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은 물질지향적이었고, 페루 인심은 인간적 배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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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은 물질지향적이었고, 페루 인심은 인간적 배려 그 자체였다
  • 취재기자 이주현
  • 승인 2018.11.2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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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현 기자

‘사람을 최우선으로 하는 서비스’라는 말을 우리는 여러 번 들어봤다. 이건 상품 광고의 단골 멘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람을 최우선으로 대접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그럼 왜 제주도 모녀는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으며, 종로 고시원 화재현장에서 가장 소중한 목숨을 구하고도 고시생은 바닥에서 회계사 문제집을 풀어야 했을까. 나는 지구 반대편 나라 페루의 시간 속에서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 고민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교환학생으로 간 페루에서 나와 친구들을 가장 처음 반겼던 것은 화장실도 갈 수 없었던 끔찍한 단수였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페루는 500년 만의 큰 홍수의 여파로 도시의 수도관에 문제가 생겨 단수가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여러 번 보도가 될 정도로 큰 재난이었다. 하지만 초반에 우리는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해 뉴스를 보고도 단수를 알아채지 못했으며, 마트에서 페루인들이 카트에 생수를 몇 묶음씩 사 가는 것을 이따금 아무 생각 없이 쳐다만 봤다. 그리고 우리가 물이 필요함을 뒤늦게 깨달았을 땐 마트의 모든 생수가 동이 났고, 우리는 탄산수로 머리를 감으며 식수난을 버텼다. 

택시를 타면, 택시 기사가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돈을 더 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렇게 치안 수준이 낮은데다 한국보다 각종 편의시설 역시 부족해서 페루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어려운 점들이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이 많았다.

내가 페루에서 가장 고생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나는 페루에서 집주인의 막무가내 통보 등의 이유로 세 번이나 집을 옮겨야 했다. 그때마다 나와 교환학생 친구들은 학교를 마치기만 하면 거리를 뛰어다니며 임대라고 적힌 집에 전화를 걸어댔다. 하지만 서툰 스페인어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어쩌다 영어 하는 분과 전화연결이 돼도 그곳은 미국 대사관이 있는 학교 주변이었으며, 교환학생인 우리가 그곳에서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가격이 높았다. 

이렇게 우리가 허탕을 치는 날이 계속되자, 나와 친구는 귀가 중 마트에서 맥주 1.2리터짜리를 사서 품에 안고 집에 왔다. 그리고 그날은 친구와 신세한탄을 하며 대낮에 맥주를 한 병씩 비우고 그대로 거실에서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다가오는 집 계약기간 때문에 정말 시한폭탄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에게 선뜻 자신의 집을 내어준 가족이 있었다. 이 가족은 리마(페루의 수도)의 UPC 대학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교포 가족이었다. 이 가족에는 세 자매가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가 마침 우리가 다니는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요란하고 막막하던 페루 생활에서 나는 세 자매의 도움 덕분에 빠르게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페루를 많이 이해하게 됐다.

세 자매는 집을 구해야 하는 내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자마자 이유를 물었다. 그리고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자신들의 집에 들어오라고 말했다. 사실 남이나 다름없는 나를 선뜻 집으로 들어오라며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으며, 한편으로는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세 자매의 집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세 자매는 내가 집을 구할 때까지 월세집을 찾아 스페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주면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셋째 단비가 만들어준 치킨. 큰 화로를 사용해서 주방이 엉망이 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까지 손을 걷어붙여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셨다. 그 맛은 한국에서 먹은 어떤 치킨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맛있었다(사진: 취재기자 이주현).

내가 페루에서 만난 한국 교포 가족에게 배운 것은 ‘조건 없는 베풂’이었다. ‘어느 누군가에게 내가 이렇게 이유 없이 베풀어 본 적이 있었을까’ 하는 반성이 저절로 생길 정도로 이 분들은 나와 교환학생 친구들을 진심으로 챙겨주고 생각해줬다. 주말이면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에 다니는 셋째 단비가 우리를 초대했다. 그리고 한식을 그리워하는 우리를 위해 탕수육이며 치킨이며 한국에서 먹었던 요리들을 뚝딱뚝딱 만들어 줬다. 그리고 어머니의 곰탕과 김치찜 역시 우리에게 향수를 모두 잊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우리가 집으로 갈 때면 김치며 잔 반찬 등 우리가 잘 먹었던 것들을 봉투가 넘치도록 담아주셨다.

나는 이 가족의 베풂이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해주고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했던 집 걱정을 비롯한 모든 근심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페루에서 만난 한국 교포 가족들은 물질 그 이상의 것들로 나를 채워줬다.

매번 세 자매와 놀다 집에 갈 때가 되면 세 자매의 어머니께서 음식을 가득 싸주셨다. 이렇게 챙겨주시고도 밥을 못 먹고 다닐 우리가 걱정이 되었는지 나중에는 첫째 지인이 언니와 둘째 미소를 통해서 전기밥솥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다(사진: 취재기자 이주현).

우리가 종종 들어왔던 ‘사람을 최우선으로 한 서비스’라는 말은 결국 물질적인 돈이 기반이다. 사람은 그 다음 서비스 대상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페루보다 각종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살기 편하고 좋다는 말을 잘 안 한다. 그 이유를 나는 페루에서 찾았다. 우리는 너무 물질지향적으로 살고 있고, 조건중심적으로 남과 사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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