 선생이다. 그는 “영화는 예술이니까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크게 날 수밖에 없다. 폭동이나 총질하는 것은 다 과장된 것이지만, 일본놈들이 조선인 임금을 착취하고 유곽에서 놀았던 것은 다 사실이다”고 말했다.

군함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구연철 선생(87)이 그 당시 군함도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7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얘기지만 힘들었던 유년시절의 기억은 머릿속 강하게 박혀있다(사진: 취재기자 백창훈).

구연철 선생은 1931년 11월 27일 경남 양산군(현 양산시) 하북면 초산리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의 농작물을 공출하고 놋그릇, 숟가락 가릴 것 없이 모두 수탈했다. 더 이상 조선 땅에 살기 어려워진 조선인들은 만주, 일본으로 떠났다. 구 선생의 부친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구 선생의 부친이 조선 땅을 떠나 도착한 곳이 나가사키 현 항외 하시마(端島) 탄광이다. 구 선생은 “내가 떠나기 몇 해 전에 아버지께서 돈을 벌기 위해 먼저 하시마로 갔다. 나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1939년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와 어머니를 포함한 여섯 식구가 뒤늦게 하시마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빨간점이 하시마, 군함도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하시마는 일본 열도의 맨 남쪽 규슈에 있는 작은 섬이다(사진: 구글 지도 캡처).

다시 말해, 구연철 선생의 부친은 강제징용자가 아닌 이주노동자였다. 본격적으로 하시마 탄광 강제징용이 이루어진 것은 1941년. 19세기 하시마에서 석탄을 발견한 일본 대표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1890년에 하시마를 사들였고, 1940년대 일본은 태평양 전쟁 군수 물품으로 석탄이 급히 필요하게 되자 1943~1945년까지 조선인 연인원 약 500~800명을 하시마 탄광 강제징용에 동원했다. 일본 시민단체가 공개한 사료에 따르면, 1925~1945년 하시마에서 숨진 노동자는 1295명으로 그중 조선인이 122명에 이른다. 구 선생은 “내가 본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20대 초반에서 40대까지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자들이 구타를 당했고, 매일 비명소리가 집에까지 들렸다”고 말했다.

위에서 바라본 군함도의 모습.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섬 전체를 관람할 수는 없다. 최고 전성기 때는 6000명의 일본인이 이곳에서 살았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그 하시마가 군함도의 원래 이름이었다. 초기 하시마는 섬이라기보단 큰 바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섬을 사들인 미쓰비시가 섬 주변을 매립해 암벽을 둘러쌓았다. 그렇게 완성된 섬의 길이가 남북으로 640m, 동서 320m, 넓이가 6.3ha. 그 안에 학교, 콘크리트 아파트, 유흥시설을 만들면서 멀리서 본 모습이 마치 군함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 군함도, 일본식으로는 ‘쿤칸지마’다. 구연철 선생은 처음 본 하시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선착장에 올라서면 제방을 뚫어 만든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이 하시마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인데, 입구 위에 ‘영광의 문’이라고 쓰여 있다. 어릴 땐 이 말의 뜻이 참 궁금했다”라고 말했다.

구연철 선생은 이주노동자 가족으로서 정식으로 고용된 일반 광부용 사택으로 지어진 2층 목조주택에 살았다. 맞은 편에는 바위산에 연결된 9~10층짜리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곳에는 강제징용 노동자가 살았다. 구 선생은 “그 곳 지하는 습기가 많고, 통풍도 안 돼서 환경이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친 구연철 선생은 2학년으로 하시마에 있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해당)'에 편입했다. 조선인 학생은 충청도에서 온 여학생과 구 선생을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 학생들은 높이 20~30m에 폭이 1m 50cm 정도 되는 방파제 위에서 매일 구보하고 군사훈련을 했다. 구 선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집에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기도 했다. 그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배가 고파 조선인인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면 할머니께서 밀가루로 부침개를 만들어 그들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본 자료는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의 본적, 채용 및 해고 연월일 등의 사항을 기재한 전출입 명부다. 또한 탄광에서의 근무지 배정 또한 알 수 있다. 이 자료는 당시 고용된 일본인, 조선인들의 전출입 명부내용 중 조선인들의 명단만 따로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자료관에서 작성한 것이다(사진: 구연철 선생 제공).
하시마 탄광의 희생자가 적힌 문서(사진: 구연철 선생 제공).

지옥 같은 삶을 이기지 못하고 하시마 탈출을 시도한 강제징용 노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람이 죽어 나갈 때면 하시마에서 4~6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 선생은 “학교에서 그 작은 무인도가 보였다. 그곳에서는 모진 폭행을 당해 죽은 노동자들이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익사한 시체를 소각했기 때문에 연기가 몇 번 피어오르냐에 따라 몇 사람이 죽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넓어지면서 군수 물자가 부족해지자, 하시마의 식량 사정도 급격히 나빠졌다.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 위해 일본은 만주에서 콩기름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콩깻묵을 식량으로 배급했다. 만주에서 출발한 콩깻묵이 하시마로 오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오는 길에 대부분이 다 썩었다. 구 선생은 “썩은 부분은 잘라내고 중앙 부분만 먹었다. 먹어도 아무 맛이 없고 설사를 많이 했다. 콩깻묵을 먹고 배가 아파 일을 하러 나가지 못하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일본인 감독들은 웃통을 발가벗겨 무릎을 꿇리고 가죽 혁대로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말했다.

그렇게 광복을 맞은 하시마에서는 하루아침에 모든 일본인과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사라졌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광복되기 하루 전, 일본은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현 도심 복구작업에 투입했다고 한다. 이 때 원폭 피해를 당한 조선인들만 상당수에 이른다.

구연철 선생(87)이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과 빨치산으로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백창훈).

해방 직후, 하시마에서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온 구연철 선생은 대신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고 1949년 동국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한 그는 몇 개월 뒤 학교로부터 제적을 통보받았다.

1년 뒤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강제징병을 반대한 구연철 선생은 조국 해방투쟁을 위해 울산과 양산 일대에 있는 신불산으로 입산했다. 빨치산으로서의 구 선생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구 선생의 일대기 도서 <신불산>으로도 소개됐다. 그는 그렇게 20세부터 4년간 산에서 생활했고, 25세에 체포되어 45세까지 20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내가 체포되고 부산경찰청에서 검찰청으로 송치를 했는데 빨갱이를 잡았다고 소문이 났다. 그리고 아줌마들이 몰려와서는 ‘뿔이 없네?’라며 웅성거렸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하시마에는 다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일본인 5267명이 하시마에 거주하며 인구수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주요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하시마 탄광은 1974년에 끝내 폐광했다. 이후 하시마는 미국 방송사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소름 돋는 여행지 일곱 곳 중 한 곳으로 꼽히는가 하면 일본 영화 <배틀로얄> 촬영지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은 관광자원과 경제개발을 위해 하시마를 지옥과도 같은 강제징용의 소산지라는 사실은 뒤로 한 채, 메이신유신 시절 근대화의 산물,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를 앞세워 2015년 정식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성공했다. 구연철 선생은 “일본은 있는 사실 그대로 밝혀야 한다. 군함도 유네스코 등재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은 지금 조선반도를 기점으로 역학관계를 재편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고립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베는 평화를 택해야 한다. 군국주의를 택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군함도 조선 강제징용자 학대 현장의 목격자인 구 선생은 사연 많은 한국 역사 그 자체처럼 주름진 얼굴로 지난 일들을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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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2019-04-24 00:53:45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정선아 2019-04-24 00:49:14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