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고문한 일제 부역 경찰 찾아내 항일 공적 복원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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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고문한 일제 부역 경찰 찾아내 항일 공적 복원한 아들
  • 취재기자 윤민영
  • 승인 2018.11.2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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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이상국 씨 민족 정기 가족사...10년 노력으로 친일 경찰 하판락 추적 세상에 공개 / 윤민영 기자

"나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뿐이야." 남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내려오는 민간신화 <벌새의 물 한 방울>의 한 구절이다. 숲 속에 불이 났을 때 벌새 한 마리가 계속해서 부리에 물 한 방울씩 머금고 와 불이 난 곳에 떨어뜨린다. 이를 보고 다른 동물들은 “그런다고 뭐 되는 게 있느냐”며 비웃는다. 이 구절은 그 때 벌새가 한 대답이다. 이는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다.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이 구절과 어울리는 부자가 있다. 바로 故 이광우 독립투사와 그의 아들 이상국(58) 씨다.

현재 이상국 씨는 최신형 잠수함과 군함을 건조하는 대우조선해양(주) 특수선사업본부에서 부장으로 지내고 있다. 또 경성대학교대학원 한국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이상국 씨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수식어는 ‘독립투사의 아들’이다. 이상국 씨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부친 이광우 독립투사를 고문한 친일경찰 하판락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2000년 故 이광우(왼쪽) 독립투사와 아들 이상국 씨가 옛날 사진을 보며 독립 투쟁 당시의 얘기를 나누고 있다(사진: 이상국 씨 제공).

독립투사의 아들이었던 만큼 이상국 씨는 유년 시절부터 남다른 경험을 했다. 매년 광복절인 8월 15일마다 부친인 이광우 투사는 당시 부산에서 가장 큰 제과점인 ‘부산뉴욕 양과자점’에서 커다란 카스테라를 사와 생일파티를 했다. 이 날은 이광우 투사의 생일도, 다른 가족의 생일도 아니었다. 이광우 투사는 광복절을 두고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생일이 두 개란다. 오늘은 내가 다시 태어난 날이야. 좋은 날이지”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상국 씨와 가족들도 맛있는 카스테라를 먹을 수 있는 날이라 덩달아 행복한 날이었다.

부친인 이광우 투사는 만 17세이던 1942년 부산에서 부산진공립보통학교 동창생 5명과 함께 비밀결사대 ‘친우회’를 조직했다. 그는 일제의 군수공장인 조선방직(현 부산시 범일동 조방지역) 공장 기숙사와 부산진시장, 관부연락선 부두 등지에 ‘일제는 망한다. 대한독립 만세’는 제목으로 일제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만들어 살포했다. 또 일제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조선방직을 불태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친일경찰에 체포됐고, 경남경찰부(현 부산·경남지방경찰청) 유치장으로 끌려갔다. 이곳은 사회주의자와 항일활동의 죄상이 큰 사건만 취급하는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계였다. 항일전단을 살포한 행위로 끌려올 이유는 없었지만, 일제경찰은 비슷한 시기에 검거된 울산·부산 ML(마르크스 레닌)연맹 연루 사회주의자 사건과 연결시켜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이광우 투사는 당시 외사계 주임 하판락 경부보(현 경감)에게 약 10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하판락은 고문귀신을 뜻하는 고문귀로 악명이 높았다. 특히 주사기로 피를 뽑아 몸에 뿌리는 착혈고문으로 ‘착혈귀’라는 별명이 따라붙을 정도였다. 모진 고문을 당하던 이광우 투사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약 2년 5개월 동안 복역하다 광복을 맞이해 석방됐다.

시간이 흘러 1962년 ‘독립유공자 등 특별원호법’이 공포됐다. 하지만 이상국 씨의 부친은 이를 신청하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게끔 악랄하게 가해진 고문으로 인한 고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자발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것에 대한 주변인들의 비하와 비웃음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상국 씨는 “주변인들은 아버지에 대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생했다’는 반응보다 ‘괜히 나서면 저렇게 병신이 되어 나온다’는 반응이었다”며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크게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은 존경했지만, 자발적으로 항일운동을 한 소규모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또 그의 부친은 항일운동을 한 것에 대해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다. 부모님의 가슴에 못이 박혔는데 자랑할 일도 아니다”는 입장이었다. 그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광우 독립투사가 추후 복원한 항일전단. 항일운동 당시 사용했던 항일전단의 문구와 동일하개 나중에 만들었다(사진: 이상국 씨 제공).

하지만 1989년 4월 국가보훈처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신청 안내 공고’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상국 씨는 부친의 자랑스러운 과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독립유공자 등재를 신청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김천소년형무소와 부산형무소의 기록이 없어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방 직후 활동한 반민특위도 이승만 정권의 친일 청산 거부로 해체됐다. 정부는 독립유공자 등재를 위해 공적을 요구했는데 제출할 자료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결국, 이광우 독립투사의 독립유공자 등재 신청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유보됐다.

이상국 씨는 이때부터 직장에서 근무하는 평일을 제외한 모든 주말을 반납했다. 그는 부친의 공적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김천소년교도소도 수차례 방문했고 서울, 대전, 대구, 진주 등지의 역사연구소와 국가기록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약 10년의 세월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공적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하나의 보물찾기라고 했다. 보물이 한 걸음 앞에 묻혀있을지도 모르는데 포기할 수 없었다. 이상국 씨의 10년간의 노력은 보물을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폭풍우에 불과했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이상국 씨는 결국 보물을 찾아냈다. 1997년 부산일보 기사에서 아버지를 고문했던 친일경찰 하판락의 단서를 찾은 것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어버이날 포상 대상자로 신문기사에 실렸다.

그의 부친은 광복 이후 하판락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1949년 반민특위에서였다. 이광우 투사는 ML연맹 여겅수 옥사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됐다. 하지만 하판락은 그 자리에서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화가 난 이광우 투사는 하판락과 주먹다툼도 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해체됐고, 이광우 투사의 독립운동 사실 증명은 하판락을 통해서만 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공적 입증이 아버지를 고문했던 하판락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상국 씨는 하판락의 존재를 알게 됐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과거에 고문 사실을 부인한 이력이 있는 하판락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하판락은 친일활동으로 불린 재산으로 1956년 경남도의원에 출마하는가 하면, 대한노인회 수영구 지회장을 수차례 역임했다. 또 1997년에 지역 경로당 건립에 100만 원의 돈을 내놓아 부산시장 표창을 받았다. 가증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명예와 부귀를 누리고 있던 하판락인지라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국 씨는 1999년 여름, 하판락을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직 사회에 친일파들이 남아있고, 이를 기억해야 한다는 경성대학교 강대민 교수의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하판락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부친은 “하판락을 보면 직이뿌라!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고 분개했다.

친일경찰 하판락의 존재는 이상국 씨의 노력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는 1999년 10월, KBS 기자들과 함께 하판락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하판락의 입에서 아버지의 항일운동에 대한 증언을 받아냈다. 하판락은 이때도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상국 씨의 입에서 하판락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던 일제경찰 ‘김소복’의 이름이 나오자 입장을 바꿨다. 당시 하판락은 “나는 고문을 지시했을 뿐, 직접 고문한 것은 부하인 김소복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직접 고문을 한 적 없다는 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증언으로 인해 과거 하판락이 반민특위에 체포됐던 기사와 부친의 반민특위 증인 출두 서류가 독립운동 공적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자료가 됐다.

이상국 씨의 10년여의 노력 끝에 이광우 투사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또 하판락의 존재는 21세기이자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설날이던 2월 5일, KBS 뉴스를 통해 공개됐다. 이후 <추적60분>(KBS), <이제는 말 할 수 있다>(MBC) 등을 통해 만 천하에 드러났다. 이광우 독립투사는 자랑스러운 과거를 사회에 남기게 됐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다가 지난 2007년 3월 26일 오전 지병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광우 투사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이광우 독립투사 묘소 전경(사진: 이상국 씨 제공).

이상국 씨는 부친의 항일운동을 증명받기까지 약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버지의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뜻과 정신이라는 고귀한 유산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53세의 늦은 나이에 경성대학교대학원 한국학과에 진학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상국 씨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산지역의 항일운동가들을 밝혀내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직장에서 곧 정년퇴직을 눈 앞에 둔 이상국 씨는 인생 후반부를 다시 한 번 불태우려 한다. 이상국 씨는 “민족정기 선양과 애국심은 ‘나 하나쯤이야’가 아닌 ‘나 하나부터’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며 “독립투사의 자손으로서 고귀한 정신을 전파하는 것이 나의 인생 후반부의 일이다”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이상국 씨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새로운 인생의 나래를 펼치려는 그의 당당한 날갯짓이다.

이상국 씨가 부산시 영도보훈회관에 위치한 광복회 중부지회 사무실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산지역의 항일운동을 발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윤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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