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오브제 겹치기 기법으로 독창적 예술세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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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오브제 겹치기 기법으로 독창적 예술세계 구축
  • 취재기자 류세은
  • 승인 2015.05.13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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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푹 빠진 사진작가 쁘리야 씨의 '나만의 메시지 전하는 법'

사진작가는 관람객에게 사진으로만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전한다. 작가들은 늘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느꼈던 감정이 사진을 보는 관람객들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사진작가 쁘리야 김 씨는 사진을 찍어 겹치는 ‘중층적 재현’이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쁘리야 씨의 사진은 한 작품에 여러 컷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 멀리서 보면 흔들린 사진 같기도 하고, 초점이 안 맞은 사진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장의 사진이 겹쳐진 것이다. 그녀는 사진을 찍을 때 한 컷에 여러 장면을 겹쳐서 찍는 다중노출 방법을 이용하거나 주제에 해당되는 여러 대상을 찍고 나중에 작업할 때 하나씩 하나씩 합친다.

▲ 쁘리야 김씨의 작품들은 여러 사진을 겹쳐 하나의 작품이 된다. 때로는 초점이 안 맞은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이 흔들린 것 같기도 하다(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쁘리야 씨의 중층적 재현은 어린 시절부터 그 뿌리가 자랐던 것은 아닐까? 쁘리야 씨는 어렸을 때 조용한 아이였다. 한창 뛰어놀 6세 때는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거나, 곤충을 보면서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당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인생은 허무한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언니들의 영향으로 학창시절부터는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데미안>과 같은 소설책과 철학책을 주로 읽었다. 그 시절 <싯타르타>라는 책을 읽은 그녀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막연히 인도의 문화나 생활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런 학창시절의 기억이 모여, 그녀는 훗날 대학 인도어과에 입학하면서 인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쁘리야 씨에게 인도는 각별하다. 그녀의 예명인 쁘리야는 ‘사랑스러운,’ ‘친애하는’이란 힌디다. 그녀는 고교 졸업 후 어렸을 적부터 막연히 동경했던 인도에 관련된 학과로 진학하게 된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에 진학했을 때, 그녀는 인도어는 모두에게 생소한 언어라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단다. 실제로 그녀는 열심히 공부한 덕에 국비장학생으로 인도에 가서 인도의 문화와 언어를 배울 기회도 갖게 됐다. 그녀는 인도에서 공부하면서 더욱 인도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인도의 복잡한 신분제와 종교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기로 염두 해두고 여기저기서 자문을 구하던 중, 당시 서울대 문화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로부터 “문화를 총체적으로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이 문화인류학이다.” 이라는 조언에 확신을 얻고 문화인류학을 공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인도 대학교 중에 문화인류학과가 없었다. 그녀는 이 모든 학문을 아우룰 수 있는 사회학을 배우기로 했다. 1994년에 인도 델리 대학교 사회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인도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녀는 인도에 있을 동안 외로웠다. 영어에 능했던 것도 아니고, 힌디도 배우는 중이어서 누군가와 의사소통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인도에 관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가지고 있던 자동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게 된 것은 한국에 있는 형부가 쓰던 FM2 필름 카메라를 보내주면서다. 그녀는 “인도에 있으면서 인도에 대해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있었다”며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러한 행동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표현 방식이란 걸 알았고, 그때 당시 인도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1998년, 인도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돌아온 쁘리야 씨는 부산외국어대에서 인도어과에서 인도에 대해 강의를 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사진에 대한 열정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고민 끝에 강사 일을 그만두고, 경성대 사진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 대학원에서는 보도사진과 예술사진 두 가지 길이 있었지만, 보도사진보다 예술사진이 그녀에게 더 끌렸다. 보도 사진은 적극적으로 남들에게 나서서 찍어야 하는데, 조용한 성격 때문에 그녀의 선택은 예술사진이었다. 쁘리야 씨는 “사회학을 공부해서 사진학과 교수님들이 보도사진을 찍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술사진 쪽을 배우려고 해서 교수님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했다. 어머니는 먹고살기 힘들다고 좋아하지 않은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아버지도 그녀가 사진작가가 되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이 지어준 이름으로는 작가생활을 할 수 없다며 다른 이름으로 사진작가를 하라고 했다. 그녀는 “제 본명이 너무 흔해서 어렸을 때부터 싫어해서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며 “어떤 이름으로 할까 고민하던 중 인도에서 쓰던 쁘리야라는 이름으로 작가의 길을 걸어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성대 사진학과 석사과정 재학시절. 그녀는 동기들과 사진전을 준비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당시 교통표지판 같은 기호나 이미지를 뜻하는 도상(圖像)을 찍어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도로 표지판 등을 찍은 후 한 줄 코멘트를 달았다. 비상구 표지에 그려진 사람을 찍어놓고 <너에게 달려가는 중> 같은 서브타이틀을 달았다. 그녀의 도상 작품은 사진과 교수님께 많이 혼났다. 사진은 이미지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계는 생각이 달랐다. 당시 부산의 예술문화 단체였던 ‘대안공간 반디’의 화가 김성연 씨가 우연히 그녀의 작품을 보고 그녀에게 “작품이 너무 재미있다”며 “매년 반디에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있는데, 한 번 지원해 보라”며 연락을 해왔다. 그녀는 2004년 대안공간반디의 3명의 신진작가 한 명으로 뽑혔다. 반디 신진작가 중 사진작가가 뽑히게 된 것은 쁘리야 씨가 처음이었다.

그 후 그녀는 2004년 부산시립미술관에 젊은 작가로 당선되면서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대구 사진 비엔날레에서는 <Cyber Chatting>이란 작품으로 사이버 상에서 가상세계의 대상을 사랑하는 남성의 패티시즘을 참신하게 표현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일본과 문화교류 프로젝트인 ‘와따가따’를 통해 후쿠오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 2012년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열렸던 ‘여성문화예술기획’에는 한국 여성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앞으로 2015년 7월에는 인도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 3인 사진전에도 참가할 계획이다. 쁘리야 씨는 꾸준히 단체전과 개인전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가 정식으로 사진을 겹치는 중층적인 방법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Mother in My Being>이란 작품을 하면서부터다. 여섯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난 쁘리야 씨는 엄마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 들어가는 엄마를 안타까워하던 그녀는 엄마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의 모습을 남겨두기 위해 작품을 시작했다. 그녀는 엄마의 젊은 시절인 모습인 자신과 앞으로 그녀가 나이 들었을 때의 모습인 엄마를 찍어 겹치거나, 나이 들어 약해진 엄마의 모습을 갈라지고 오래된 벽을 같이 중층적으로 겹치면서 엄마의 쇠약함을 표현했다.

▲ 쁘리야 김씨의 시리즈로 오른쪽은 주름진 엄마의 손과 젊은 그녀의 손이 겹쳐져 있는 사진이고, 왼쪽은 엄마의 목부터 쇄골 밑까지와 갈라지고 오래된 벽을 함께 겹쳐서 표현했다(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쁘리야 씨가 사진을 겹쳐서 찍는 이유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언뜻 사진만 보면 흐릿하게 보여 오히려 더 잘 안 보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사진이 모여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현실 세계에서는 시간도 계속 흐르고 사람도 움직이는데, 사진을 찍으면 그 순간 멈추어 버린다”며 “그게 과연 진짜 내가 찍고 싶었던 사물의 이미지인가”를 고민했다. 그녀는 “내가 보고 찍고 싶은 순간을 다 찍어서 겹치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래서 중층적으로 사진을 겹치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작품 활동은 ‘2014년 멋대로 보는 부산- 보이지 않는 도시전’에 전시했던 <산복도로>에 잘 나타난다. 그녀는 사람들이 산복도로를 못사는 동네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산복도로를 보여주고 싶어서 산복도로의 여러 모습을 찍어 하나의 사진에 담아냈다.

▲ 쁘리야 김 씨의 ‘2014 멋대로 보는 부산-보이지 않는 도시전’에 참가했던 <산복도로> 이미지 중 하나로 산복도로의 여러 모습의 사진을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사진: 쁘리야 김 제공).

쁘리야 씨는 2004년 부산 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던 당시 어머니와 자신의 몸을 겹쳐서 한 몸으로 표현한 사진 앞에서 우는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김 씨는 “우는 관람객을 보고 ‘푼크툼(punctionem)’을 많이 가지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푼크툼은 라틴어로 관람객이 작품을 보고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이다.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관객들의 푼크툼이 다 다르다. 그녀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볼 때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자기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푼크툼을 많이 가지는 작품을 찍고 싶다고 한다.

쁘리야 씨는 늘 노력하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고 난 후에는 관객들과 좀 더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 경성대 대학원 언론홍보학과에 입학하여 2008년 광고홍보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 쁘리야 김 씨가 자신의 작품전 ‘중층적 재현’에 전시된 작품들 앞에 서있다(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쁘리야 씨는 사진이 우리 삶에 더 들어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이번에 연 전시회 ‘중층적 재현’을 준비하기 위해 유럽에 갔을 때 영국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나라 오일장처럼 시장이 들어선 곳에 사진전이 열리고 사람들이 장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쁘리야 씨의 아홉 번째 개인전을 중앙동에 위치한 작은 카페 ‘1982’에서 열었다. 덕분에 누구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그녀의 작품을 구경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은 핸드폰이나 디카로 자신을 찍거나 마음에 드는 것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아직 사진전이나 전시회는 어렵게 생각한다”며 “시장, 지하철, 식당 같은 곳에서도 사진전을 열고 많은 사람이 사진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 최근 쁘리야 김씨의 아홉 번째 전시회가 열린 중앙동에 위치한 카페 1982(사진: 취재기자 류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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