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유일 강제징용 유적지 '일광 광산마을'엔 아픈 역사의 흔적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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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유일 강제징용 유적지 '일광 광산마을'엔 아픈 역사의 흔적조차 없다
  • 취재기자 이지은
  • 승인 2018.11.23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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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한국인 노무자 강제동원해 구리·은 채광...폐광서 중금속 흘러나와 현재 입구는 폐쇄 / 이지은 기자

지난 10월 30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각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은 일본과 한국을 가리지 않았다. 국내 강제수탈의 국내 흔적 중 하나가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위치한 광산마을이다. 인근 달음산 등산 코스 때문에 광산마을을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제법 된다. 하지만 이 광산에서 몇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얼마나 많은 강제 수탈이 진행됐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남아있는 기록이라곤 한 줄도 없는 강제 징용의 아픈 흔적이 마을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산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위치한 일광광산 마을 위치. 광산마을은 옆의 달음산 등산 코스 중간에 있다(사진: 네이버 지도 캡쳐).

광산마을에 가기 위해서는 부산 지하철 동해선(일광방면)을 타야 한다. 동해선은 부산의 서면 근처 부전역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차를 타고 동래의 교대역, 해운대 벡스코역을 거쳐 일광역에 내린 다음, 마을버스 8-1번으로 환승해 광산 입구 정류장에 내려야 한다. ‘동잿골’이라는 식당 쪽으로 걸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벽돌의 광산마을회관이 보인다. 동잿골 식당 주인은 하루에 마을버스가 8시 30분, 11시 30분, 5시 30분, 이렇게 3번 운행된다고 했다.

광산마을 입구에 있는 ‘일광 광산鑛山 마을 이야기’라고 적힌 안내판(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어 보이는 광산마을.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일광 광산鑛山 마을 이야기’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이 안내판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표지다. 광산 마을회관 옥상에 올라가면 마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개천 옆 골목을 따라 낯선 형태의 집들이 담장도 없이 붙어있다. 비탈진 땅에 석축을 쌓아 지은 적산가옥들이다. 일정한 모양의 지붕들은 질서정연하게 놓여있고, 길고 수평적인 일본식 처마는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을 준다.

광산마을 회관 옥상에서 바라본 광산마을 풍경. 일정한 형태의 일본식 지붕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골목 사이로 들어서면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인지 의심이 들만큼 조용하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중 일부는 보수 공사로 인해 변형됐지만, 여전히 일본식 가옥 형태를 띠고 있는 집도 있다. 예를 들어, 지붕 밑에 눈과 비를 막는 눈썹 처마가 설치돼 있거나 창문이 많고 미닫이문이 달려있다.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관사로 사용한 건물이 보인다. 잘 보존돼 있어 충분히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지만, 'CCTV 녹화 중'이나 '주차금지'라는 글씨가 쓰인 건물 주위엔 각종 건설 기계들이 복잡하게 자리하고 있다. 광산마을 최원순 이장은 “관사는 현재 사람은 살지 않지만 개인이 소유하고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광산마을은 좁은 골목 하나를 두고 오래된 여러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1938년 5월, 일본은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해 한반도의 인력과 물자를 마음대로 빼앗았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자원 약탈을 목적으로 광산 개발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이 시기에 일제에 의해 일광 광산이 개발되면서 형성된 탄광촌이 광산마을이다. 개천 위쪽으로 관사와 일본인 간부급 사택이 들어섰고, 그 주변으로 광산 노동자들의 사택이 있었다. 당시에는 마을 입구에서 옥정사로 가는 길에 50여 가구, 광산 마을에 40가구가 거주하며 번성했다. 현재는 57가구가 있으며, 실제 사람이 사는 가구는 45가구 정도 된다. 10년 전 광산마을로 이사 온 이모(67) 씨는 “당시 강제 노동하던 사람은 현재 한 집 살고 있는 걸로 안다. 남자 분들은 나이가 다 80이 넘었으니까 거의 다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일제의 자원수탈을 증명할 수 있는 유적 중 부산에 유일하게 남은 곳이 광산마을이다. 이외에도 전남 해남 황산면의 옥매마을, 인천시 부평 삼릉의 줄사택 역시 일본의 전범 기업이 군수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 동원한 흔적들이다.

관사 뒤편 길을 따라 걸어가면 있는 일광광산은 조선 내 5대 구리광 중 하나였다. 일광의 일본식 발음이 ‘닛코’라 ‘닛코광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광광산은 1930년대 개발됐으며, 일본의 대표 기업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에서 운영했다. 구리와 은이 풍부해 노동자들은 쉬는 날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채광에 동원됐다. 심지어 일주일에 두세 번은 기장면 장안읍의 청년 훈련소에서 군사 훈련까지 받아야 했다. 당시 국외로 강제 징용되기 싫어 억지로 국내 징용을 택한 조선인 노동자들도 많다고 한다. 마을 주민인 김금열 할머니(87)는 “일제강점기에 광산마을에서 일본인 여자도 간혹 봤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관사로 사용한 건물은 아직까지 잘 보존돼있다. 관사 주변에는 각종 건설 기계들이 자리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집 앞에서 고추를 말리고 있는 김금열 할머니(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집 앞을 지나가는 달음산 등산객에게 “대파 사이소”를 외치는 김금열 할머니는 18세에 광산 마을로 시집 왔다. 마을 이장도 맡아 했던 남편은 광산에서 구리를 캐며 생계를 유지했다. 오래전 남편이 폐병으로 죽고 할머니 혼자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본인도 광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며 “지하 몇 층씩 되는 광산에서 채광을 하다 보면 떨어져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광석을 캐진 않았어도 갱구 밖으로 실어낸 광석들을 비우고 정리하는 일을 했다”며 고된 노동으로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해방 이후 일광 광산은 몇 차례 채광과 휴광을 거듭했다. 6·25 전쟁 이후에는 구리 대신 중석을 캐면서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구리 수요가 급증해서 영업이 활성화되다가 1994년 채산성이 떨어지자 폐광됐다. 폐광된 일광광산에서 중금속이 섞인 갱내수가 갱도를 타고 흘러나와 인근 농경지나 하천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광해관리공단 영남지역본부는 2014년 6월부터 수질 정화시설 설치를 시작해 2016년 6월에 완공했다.

광산마을 근처 도로 옆에는 중금속 물질로 인해 색이 변한 돌의 모습이 보인다. 오염 수준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한국광해관리공단은 광산지역 피해 방지와 효율적인 광해(鑛害: 광물질로부터 발생하는 피해)방지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광해방지사업으로는 가행(可行: 운행 중)광산 및 휴·폐광산 광해의 방지 및 훼손지 복구 사업과 광해방지시설의 설치, 운영 및 관리, 토양오염 개량 등이 있다. 한국광해관리공단 수질사업팀 담당자 윤정훈 씨는 “일광광산 수질 정화시설은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주 1~2회 현장 방문을 통해 관리한다”며 “쾌적한 환경을 위해 앞으로 정화시설은 계속 운영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광산입구 앞 한국광해관리공단의 경고문. 현재 수질 정화시설로 광산입구가 막혀있고 들어갈 수 없다(사진: 취재기자 이지은).

하지만 수질 정화시설로 인해 현재 일광광산은 입구조차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장군청 관계자는 “일광 광산을 관광지화 하려면 장기적인 계획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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